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뵈’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대설산 뒤에 숨어있던 ‘눈의 고향-강쩬’ 티베트는 지리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수용하여 독특하고 찬란한 문화를 가꾸어 왔다. 나아가 몽골족이 중원에 세운 원(元)나라를 통해 수천수만리 떨어진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한 세기란 짧지 않은 기간, 이른바 ‘몽골풍’ 또는 ‘호풍(胡風)’이란 이름으로 불어왔던 ‘티베트바람’은 혈통적 친근감으로 인해 이미 오래전에 ‘우리 것’으로 토착화되어 현재로서는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현재 우리 불교와 민속 안
육류(肉類)는 인간의 미각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는 육식보다는 채식을 권장한다. 채식의 실천여부에 따라 수행의 청정도를 평가할 만큼 육류를 삼가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자비정신 때문이다.그런데 필자가 막상 채식을 실천하려다 보니 채식에 대한 저항이 불교인들 사이에서도 만만하지 않았다. 부처님도 고기를 먹었다느니, 식물도 생명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먹냐느니, 건강을 위해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느니, 고기를 안 먹으면 남들을 불편하게 한다느니 등등 이었다.그런 과정을 거치며 육식에 대한 논란은 불자
한국에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이념적인 대립과 갈등을 어떻게 통합하느냐이다. 낮아진 국민의 윤리의식을 회복시켜 그것을 통일국가 건설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큰 과제로 남아있다. 그 해결의 실마리와 교훈은 인도고대사를 빛낸 임금인 아소카왕의 치국책에서 찾을 수 있다.기원전 3세기 인도 전지역을 통일하고 고대 인도의 제국이념을 실현한 아소카왕의 정치이념은 ‘다르마(法)’였다. 보편적 이념이었던 다르마는 중앙집권체제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다르마는 다중적인 사회구조에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일종의 ‘온정주의’적
15년 전 어느 해, 남원 실상사에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사회활동 하는 어느 스님이 ‘깨달음’은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발언했다. 참석한 스님들의 강한 반론이 이어지면서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우리 불교의 현주소를 이야기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그렇다면 이천년이 넘는 오늘까지 불교가 전해져 오지 않았을 것이다.부처님은 자신을 대의왕이라 칭하고 계시다. 그러면 과연 어떤 병을 치유하는 것일까?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번뇌라고 분명히 설하고 있다.우리는 탐진치가 자기 마음에 있는 병이므로, 가정이나 사회
그레고리 양력으로는 이미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푸른 말의 설날은 다가오지 않았다. 서양에는 없지만, 음력문화권에는 12동물의 ‘띠’로 한 해를 표시하는 뿌리 깊은 관습이 있어서, 심지어는 마치 인간이 자기가 태어난 해에 해당되는 동물처럼 살게 된다는 숙명론에서 빠져 살기도 한다.그런데 왜 하필 12년인가? 대답은 목성(木星)의 공전주기 때문이란다.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크고 인력이 강하다. 그렇기에 지구별에도 영향을 끼치기에 예부터 목성을 세성(歲星)이라고 불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올해의 목성의 위치는 지구별을 중심으로
나는 요즈음 대형서점에 잘 들르지 않는다. 생업이 바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갈수록 초라해지는 불교서적 판매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불교 서적을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들이 불교를 멀리한다는 하나의 반증이다.그에 대한 원인을 한두 가지로 쉽게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 중 하나는 불교의 난해성 때문이다. 본래 부처님은 중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시대를 거치고 한문으로 역경된 중국불교가 이 땅에 전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의 불교는 어려울 수밖
‘국민학교’ 때였던 것 같다. 저녁을 준비하던 어머니께서 쌀을 씻다 흘려나간 쌀을 한 톨 한 톨 줍고 계신 걸 본 기억이 있다. 아까워서였을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실 쌀 몇 톨이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될 거고, 밥으로 치면 얼마나 될 것인가. 더구나 느긋한 성격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어머니가 한 톨 한 톨 줍는 모습은, 어린 눈에도 그저 ‘아깝다’는 말만으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동반하고 있었다. 소중함,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소중함’이란 감응을 강하게 주는 행동이었다. 쌀 알 하나를 주울 때마다 어머니는 소중함을 줍고 계셨던 것이다. 아주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일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해야 했던 고된 노동을 거
노벨 평화상 수상자 남아공 만델라 전 대통령이 타계하였다. 그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무려 27년간이나 반국가사범으로 감옥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모진 박해를 당한 그였지만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서 분노와 폭력으로는 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며 가해 세력을 보복하는 대신 사면하고 중용하는 대승정신을 실천하였다. 국정원 대선 트위터 글이 2200만 건이 넘는다는 데 검찰은 수사 인력의 한계로 120만 건만 기소했다고 한다. 검찰의 특별 수사를 방해하고 검찰 수장과 특별수사팀장을 경질하는 등 진상을 은폐하려는 권력의 소행이 드러났다. 이에 범종교계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집권층은 이를 종북 세력으로 색깔 몰이한다. 민주주의 횃불을 들고 빨갱이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온 지 불과 20년
이달에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1993년과 96년에 이어 세 번째입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는 길이라 여간 신경이 쓰인 게 아닙니다. 이른 아침 남편이 나온 분도 있고 아들이 나온 분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으면서 잘 모시고 돌아오겠다고 눈빛으로 나눈 약속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떠난 먼 길은 버스에서 비행기로 다시 버스로 이어져서 델리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인도는 오래전에 낯익은 기억을 온통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가슴 아픈 기억과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가운데 수행에 관심이 많아 일이 없을 때면 달라이라마 스님을 찾아 떠나는 인도가이드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려운 조국에 대한 애정과 좌절에 초연해져버린 젊고 똑똑한 청년이었습니다. 인도
불교경전을 읽다보면 수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안으로도 부끄러움을 알고, 밖으로도 부끄러움을 알며…”라는 두 가지 표현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정형구로 곧잘 등장한다. “안으로도 부끄러움을 알고”란 참(慚, hiri), “밖으로도 부끄러움을 알며”란 괴(愧, ottappa)라는 역어를 풀어 표현한 것이다. 이 둘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참이 악행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면, 괴는 악행에 대한 두려움 내지 불안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은 악행을 혐오하는 것이 특징으로, 자신이 악행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너무 부끄럽고 양심에 걸려서 악행을 피하는 것이다. 한편, 괴는 수치심이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
품격이란 언행, 사고방식 등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성격을, 그 성격의 높고 낮은 정도를 뜻한다. 품격이나 품위가 있다함은 그 지위에 걸맞는 어떤 언행이나 태도, 사고방식 등을 한다는 말일 게다. 그러나 단지 그게 다는 아니다. 가령 상인이란 지위에 걸맞는 태도란 계산하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지만, 이런 상인을 두고 품격이 있다거나 품위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배고픈 이가 그에 걸맞게 걸신들린 듯 행동하는 것 또한 그렇다. 품위가 있다함은 오히려 상인인데도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계산 없이 어떤 선행을 하는 경우에, 배가 고파도 껄떡대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행동할 때 사용한다. 그걸 보면, 품격이란 자신이 처한 지위나 조건을 넘어서 어떤 독자적인 가치를, 혹은 좀더 ‘고상하다’고 보이는 어떤 가치
초강력 태풍이 필리핀을 강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이재민들은 물질적 신체적 생존의 고통에 더하여 정신적 고통 또한 막중하다. 물질적 고통은 국제적인 구호의 손길로 점점 가실 것이고 재해 현장도 서서히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상실과 이별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는 깊숙이 흉터로 남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기에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 태풍보다 더 큰 고통을 우리 청소년들이 겪고 있다고 하면 의아해 할 것이다. 연전에 교육과학기술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40%가 한번쯤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고 9%가 일생에 한 번 이상의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중·고등학생들은 자살을 생각한 이
전라남도 장성에 하루 종일 논밭에서 놀고 학교에서 말썽만 부리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의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할머니 절에서 자라게 된 아이는 늦게서야 중,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평범한 대학(동국대)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버드 대학을 갈 거예요.” 모두 황당해 했습니다. 미국이 어디인지도, 하버드라는 대학이 있는지 가본적도 없는 학생이 세계 최고의 대학을 가겠다고 합니다. 누구도 호응하지 않을 때에 그는 조용히 준비했습니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온 군인이 스님들 기숙사에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2학년으로 복학한 그 스님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년간
앞으로 새로운 4년을 열어 갈 조계종 제34대 총무원 집행부가 포교전법·종무행정·사회문화 분야별 세부 종책을 발표했다. 지난 4년 간 갖가지 승풍 실추 사건과 관련 의혹으로 잠잠할 날이 없었던 만큼 ‘청정 수행환경 조성’ 및 ‘자성과 쇄신 지속 추진’이라는 목표 하에 제시된 다양한 세부 실천 항목이 눈길을 끈다. 변화가 기대되는 바이다. 그런데 이런 종책 실현에 앞서 집행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모든 분야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조계종도의 행동을 규제하는 실질적인 법체계이자 종단을 지탱하는 근간인 종헌·종법에는 조계종의 정체성이 명시되어야 하며, 모든 조항은 조계종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 종헌·종법은 이
후쿠시마, 어떻게 보아도 지금 그곳은 저주받은 땅이다. 2만4000년을 지속될 방사능의 저주. 그런데 이 저주받은 땅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재난 이후 후쿠시마에 다시 들어가서 살고 있다. 거기서 오염된 대지에 다시 씨를 뿌리고 그것을 거두며 살고 있다. 다른 곳에 가서 살 수 있는 적지 않은 보상금을 준다고 하건만, 그것을 포기하고 무너진 집을 고쳐 다시 그곳에서 산다. 왜 그들은 그 저주받은 땅을 떠나지 않고 거기 살고 있을까? 대개 50~60세일 농민들이 도시에 가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국 이들이 도시에 가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이란 건 아파트 경비원이나 건물의 청소부 등과 같은 흔히 말하는 ‘잡일’ 말고는 없다. 실제로 후쿠시마를 떠나 이
얼마 전 미국에서 티베트 승려 7인이 대론을 선보여 화제가 된 바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문자적 이해와 자구 암송을 바탕으로 현실과 접목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수준에 도달하여야 대론이 가능하다. 대론은 티베트 불교를 세계화시킨 주요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몇 해 전 아테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두 가지 점이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하나는 파르테논 신전 등이 뼈대만 앙상하게 방치되고 있었다. 터키와 달리 그리스는 고대 유적을 복원하는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서구 문명의 진원지로 관광 수입이 큰 도움이 될 텐데 국가 경제가 어려운데도 왜 그럴까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또 하나는 근무시간이 6시간이라는 점이었다. 관공서 금융기관 심지어 학교까지 오후 4시면 문을 닫았다. 이것은 외형상 놀라움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쁨도 주지만 실망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때론 슬픕니다. 밤사이 잠을 설쳤습니다. 어제 총무원장 선거의 결과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먹은 것이 녹지 않고 속에 있는 것처럼 가슴에 걸린 것처럼 속도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선거에 전혀 개입하지도 개입할 자격도 가지지 못했던 한낱 지방의 승려이면서도 왜 그럴까? 잠을 설칠만한 자격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절에 삼십년을 넘도록 살아도 우리 종단의 대표를 선출할 한 장의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종단의 대표는 투표 전날까지도 상대 후보의 몇 십 년 전 청년 시절의 일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당당히 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향후 4년을 이끌어 갈 새로운 총무원장 선출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1994년 개혁종단 출범 이후 현 총무원장의 재임 시도라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이번 선거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은 뜨겁다. 특히 선출 방법의 문제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한때 15인으로 구성된 추대위원회에서 선출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무산되고, 결국 종전대로 중앙종회의원 81명과 조계종 24개 교구본사에서 교구종회를 통해 선출된 240명, 도합 321명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인단 구성에 대한 사부대중의 불신감은 높으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실제로 동화사, 마곡사, 그리고 법주사 등의 선거인단 선출 과정이 문제시되며 또다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추대위원회도
살아 있는 우리와 달리 귀신들은 멈춘 시간 속에 존재한다. 대개 잊을 수 없는 어떤 상처 때문에 죽어서도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떠도는 귀신들은, 어떤 연유로 어떻게 죽었든 모두 죽었을 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이 죽은 시간에 멈추어 있다. 그런데 종종 멈춘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귀신을 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얼마 전에 ‘내란음모’ 혐의로 검거되면서 문제가 되었던 ‘이석기 사건’을 보면서, 미안하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현재의 상황을 전쟁상태라고 규정하면서, 총기를 준비하여 싸울 준비를 하자면서 몇몇 장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를 보면서, 짧게 잡아도 20여년 전의 시간에 그들의 시계는 멈추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정치 지도자들이 온갖 폭언과 망언으로 정쟁을 일삼고 있어 국민 정서가 심각하게 상처를 받고 있다. 음해는 물론 폭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기는 종교계도 다르지 않다. 오늘의 한국 불교계에 떠도는 일부 출가자들의 추문과 정략적 행보는 불교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있고 불교에 애정이 있던 사람들까지 불교를 떠나게 하고 있다. 부처님은 왜 온갖 세속의 향락과 권력과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전륜성왕의 길을 마다하고 구도의 길을 가셨을까? 부왕의 간곡한 만류와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마저 떠나신 부처님은 말년에 데바닷타의 후계 요구도 거절하셨는데 그 뜻은 무엇일까 깊이 되새겨볼 때이다. 대학 2학년 여름 방학에 최초로 접한 불서는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이었다. 서산 휴정 (1520~1604)은 성균관 유학생이던 18세에 불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