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떤 보상이나 보수를 받지 않는다. 그런 업도 아니다. 한데 왜 아까운 자기 시간을 쪼개고 지갑을 열고 전법의 수레를 밀고 있을까.생각컨데 포교사가 받는 보상이라면 부처님을 향한 신심 증장이나 환희심이랄까. 도반과 부처님을 닮아가는 여정을 함께 걷는다는 자부심과 자존감이랄까. 그거면 족한 것이라 믿는다.때문에 그런 번거로움과 수고로움도 감내할 수 있다. 포교사는 불만은커녕 당연한 자기부담으로 여긴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를 몸소 현장에서 느끼는 포교사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보시행을 실천하는 사무량심 때문인
살고 있는 곳은 제주시다. 한데 서귀포시 군포교 사찰2팀에 소속돼 2년 정도 전법의 수레를 함께 밀고 나갔다. 현재 염불1팀이지만 당시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애쓰고 있는 포교사들 때문이다.정기 군법회가 열리는 더운 여름 날이었다. 1시간 가량 차를 달려 군법당으로 가야했다. 강정 해군기지 내 해관사를 담당했던 군2팀 포교사 시절이었다. 일찍 집을 나서 도착해보니 부지런한 포교사는 벌써 땀을 흘리며 국수를 삶는데 여념이 없었다. 법회 뒤 군장병들에게 내놓을 점심공양 준비가 한창인 것이다.법당에서는 팀장과 포교사들이
사실 난 찬불가 예찬론자다.찬불가 속에는 엄청난 신심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재적사찰 합창단 단장을 맡을 만큼 찬불가에 심취했다. 찬불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심의 에너지를 재적사찰에서만 누릴 수 없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에너지에 심취하길 바랐다. 내친김에 포교사단 전북지역단에 음성포교팀을 꾸리는데 앞장섰다. 팀장을 맡아 찬불가 보급에 열과 성을 다했다.찬불가가 비불자들 마음에도 닿길 기원했다. 고심 끝에 염불봉사 때 찬불가 목록에 있는 조가를 불러 보기로 했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유족들과 문상객들이 찬불가(조가)의
어떤 존재든 인연법을 벗어난 존재가 있을까? 나 역시 인연의 결과물인 것을 알고 그 인연의 시작인 오늘, 지금의 행위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큰 영향을 주는 업이기에 항상 깨어 있음으로 수행을 삼는다.14년 전, 순찰차를 타고 전주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을 순찰하던 중 들려오던 목탁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끌리듯 들어간 곳이 전북불교회관이었다. 마침 화엄불교대학 수강생을 모집 중이었다. 입학원서 한 장을 들고 나왔다. 크게 주저함 없이 등록했고, 16기로 졸업한 뒤 다음해 학림원 16기로 학업을 마쳤다.불교대학과 학림원을 다니면서
변변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름 포교의 방법과 초심자의 기도와 수행을 정리했고 자신부터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첫째, 내 자신이 불자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그러면서 가족, 친지, 이웃, 불자와 비불자 등 모든 이들이 불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수승한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야 한다. 둘째, 봉사해야 한다. 사랑보다 더 크고 더 깊은 사랑이 있다. 자비심의 실천, 곧 봉사다. 남을 위해 애쓰며 상을 내지 않는 언행은 보람이 뒤따른다. 알게 모르게 공덕도 쌓인다. 이런 무주상보시는 바라는 마음
“포교사가 누구지? 뭐하는 사람이지?”‘포교사’는 생경한 단어였다. 직업 같은 단어였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사’라는 글자가 붙은 걸 보면 뭔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6년 전이었다. 불교대학에 입학한 후 포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행과 삶이 일치하는 것을 지향하고 ‘수행이 곧 포교, 포교가 곧 수행’ 실천하는 재가불자들이 포교사였다.포교사가 되면 불교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교는 동체대비와 자리이타라고 생각한다. 교리 배움에 그치지 않고 삶에서 포교현장에서 이타를 행하는 실천
“목탁소리가 울려서 다시 돌아오네.”사찰에 어울릴 법한 시 같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름다운 사찰을 순례하는 포교사들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위치한 억정사지 대지국사 탑비 앞에서 읊는 이병성 원주총괄팀장님 한 마디가 그랬다. 2018년 6월4일 일요일이었고, 그 날도 오전에 군 법회를 마치고 오후에 시간을 내서 갔던 순례였다. 이날 벌써 충주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를 답사하고 온 뒤여서 포교사들은 좀 지쳐있었다.“억정사지는 신라말부터 조선조까지 1000년 이상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고려
“포교사님! 기독교는 매주 일요일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보는데, 왜 불교는 한 달에 한 번만 오세요? 매주 오시면 안 되나요? 우리들끼리 법회를 보는데 목탁이 잘 쳐지지 않아요.”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하소연이다. 원주지역 군부대의 군종병이 포교사로서 군법당에 첫 발을 디딘 내게 건넨 말이었다. 이 병장으로 기억하는 멋진 군종병의 집은 머나먼 타국 호주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민을 가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국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고국의 역사와 문화를 접하려 했던 젊은이였다. 이제는 제대를 하고 호주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
석남사 해설봉사를 오래 하다 보니 절 구석구석 눈에 보이는 것도 많다.지금까지 8년 동안 한결같이 매주 일요일 팀 활동을 한다. 평일에도 공양간 운력은 물론 청소, 풀매기, 꽃 심기, 낙엽 쓸기 등 눈에 띠는 대로 동참하고 있다. 이제는 주지스님뿐 아니라 스님들과의 돈독한 관계로 포교사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언제든지 절 살림을 맡겨도 든든하다는 믿음이 느껴져 감사한 마음이다.스님과의 신뢰가 형성되기까지 팀 선배들의 노고가 제일 컸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석남사를 비운 적이 없었다. 해설요청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처님오신날…. 5월은 행사도 많고 참 감사한 달이다.대구~울산 매주 왕복하면서8년째 재적사찰 석남사 해설부처님 만나는 일이라 ‘행복’재적사찰이자 포교사로서 또 사찰문화해설사로서 울산 가지산 석남사에서 봉사한 지 7년이 넘었다. 매주 대구에서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익숙해져버린 그 길과 도착지인 석남사는 마치 옆 동네 가는 길처럼 가깝고 정겨운 이웃집 찾아가는 것처럼 편안하다. 사는 집은 대구, 봉사하는 재적사찰은 울산 울주군 가지산에 자리 잡은 석남사다.8년째 매주 찾는 도량이지만 지금도
억수 같은 비도 잠시 쉬어갔다.3년 간 108사찰순례 원만회향노인요양시설 원장 맡아 정진대구 생명나눔본부 개소 운영사찰을 참배하려고 버스에서 내리면 멈췄다. 좋은 마음이 모이면 다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 108사찰순례단의 마음들이 참 장했던 것이리라. 한 번은 내장사 참배를 하러 가는데 눈이 많이 왔었다. 출입을 통제했다. 그래도 108사찰순례단은 참배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감사한 마음은 버스 안에서 염하는 관음정근으로 대신했다. 얼마나 간절히 관음정근을 했던지 지금도 단원들은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제주도 순례는 김해
법명이 생겼다.대구 자비의전화로 봉사 첫 발포교사 되면서 초발심 되새겨복지기금 마련 순례 총무 맡아대구불교교육원 3기 야간반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여하튼 열심히 했다. 대구 중구 관음사에서 ‘깨달음 경전읽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경에 깨달음이 있다는 뜻인지, 읽으면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말인지 궁금했고, 이참에 부처님 말씀 좀 제대로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동참했다. 그런데 처음 가는 날, 정우 스님이 목련화라는 법명을 지어줬다. 같이 갔던 불자가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스님 처음 왔는데 법명을 줍니까?” “열심히
경전공부와 천일 다라니기도에 전념하며 부처님 법음을 배우는 신행은 크나큰 자산이 되고 있다. 직장 다닐 때 몸에 익은 사찰에서의 울력이 퇴직 후에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포교사 활동과 병행하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불자로서 행복한 나날은 스스로를 보람되게 만든다.자비도량참법으로 신심 증장업장 참회하면서 자비심 키워천진불 웃음소리 끊이지 않길유년시절 교리도 모른 채 부모님 손잡고 올랐던 산사의 큰법당은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 불연의 씨앗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했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지역 근교 산사를 늘 참배하며 불심을 차곡차
부처님 앞에 복전을 가꾸는 일은 마냥 즐겁다. 재적사찰로 기도하러 가는 신행이 일상이 되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되리라 믿는다. 매주 일요일 아침, 그 마음 들고 사찰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재적사찰 울산 황룡사에서국제청소년성취포상제 활동예불하는 아이들 보면 보람3월18일 일요일은 조금 특별했다. 울산 태화강 황룡사에서 봄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황룡사 ‘리틀붓다’(어린이·청소년법회)의 국제청소년성취포상제와 어린이·청소년 자기도전 신체활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사찰 마당에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천진불들과 생활하는
“어머니, 아버지. 오늘이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두 분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가져왔어요. 어머니가 배워보라던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다 외웠습니다. 들려 드릴 테니 이승에 미련은 다 버리세요.”‘반야심경’ 배우라던 어머님고인된 부모 산소 앞서 암송군포교 일선서 포교 자부심무릎 꿇고 앉아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암송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이 바지를 적셨다. 하지만 홀가분했다. 해질녘 산을 내려왔다. 이때부터 ‘반야심경’ 뜻풀이에 매달렸다. 옥편을 펴놓고 한 자 한 자 뜻을 풀었다. 문장으로 연결이 안 됐다. 어느 스님의 해설서 등을
논밭 지나 산길로 두 시간 정도, 걸어 다녔다.어머니는 ‘어린 너라도 데리고 다니니 적적 하진 않다’고 했다. 지천으로 널린 논밭일 때문에 새벽에 갔다 오전 중 논밭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는 새벽 어스름이면 자루에 쌀 두되 정도 넣었다. 어린 아들에게 쌀을 지우며 부지깽이만한 지팡이를 손에 쥐어줬다. 절에서 사탕을 주면 주머니에 넣어 집에 와서 동생과 나눠 먹었다며 어린 아들을 대견해 했다. 어린 아들이 6살 때 일이다.11살이 되니 어머니는 절에 갈 형편이 못 됐다. 쌀 한말과 양초, 향, 과일 등을 한 보따리 싸서 지게에 올
이제 108성지순례는 끝났다. 9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한 신심으로 뚜벅뚜벅 걸어 회향했다.금동관음보살상 반환 애쓰며재적사찰 부석사 회보 발행편집 맡으며 초심자 안내도아직 포교사로서 재적사찰 핵심신도로서 역할이 남았다. 사찰에는 늘 봉사자가 필요하다. 특히 서산 부석사는 일본에서 되돌아온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사연은 이렇다. 2012년 절도단이 일본 대마도에서 훔쳐 국내로 반입한 불상이다. ‘고려국서주지부석사(高麗國瑞州地浮石寺)’ ‘천력삼년(天曆三年)’이라고 쓰인 조성기에서 1330년 서산 부석사
그래, 아마도 전생부터였나 보다. 부처님과 인연은 숙연이었다.교회에는 별 흥미 없던 유년삶의 무게 나눌 곳 찾다 귀의초심자들 돕고자 포교사 품수불교가 익숙했다. 어릴 적 TV에서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보면 마냥 좋았다. 왜 그럴까 깊이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친구들이 교회를 가자고 할 때도 그랬다. 가 봐도 남의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재미라고 할까 흥미라고 할까, 모두 없었다.어떻게 살아왔나.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부처님을 향해 있던 마음, 하지만 제자리걸음이었던 그 마음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부
쉽지 않았다. 포교사 자격고시에 또 떨어졌다.3번 도전 끝 포교사 재 품수장의염불·군법당·소년원·병원인연 닿는 곳곳서 전법 활동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차를 2번씩 갈아타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아쉬웠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4남매와 남편, 시어머니 모두 건사해야 했다. 주경야독이란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재입학한 불교대학을 향하는 차 안에서 책을 펴야하는 날이 계속됐다. 부처님 일이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과 세상 제일 무거운 눈꺼풀을 붙들고 공부했다. 포교사가 돼야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1980년 5·18 소재 영화관람전법하는 사명감 다시 느껴힘들었지만 불교대학 재입학1980년 5월, 서울 한 택시운전사가 서툴고 짧은 영어로 독일인과 말을 나눴다.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황량한 광주 거리, 그 거리에 오가는 군인들과 탱크 그리고 광주 사람들. “모르겄어라, 우덜도 우덜한테 왜 그라는지….” 기자였던 독일인은 대학생과 광주지역 택시운전사의 도움 속에 촬영을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