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他意가 모두 다 부처님의 뜻다른 것 아니기에 모든 부문이 한 맛이종상 화백이 그린 원효대사 표준 진영.흔히 우리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쉽게 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비우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대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한쪽으로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보신(報身)에 대해 상주라는 집착과 무상이라는 집착이 있는데, 두 분의 주장 중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리는가? 어떤 분은 말하기를 다 맞기도 하고 다 틀리기도 하다. 그 이유는 만약 한쪽만 결정적으로 집착하면 다 과실이 있고(若決定執一邊 皆有過失), 장애가 없이 말한다면 다 도리가 있는 것이다(如其無障碍說 俱有道理).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
뜬 구름 흩어지니 만리 하늘은 파란 한 모습 마음 안 출렁이는 망상 가라앉혀 당처를 보라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수보리여,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런 모든 중생은 이와 같이 무량한 복덕을 얻느니라.” {冶父}種瓜得瓜 種果得果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을 얻도다. 무량복덕을 얻는 중생은 인과법에 따라 세세생생 심어놓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一佛二佛千萬佛 各各眼橫兼鼻直 昔年 親種善根來 今日 依前得渠力 須菩提須菩提 着衣喫飯 尋常事 何須特地却生疑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천만 부처님이 각각 눈은 횡으로 되어 있고 코는 수직으로 되어 있다. 옛적부터 친히 선근을 심어왔으니 오늘날 앞을 의지해서 그런 힘을
민중들에 의해 신통력 갖춘 도인으로 찬양-윤색한중일에 지대한 영향…日 원효 생애 다룬 저술도무덤에서의 하룻밤은 훗날 원효 스님을 동아시아 불교사의 위대한 성사(聖師)로 만들었다.(『화엄연기회권』中) 원효의 대중교화는 그의 학문적 성과나 사상적 깊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황량하고 거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의 묵정밭을 일구고 가꾸는 일이란 보살행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원효가 만난 사람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밭가는 노인과 산골의 몽매한 사람, 그리고 광대, 백정, 술장사 등 시중사람들과도 어울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리의 아이들이나 부인들까지도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잠자는 영
‘사람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서 그대로 머물기 어려우며 몸은 부싯돌의 불과 같거늘 어찌 장구(長久)할 수 있겠는가’ 단청빛 어여쁜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 미타사가 있는 내남면 망성리를 향해 나아갔다. 물어물어 마침내 찾아낸 이정표. 허름한 팻말이 일러주는 대로 짙은 먹구름 사이로 연두 햇볕 일렁이는 소롯길을 따라 올랐다. 드디어 미타사다. 빽빽한 대나무 숲이 휘감고 있는 이 절은 마치 둥지에 살포시 안겨있는 새알 같은 형세다. 한갓진 이곳에 염불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것은 미타사 조실 법장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출가 후 줄곧 염불에만 전념해 온 수행자로 미타만일회를 결성해 21년째 이끌고 있기도 하다. 스님의 일과는 수행으로 시작해서 수행으로 끝난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밤
요석과 사랑은 파계 아닌 의도된 몸짓‘생이지지’는 잘못…평생 정진한 수행자경주 분황사에 모셔져 있는 원효대사 진영.원효는 44세이던 문무왕 원년(661년)에 다시 도당유학의 길을 나섰습니다. 물론 이 때도 의상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남양만이 멀지 않은 직산의 어느 옛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원효의 오도(悟道)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원효와 의상은 중도에 심한 폭우를 만나 길 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해골이 있는 옛무덤이었다. 궂은비는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또 연도의 벽 중에 머물렀는데,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봉화 각화사 금봉암 중창 마무리 30평 규모, 11월 중 낙성식 봉행 중창불사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각화사 금봉암(동암) 전경. 참선수행 도량 봉화 각화사(주지 노현 스님) 동쪽 암자인 금봉암의 중창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봉암은 현재 9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낙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각화사 동암으로 더욱 유명한 금봉암은 1867년(고종 16년) 중수된 이후 수차례에 걸친 보수를 통해 유지돼 왔다. 하지만 12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는 더 이상 보수만으로는 버티기 힘겨운 상태에 이르렀고 건물뿐 아니라 지반이 침하되는 등 전면적인 중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금봉암 중창은 지난해 1월 각화사 주지로 노현 스님이 부임하면서부터다. 3
6.25한국전쟁 후 운허 스님은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 주지 발령을 받아 봉선사로 돌아왔다. 봉선사를 떠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봉선사는 옛날의 그 봉선사가 아니었다. 6.25한국전쟁 통에 대웅전은 불타버렸고 절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들 먹이려고 양식 탁발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운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했던 광동중학교 역시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학교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임시 가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살림이 어려워 교사들 월급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 교사들이 끼니를 굶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봉선사의 살림형편도 말씀이 아니었으니 절에서 도와 줄 수도 없었다. 운허 스님은 드디어 비장한 각오로 양식 탁발에 나섰
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마음에서 애욕을 떠남이 사문이라 이름 함이요,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음이 출가라 이른다. 수행인이 몸에 비단을 두름은 마치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것과 같고, 수도인이 그리움을 품는 것은 마치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격이다. 송담의 승학도(僧鶴圖)사문이라 함은 모든 선법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법을 쉰다 (勤修善法 息諸惡法)는 뜻으로, 수행자도 역시 마음을 잘 조절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사십이장경』에는 “애욕에 빠진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경우 반드시 손을 데이는 것 같아서 꼭 재앙을 겪는다”하여 애욕의 위험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수행인의 의복에 대한 말씀도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는 누에가 친 ‘비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당하면 누구나 슬퍼하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치유를 향한 첫걸음은 바로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죽음에 임해 슬픔을 표출하는 것은 임박한 죽음을 인정하겠다는 뜻도 어느 정도는 담겨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첫 번째 반응 절망 혹은 두려움, 두 번째 반응 부정, 세 번째 반응 분노, 네 번째 반응 타협 혹은 삶의 마무리에 이어, 다섯 번째로 보여주는 반응이 바로 슬픔 혹은 우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바람이 불면 부는 방향에 따라 납작 엎드렸다가 곧바로 일어서 자세를 바로 잡는 잡초처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감정적 흔들림을 서서히 추스르고 이제 임박한 죽음을 차분히 직시해 수용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 원효대사를 곧 영화로 만날 수 있게 됐다. 3월 중순부터 크랭크인 되는 ‘원효대사’는, 불자로 널리 알려진 조재현 배우가 원효 대사 역을 맡았고 요석공주 역에 손예진 배우가 캐스팅 됐다. 연기파 배우로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조재현 불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친척, 가족들까지 모두 서울 정릉 홍법사의 신도로 불심 또한 깊은 배우이다. 조재현 불자는 “스님의 역을 충실하게 소화하기 위해 불교기초교리부터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불교공부를 하고 있다며 요즘에는 원효 스님을 다룬 책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요석공주 역을 맡은 손예진 배우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불교도 좋아한다”며 “연기파 배우 조재현 씨와 함께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을 만큼의 대작을 만들어 보겠다”고 당찬 포
본지가 전국의 불교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설문조사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불교학자들의 현실이다.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일이기는 하지만 설문결과 교수를 제외한 불교학자 대다수가 ‘신분의 불안정’과 ‘경제적 빈곤’을 겪고 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났다. 사실 불교학자들이 꾸준히 배출되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박봉이라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교계 연구기관이 불과 10여 곳에 불과하고 종립대학 강사직도 몇 해 하다보면 후배들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다. 여기에 여름이나 겨울이면 대학들이 방학을 해 그나마 생활비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푸념이다. 이 때문에 비싼 등록금과 젊음을 바쳐가며 공부했건만 정작 할 일 없음에 ‘내가 왜 불교를 선택했을까’
새롭게 중창될 의령 수도사 조감도 경남 의령에 위치한 신라고찰 수도사가 한국과 티벳 불교를 접목시킨 불사를 추진한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경남 의령 신덕산 수도사(주지 영경 스님)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창하고 승병들을 주둔시켰던 호국불교의 산 도량이다. 의령을 대표하는 고찰로 경내 9기의 부도탑이 남아 있는 수도사는 사찰의 역사를 되살리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조화를 이룬 정진 도량으로 변모할 예정이다. 수도사는 먼저 대웅전을 비롯한 관음전, 지장전, 천왕문 등 기존 전각을 중창한다. 이와 함께 네팔 보드나트 사원의 탑을 모델로 한 진신사리 봉안탑을 조성할 계획이다. 네팔에서 10년 간 ‘람림’과 ‘송카파’ 수행을 통해 한국과 티벳의 수행법 접목에 진력해 온 수도사
『말씀, 부처가 보이신 길』청화 스님 법문 / 이른아침 벌써 1년이다. 우리시대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올곧게 실천하며 그 모습 그대로 후학들의 사표가 되어주셨던 청화 스님이 지난해 11월 12일 우리 곁을 떠나 적정에 드셨다. 스님은 일생에 걸쳐 수행하시며 깨우치신 경지를 가장 쉽고 합리적인 언어로 대중에게 전달하였으며 동시에 그 가르침과 삶이 추호도 다르지 않았기에 아직도 많은 불자들이 스님을 그리워하며 그 말씀에 목말라 하고 있다. 이 책은 스님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염불선을 강조하신 법문만을 별도로 모아 담고있다. 스님의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만 남아 그리움이 되었지만 넘기는 책장에선 스님의 생생한 목소리가 아직도 사자후를 내뿜고 있다. 스님이 일생 수행하신 염불선은 속세에서 삶을 영위
남산 정일 선사 행장 南山 正日 禪師 行狀 남산 정일 큰스님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고정록 씨, 모친은 정간난 씨이다. 여덟 살 되시던 해,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의 눈망울을 보고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렵던 집안일을 돌보며 지내시다가 어느 날 고서점에서 선서(禪書) 선가귀감을 발견하셨다. 스님께서 수십 년 동안 후학들에게 수행의 거울삼아 읽을 것을 강조하셨던 선가귀감을 당시의 스님은 뜻도 모르면서 수십 번을 되풀이해 읽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조계사로 출가하여 1958년 금오 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이시고 당호는 남산(南山)이시다. 스님께서는 은사 스
건교부 화북댐 추진…97년 군위댐 악몽 재연 일연 스님이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인각사지(사적 제374호)가 다시 수몰 위기에 처한 것으로 밝혀졌다. 본지가 입수한 〈낙동강 수계 댐 입지 타당성 검토 보고서〉(건설교통부, 1999.12)에 따르면 건교부는 낙동강 수계에 생·공업용수와 수질개선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화북댐을 비롯한 6개 댐을 개발 우선 1순위의 신규 다목적댐으로 선정했다. 총 저수용량 4790만 톤 규모의 화북댐이 완공되면 인각사지의 수몰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 보고서 ‘낙동강 권역 수자원 개발 가능지점 평가’ 도표의 ‘화북댐 수몰지 현황 및 기타’ 항목에는 ‘인각사 및 908번 지방도 수몰'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 보고서의 ‘댐별 용수 공급계획’ 도표와 ‘낙동강 권역
서울시의회 불자의원회는 3월 25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창립법회를 봉행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을 비롯해 이성구 서울시의회 의장, 정두언 정무부지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창립법회에서는 초대회장에 신영선 의원을 선출했으며, 지도법사에 봉선사 주지 일면 스님을 추대했다. 신영선 회장은 '우리 모임은 불교계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이재형 기자 대구 공무원 불자, 지하철 참사 추모 대구시청 유마회 등 대구 지역 공무원 불자 모임은 3월 22일 동화사 통일대불전에서 100여 사부대중이 동참한 가운데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추모 법회'를 거행했다. 이날 추모 법회는 김중양 중앙특별지원단장의 인사말에 이어 동화사 주지 지성 스님
바다 저편 북한이 17km 코앞에 보이는 데다 직선거리로 따져보면 서울보다 중국이 더 가까운, 대한민국 최북단 백령도의 유일한 절 흑룡사는 해병대 군법당이다. 그리고 주민 대다수가 타종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처님의 명맥을 이어 부임한 군법사들은 군불자 위문과 교육뿐 아니라 주민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꾸준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민간불자들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인 군법당 흑룡사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놀이터가 있는 법당 우리나라의 최북단 사찰인 백령도의 흑룡사는 점심시간 즈음에서부터 몰려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해질 때까지 시끌벅적하다. 절 안에 설치돼 있는 어린이 놀이터 때문이다. 아이들이 ‘방방이’이라고 부르는 덤블링 기구에는 하교시간이 지나면 어린아이들이 어김없이 몰려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터널 공사를 막는 것은 수행보다 더 중요합니다”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를 막기 위해 동안거 결제를 포기한 양산 내원사 지율 스님은 “천성산은 원효대사의 유적이 남아 있고 주위 사찰에서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는 곳”이라며 “이 곳에 관통터널이 뚫리면 유적지와 수행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님은 천성산과 관련한 생태, 지질 등을 경남지역 환경단체들과 함께 조사하여 천성산 살리기 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펼치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전각의 명인으로 익히 알려진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 87) 옹은 한 때 수행의 길을 걷던 스님이었다. 1938년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옹은 우연히 그곳 범어사에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을 만났다. 스님의 인품에 매료된 옹은 이후 서울과 범어사를 오가며 스님을 자주 친견했고 한동안 성북동 심우장에서 머물며 만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3.1절을 얼마 앞둔 2월 22일 일산 자택에서 안광석 옹을 만나 만해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옹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만해 스님과 관련된 일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만해의 말투와 몸 동작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옹이 가장 먼저 꺼낸 얘기는 만해 스님과 함께 부산 기장에서 척판암에 오를 때의 일이
영화는 그 시대정서의 기준이 되는 바로미터다. 해방 이후 50년대부터 제작된 불교 영화에도 시대적 흐름이 나타난다. 60년대와 70년대의 불교영화들은 '석가모니', '서산대사' , '원효대사' 등 특정 인물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제목도 주인공 인물로만 이뤄지는 단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70년대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서산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자체보다는 호국사상 고취를 위한 도구처럼 역할했다. 81년에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만다라'는 교리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불교영화가 예술로 승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로 평가받는다. 만다라 이후 88년 제작된 배용균 감독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도 불교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같다. 90년대 들어서면서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