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무술년은 이리불교대학 학생처장직을 놓고 전북지역단 수석부단장으로 시작했다. 수행이 곧 포교이며 포교가 곧 수행임을 되새기고, 포교현장을 찾아가는 포교사이자 전법의 원력을 실천하는 포교사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다른 해보다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많았다.물론, 따지고 보면 누구 탓도 아니었다. 긴 세월 참선만 했지, 공부하는 불자가 아니었기에 실력이 부족해 당하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포교사가 되기로 했다. 알음알이가 많지도, 표현이 능숙하지도 못하지만 내 주장보다는 경청하는 자세로 백가지 중에
20대 중반 때였나.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사자암으로 동행했다. 난 암자 밑에서 기다렸다 같이 돌아오곤 했다. 불현 듯 삼배라도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자암에 올랐고, 노보살들이 ‘천수경’을 보지도 않고 염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부끄러웠다.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외우다가 틀린 글자는 없는지 아내에게 점검 받으며 절반을 외웠다가 잊고 다시 처음부터 외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불교에 젖어들었다.어느 날, 사자암의 노보살 손에 이끌려 목적지도 모르고 따라나선 곳이 있었다. 이리불교대학이었다. 일우 스님
2014년 우연찮게 지역복지 자광팀 팀장 역할을 맡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군포교 활동부터 지역복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국군통합병원 내 자광사는 부대 특성상 복무하는 장병들 인원이 적다. 입원하는 장병들이 많을 때도 있지만 퇴원해서 돌아가든지 하면 몇 명 되지 않는다. 장병이기 보다는 환자들이라서 거동이 어려워 법회 참여도 어렵다. 병원 내 법당이 있는 것조차 모른다. 매주 법회는 자광팀 소속 포교사가 2회, 스님이 2~3회를 담당하고 있는데, 법당에 가만히 앉아서 장병들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나를 위해 준비된 날이었다.알람 소리에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간단하게 옅은 화장을 하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기차역까지 배웅하려고 차에서 대기 중이었다. 예약해 놓은 서울대학병원으로 진료를 가는 날이었다. 귀찮고 힘들지만 이렇게라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그랬는지 기분은 좋은 편이었다.워낙 군데군데 질환이 많은 몸이다. 6년째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고 있다. 여기저기 4곳에 분포된 종양들이 진행되지 않고 멈춘 상태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병원으로 향했다
생업 때문에 몇 년 서산에서 지낼 때 서산 부석사를 원찰로 정하고 절에서 수행·봉사하며 불자로서 습을 익히고 배우고 있었다. 신도전문과정에 등록하게 된 것은 서산에서의 일이었다. 법명을 받은 지 6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신도전문과정을 마치면서 전국적으로 활동 중인 디지털불교대학총동문회에 합류했고, 도반들과 같이 신행생활을 하게 되었다. 도반들은 내가 바른 불자가 되도록 가르쳐 주는 선지식과도 같았다. 총동문회 임원으로 여러 해 봉사할 수 있었던 것도 도반들 덕분이다.신도전문과정을 수료하면서 바로 포교사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해 부
세상에는 잘 인지하지 못한 참으로 감사한 일이 많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렇다.세상에는 일찍이 한 가지 법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그 법을 보시고 깨달았다. 중생들을 위해 그 법을 전해 주신 것이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왔다. 수많은 불보살과 역대 조사들의 자비에 힘입어 2500여년을 면면히 흘러 왔다. 그리고 나에게까지 닿았으니, 이 깊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어머니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절에 다니셨다. 넓은 백사장에는 모래가 금빛으로 빛났다. 백사장 옆 낮은 구릉에는 해당화가 무리지어 피고 그 뒤쪽에는 초병 같은
“포교사, 안 할 거예요.”새롭게 찾아온 인연에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말 뿐이었다. 뒤늦게 불교대학을 마친 시동생이 포교사 시험을 권하며 서울에서 자료를 보내왔다. 직장을 마치면 자료 들고 카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삼법인, 제행무상을 배웠다. 삼라만상이 영원한 게 없으니 집착할 이유도 없었다.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다 가는 게 중요했다. 포교사 품수를 받고 제일 먼저 남명 스님을 만났다. 함께 암 병동을 돌며, 불자들을 위로하고 염불기도를 올렸다. 시다림이 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 그다지 필요한 존재라고 여겨지지 않았다.여고 2학년 때였다. 인생에 의문을 갖고 서울 조계사를 찾아갔지만 아직 인연이 아니었는지 다시 발길을 돌렸다.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가족 중에서 마지막 서열이었고,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교육에서도 서열에서 제외돼 대학 공부도 스스로 했다. 한참 예민하고 자기 가치에 대해 확신이 없던 터라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당시 유일한 도피처는 독서였고, 톨스토이의 ‘인생론
사실 어떤 보상이나 보수를 받지 않는다. 그런 업도 아니다. 한데 왜 아까운 자기 시간을 쪼개고 지갑을 열고 전법의 수레를 밀고 있을까.생각컨데 포교사가 받는 보상이라면 부처님을 향한 신심 증장이나 환희심이랄까. 도반과 부처님을 닮아가는 여정을 함께 걷는다는 자부심과 자존감이랄까. 그거면 족한 것이라 믿는다.때문에 그런 번거로움과 수고로움도 감내할 수 있다. 포교사는 불만은커녕 당연한 자기부담으로 여긴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를 몸소 현장에서 느끼는 포교사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보시행을 실천하는 사무량심 때문인
살고 있는 곳은 제주시다. 한데 서귀포시 군포교 사찰2팀에 소속돼 2년 정도 전법의 수레를 함께 밀고 나갔다. 현재 염불1팀이지만 당시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애쓰고 있는 포교사들 때문이다.정기 군법회가 열리는 더운 여름 날이었다. 1시간 가량 차를 달려 군법당으로 가야했다. 강정 해군기지 내 해관사를 담당했던 군2팀 포교사 시절이었다. 일찍 집을 나서 도착해보니 부지런한 포교사는 벌써 땀을 흘리며 국수를 삶는데 여념이 없었다. 법회 뒤 군장병들에게 내놓을 점심공양 준비가 한창인 것이다.법당에서는 팀장과 포교사들이
사실 난 찬불가 예찬론자다.찬불가 속에는 엄청난 신심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재적사찰 합창단 단장을 맡을 만큼 찬불가에 심취했다. 찬불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심의 에너지를 재적사찰에서만 누릴 수 없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에너지에 심취하길 바랐다. 내친김에 포교사단 전북지역단에 음성포교팀을 꾸리는데 앞장섰다. 팀장을 맡아 찬불가 보급에 열과 성을 다했다.찬불가가 비불자들 마음에도 닿길 기원했다. 고심 끝에 염불봉사 때 찬불가 목록에 있는 조가를 불러 보기로 했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유족들과 문상객들이 찬불가(조가)의
어떤 존재든 인연법을 벗어난 존재가 있을까? 나 역시 인연의 결과물인 것을 알고 그 인연의 시작인 오늘, 지금의 행위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큰 영향을 주는 업이기에 항상 깨어 있음으로 수행을 삼는다.14년 전, 순찰차를 타고 전주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을 순찰하던 중 들려오던 목탁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끌리듯 들어간 곳이 전북불교회관이었다. 마침 화엄불교대학 수강생을 모집 중이었다. 입학원서 한 장을 들고 나왔다. 크게 주저함 없이 등록했고, 16기로 졸업한 뒤 다음해 학림원 16기로 학업을 마쳤다.불교대학과 학림원을 다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