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이것은 기독교가 단순한 신앙의 종교라는 것과 대조된다. 신앙은 열광의 강도를 늘 최고로 여기나, 수행은 자기를 변혁시키는 마음의 다스림을 본질로 삼는다. 수행은 두 단계로서 설명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회적 자아를 자연적 무아로 전이시키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은 또 자연적 무아를 사회적 무심으로 옮겨놓는 일을 가리킨다. 자아는 사회생활의 반영이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떠나게 되면, 그의 자의식은 점차로 희미해진다. 자의식은 남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게되는 복잡한 콤프렉스의 소산이다. 사회생활은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먹고 먹히는 소유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유식학은 사식론(四食論)이라 부른다. 우선 음식을 요리해서 남들을 의식하면서 잘먹는 단식(段食)이 있고, 그
목적세계 실현 위해서는 늘 도구 필요불교에서 주인-노예 없고 역할 차이뿐 중생으로서의 인간세계는 이용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목적의 세계다. 이용가능성은 손에 잡히는 소유가 충족될 때에 생긴다. 자연을 도구로서 이용하고, 인간사회도 나의 목적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생각한다. 이용가능성의 추구와 소유욕과 목적의식과 도구화는 다 그 의미에서 같이 간다. 이용하는 자는 승자로서의 주인이 되고, 이용당하는 자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그 동안 인류의 에누리없는 역사고, 사회생활의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승자의 입장에서 도구를 부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승자가 늘 자연을 도구로서 지배 이용했고, 타자의 사회를 도구화했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이용가능성의 본질을 ‘위하여’(um-zu)로서 집약
성불만 고집해선 대중과 멀어질 뿐부처를 닮아 가는 것이 대승의 자세 나는 이 컬럼을 통하여 가끔 추상의 정신으로 변한 불교의 공허함을 지적한 바 있었다. 오늘도 이와 유사한 바를 강조하련다. 추상의 정신은 원리 면에서 옳으나, 구체적 생활의 작은 의미가 증발되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유자들이 일반적으로 요순병(堯舜病)에 걸려 임금이나 각자가 요순이 되는 것만을 강조하다가, 실생활에서 실천가능한 작은 내용들을 간과한 우활(迂闊)한 유학이 되고만 어리석음을 범했다. 나는 이런 유교의 병이 불교에서도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늘 우려해 왔다. 불교가 수행의 종교인 것은 확실하나, 불교인이 너무 확철대오의 부처 경지에 이르는 것만을 능사로 삼다가, 결국 실생활에서 불자들이 작은 부처되기의 길을 무
불교, 해체시대에 걸맞는 구세적 신실학수부귀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 줘야 흔히 불교를 탈속적 종교로 여겨 현실적 국가중흥의 사상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둔세적 허학(遁世的 虛學)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을 시급히 불식해야한다. 불교는 해체시대에 걸맞는 구세적 신실학(救世的 新實學)이다. 지금 나라 안에 온통 떠들썩한 가짜 학력문제와 크다란 부정부패에 불행히도 불교계 일각이 얽혀 있어 구세적 신실학으로서의 불교의 중흥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허탈감과 실망을 넘어 비분강개 마저 느끼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교를 살리는 길은 청정한 무소유의 길이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종교가 한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대중을 감발시켜 변하게 하는데 있다 하겠다. 대중은 무소유와 같은 청정한 계율을 드높이
박사학위 실력 기준으로 여기는 사회얼짱이 인생에 영향, 본질적으론 같아 한국인의 근본주의적(원리주의적) 심리의 양면성이 전에 언급되었다. 이 심리는 명분주의와 함께 간다. 근본주의는 어떤 정신의 근본원리를 중시하는 장점을 갖고 있는 반면에, 또한 구체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추상적 원리의 이념에만 매달리는 단점을 안고 있다. 마찬가지로 명분주의는 어떤 일의 이념적 정당성을 대의명분으로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이겠다. 명분이 뚜렷하지 않으면, 하는 일에 대한 지지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명분을 조작한다. 나는 우리가 이 명분적 정당성을 얻기 위하여 도처에 허위의식을 그럴싸하게 꾸며왔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사리사욕 때문에 자신의 소속정당을 하루아침에
종교적 광신의 단세포적 작태는 유치의 극치참다운 전도는 인간의 신성 깨닫게 하는 것 한국인의 신바람 기질이 동시에 광기의 독을 분비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했다. 그 광기의 독이 우리 사회에 정치적 열광과 종교적 광신의 작태로 나타난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미쳐 날뛰는 단세포적 광신은 이미 고황(膏)에 깊이 든 한국병이다. 종교가 격정적으로 되어간다. 격정적 신앙이 바로 광신의 작태다. 종교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종교의 해악이 인류사에서 종교의 선행 못지 않게 많다. 종교가 인간에게 편견과 증오심과 아집과 권력의 지배의지를 불러일으킨 사례가 너무 많다. 우리는 종교적 광신의 단세포적 작태를 유치의 극치라고 이제 인식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사회가 한 단계 수준이
전 관장의 수련관 운영권 주장으로 운영에 진통을 겪고 있는 서울 파라미타청소년협회 강남구립 역삼청소년수련관(관장 진정순)이 7월 26일 기자회견을 갖고 수련관 운영 정상화 방안을 밝혔다. 역삼청소년수련관이 이날 밝힌 정상화 방안은 크게 세 가지로 △공정한 인사 △불교 청소년 지도자 육성 △재정 안정화 등이다. 먼저 법인에서 직원을 공채 채용 후 파견하거나 파라미타 중앙본부가 확보하고 있는 청소년 지도자를 발굴해 채용할 계획이다. 또 입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명상, 참선, 요가 교실과 선과 명상을 결합한 상담활동을 비롯해 인근 지역 학교와 연계한 방과후 학교를 운영해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배움의 길을 열어 줄 방침이다. 7월 25일 기준으로 미확인된 금액까지 1억여 원의 적자는 서울 파라미타
편가르기-증오심은 한국인 숙업흑백논리 극복 위한 화쟁사상 절실 이 글은 지난번 한국인의 대등적 평등병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평등이 대등이 아니듯이, 부처님이 가르치신 동일성은 상호 상관성을 띤 차이의 개념인 상관적 차이를 뜻한다. 우리는 보통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부부는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향유하지 않는다. 모든 싸움은 다 상처를 남긴다. 친한 사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이들은 입안에 들어간 것도 서로 나누어 먹을 만큼 지낸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이가 뒤틀어져 서로 외면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것을 나는 수없이 목도했다. 같다고 너무 엉키고, 다르다고 너무 척 진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이런 감정상의 동/이(同/異)가 너무 뚜
부처님은 차별 거부한 평등적 사유 첫 인물자기 직업에서 달인이 되는 게 불교적 평등 불교가 인도에서 내몰린 이유중의 하나가 불교가 지닌 평등사상 때문이라고 불교학자들은 말한다. 카스트로 제도화된 힌두이즘의 계급을 가장 먼저 타파하신 이가 석가모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 지계제일로 평가돼 온 우바리 존자는 궁중이발사로 인도의 카스트 중에서 가장 천민인 수드라 계급출신이었다. 우바라 존자가 출가한 이후에 뒤에 출가한 왕족들이 그에게 경배한 것은 힌두이즘의 사회통념상 획기적인 일이다. 그는 불멸후에 마하 가섭 존자를 중심으로 오백여 제자들이 칠엽굴에 모여서 제일차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할 때에, 주로 율장을 엮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다. 부처님은 이처럼 직위나 계급, 학식과 재산의 유무로
감정 절제보다 남발이 現 한국인 모습수행으로 흔들리지 않는 안목 갖추어야 한국인은 유달리 희로애락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민족인 것 같다. 내가 아는 벨지움의 어느 작고한 화가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비교하면서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라서 스파이행위를 거의 할 수 없는 체질을 타고 난 민족 같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단번에 그의 감정을 얼굴에 100% 노출시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슬퍼서 울어도 몸을 비틀고, 우스우면 기절할 정도로 명랑하다가, 화를 잘 내다못해 홧김에 엉뚱한 짓을 자행하고, 식당에서 여자들끼리도 악을 쓰면서 수다떤다. 감정을 절제하기 보다 오히려 감정을 폭발하는 쪽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생활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데모를 해도 아주 극렬하다. 그래야만 데모
우리사회에는 단세포적인 흑백논리 만연불교계도 단순가치 휘말릴 것 같아 아쉬워 근본주의는 본디 기독교의 신앙에서 성서에 적혀 있는 말씀 그대로 일점일획도 고침이 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려는 교리를 말한다. 근본주의는 불변의 신앙 원리를 위하여 시류에 아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점을 지니고 있으나, 일체의 창조적 유연성을 배격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우려가 더 크다.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저 근본주의적 태도는 주로 명분주의적 집착과 상통하는 것 같다. 일종의 주자학적 근본주의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상당히 긴 시간동안 지배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이 언제인데 주자학적 명분론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사고방식에 아직도 영향을 미치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주자학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자학적 근본주의가
한국인의 恨은 저력-모략 가능성 동시에 지녀기복 우습게 여기지 말고 긍정적으로 유도해야 한(恨)의 심리는 신바람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의 허전한 결핍감이 마음에 남긴 어떤 심적 외상(外傷=traumatism)인 것으로 보인다. 신바람이 한국인의 적극적 심리상태를 반영한다면, 한은 한국인의 결핍적 심리상태로서 욕망의 좌절처럼 보인다. 한국인의 한은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것과 좀 다르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 한은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에 대한 증오감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한을 갚기 위해 적극적 복수를 결행하고, 복수극이 끝난 다음에 스스로 자결하는 그런 비극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한국인의 한풀이는 상대방에게 정면승부를 걸지 않고, 다분히 음성적인 면을 지닌다. 그래서 우회
‘신바람’은 한국문화의 특징이자 저력열정 지혜롭게 쓰도록 불교계 이끌어야 지난번부터 우리는 한국인의 역사적 업과 불교사상의 대응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금주는 신바람의 업과 불교문화의 대응방안을 훑어보려 한다. 무의식에서는 이중적 성격이 한 묶음으로 작용하고 있듯이, 업도 그러하다. 좋게 보면 모든 업은 선업을 증장시키지만, 반대로 그것은 업장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신바람도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신바람의 업을 짙게 띠고 있는 것 같다. 무속적 샤먀니즘의 영향으로 그런 것 같다. 한말의 종교사학자인 이능화가 이 점을 이미 설파했다. 신바람 또는 신명(神明)은 무속적 제정(祭政) 일치시대인 고대 한국문화의 생리를 단적으로 표시한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마한
순수성도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독약청정하되 으쓱대지 않는 연꽃 닮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유명한 「서시」의 몇 구절이다. 사춘기의 소녀들이 가장 애송한다는 시다. 사춘기의 소녀들은 가장 순수하고 지순하다. 서정주의 유명한 시 「동천」을 옮긴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무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두 시는 다 순수의 해맑음을 노래하고 사랑한다. 윤동주의 시는 머나먼 거리에 인간의 손때가 묻을 수 없는 순수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세속의 바람에 상처
부처와 중생은 사고방식-태도 차이우리 민족성 선용은 한국불교 과제 ‘성격이 운명’이라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아이스퀼로스가 말했다. 확실히 인간의 성격이 그의 운명이고, 그의 미래적 기획이다. 운명은 받은 것이고, 기획은 자유로운 행동이다. 자유로운 행동도 백지에서 그려지는 것이 아니고, 성격의 틀을 통하여 빚어진다. 이 세상에 부처가 되기 전에 온전히 무염한 중생의 성격이 없고, 또 중생의 성격 속에 여래장이 깃들어 있기에 온전히 저주받은 중생의 성격도 없다. 중생의 성격을 두고 100% 시비와 선악으로 판단하는 것은 여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성격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화신불로서 석가모니불이 이 땅에 오신 까닭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마음을 활용하여 부처
서구 종교-철학 한계로 불교 관심 급증생활불교-의식·경전 한글화 서둘러야 세계사가 친불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서구에서 교회에 나가는 신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서구적 종교와 철학의 자기 한계를 서구인들이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 좋은 시절인연에 한국불교는 여전히 미적거리는 것 같다. 불교가 한국불교사에서 일대 큰 혁명을 이룩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시절인연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이다. 불교사의 혁명을 기할 고승대덕의 출현이 그립다. 한국의 역사를 구원할 그런 종교로 불교가 거듭 나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불교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바꿔야할 사명감을 의식해야 한다. 불교는 전지전능한 슈퍼파워를 믿는 종교가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을 부처의 사고방식으로 되돌리게 하
불교는 마음-인간 중심 아니다마음은 정신이 아니라 사고방식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는 것을 이미 다 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음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해석함에 인간의 마음이 삼라만상을 짓는다고 말하는 불교인이 적잖은 것을 보았다. 이것은 마음을 철두철미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겠다. 내가 대학생시절에 불교학개론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도 불교는 기독교의 신중심과 달라서 인간중심의 종교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점차로 그 서술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신중심이나 인간중심이나 다 같은 인격중심주의 사상에 불과하다. 불교는 어떤 중심주의도 설파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중심주의나 마음중심주의가 아니다. 삼라만상은 인간의 마음이 지은 것
불의를 상정하는 순간 투쟁은 필연구원은 심판 아닌 근심 잊게 하는 것 나는 서양의 기독교 신학사상이 역사적 구원을 강조한 종교로 그 동안 해석되어 왔다고 본다. 역사에서 선의 종국적 승리를 기약하는 의미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최후의 심판사상으로 집약된다. 기독교는 늘 선의지와 도덕의식을 철저히 강조하는 도덕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 승리를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나 불교는 죄를 처단하면서 선의 역사적 승리를 쟁취하거나 기약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불의와 싸우는 선의지는 또 달리 불의와 역시 다투는 다른 선의지와의 투쟁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쳐 왔다. 나는 불교적 구원관이 예술미학적 본질을 띤다고 여긴다. 불교는 죄악이 극성을 피우는 세상을 정복하여 죄가
투쟁적 인간은 번뇌 치성한 중생일 뿐화려한 명분 앞세운 지도자 선택 안돼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교가 해탈의 종교이므로 현실적 정치와 세속의 실질을 지도하는 사상에는 걸맞지 않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 오해는 주자학의 비판에도 기인하지만, 일부 불교인들의 지나치게 괴이한 탈속적인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겠다. 불교는 이제 세상을 제대로 경영케 하는 수승한 현실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이라는 뜻의 세간해(世間解)라는 이름이 부처님의 별명임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경영하는 지도자는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것은 ‘나는 마음을 비웠다’라고 입으로만 떠벌리는 행각에서가 아니라, 오직 불교적 공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가능하다. 너무 투쟁적인 인간은 마음
기독교는 신의 말 기준으로 선악 구분정의도 외곬 고집하면 병이 될 수 있어 기독교가 최후의 심판을 종장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는 그런 심판의식이 없다. 불교는 해탈하거나 윤회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말하기에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선악의 영원한 양분을 말할 리가 없다. 기독교에서 선과 정의가 동의어인 만큼, 악과 불의도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정의의 종교겠다. 즉 기독교는 도덕주의적 종교다. 그 정의와 도덕의 기준은 신의 말씀으로서 늘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제시된다. 선/악, 정의/불의, 진리/반진리의 이항대립에서 전자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곧 선이고 정의고 진리다. 그래서 기독교는 단정적이고 투쟁적이며 행동적이다. 선과 정의의 종교가 절대주의화하면, 절대적인 것은 하나주의로 표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