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창시절 첫 발걸음 그 인연 그대로 ‘화엄학’공부 남도의 벌판을 싸 안고 끝이 안보이게 크게 서 있는 지리산은 그 큰 품만큼 등성이마다 골짜기마다 명찰을 품고 있다. 삼도에 걸친 넓은 품을 한 바퀴 돌며 순례하노라면 그 중에서도 장엄한 산의 기세에 어울리는 큰절 화엄사가 가슴을 꽉 채워 온다. 화엄사 전경. 고등학교 졸업반인 72년 어느 여름날. 친구들 몇이서 대학입시의 짓눌림에 매이지 말자고 다짐하고 한 달에 한번쯤은 바람도 쐬고 머리도 식히기로 했었다. 그 중에 기억 남는 한 가지가 제헌절 연휴를 맞아 도반 둘과 함께 지리산 노고단 산행에 나선 길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지리산록은 힘이 넘치는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우렁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을 벗
갖가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아직 불타는 집에 머물러 있나 작년 봄 어느 신도분이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선물을 주고 가셨다. 작은 선물이라 하니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감사해하며 받았는데 막상 선물을 뜯어보니 비싼 고급 디지털 카메라였다. 약 두 달 전부터 ‘디지털 카메라가 하나 있으면 여러 군데 유용하게 쓸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카메라를 주고 가신 것이다. 또 신기한 것은 예전에 전자 상가를 둘러보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사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바로 그 제품을 골라서 선물해주신 것이다. 간만에 받은 선물에 신이 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침 저녁으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곳 저곳 사진을 찍어 보았다. 굳이 사진으로 찍
분별을 버리고 평상심으로 살면 그 자리에 참된 평화가 찾아든다 보통 상담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시는 분들을 뵈면 거의가 ‘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만큼은 이뤄야 한다’는 틀을 만들어 놓고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데 대한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틀을 만들고 목적을 정해 놓으니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괴로운 것은 당연한 일. 욕심과 집착이라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삶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무겁고 괴로워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만큼은 살아야 한다’하는 그 바램을 놓아버리면 지금 이 자리에서 특별한 일이 없어도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는 ‘불법은 애써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상심을 유지하여 특별한 일이 없게 함이니, 추우면 옷
마루끝 돌아들면 나타나는 암자 ‘제망매가’ 월명스님도 머물렀겠지 아니! 쌍-도화살도 있다고 하니 이른바 쌍-역마살도 있다면, 깊이 끼였다할 수 있겠는지라 어디 한 두 곳이겠냐마라는, 그도- 참꽃 피는 아름다운 절은 어디메며, 솔바람 개울물 소리 시원한 절은 어디라, 눈(꽃) 어리는 절은 어디고로 철따라 드는 절까지 있을지니, 가을날에 맘자리 한 절 하나이 아뢴다면- 10리나 펼쳐진 (벽제공동)뫼ㅅ자락기슭 지나 오른 됫박고개 너머 피밭골짜구니 안에 자리한 보광(普光)절 뒤 고령(古靈)뫼(622m)의 어깨목에 고즈너기 숨어있는 도솔암이 바로 그. 도솔암 추억. 그렇다고 내사, 그 하늘나라(도솔천) 아름다운 곳의 원왕생 원왕생 도솔왕생(∼上生, 安養)을 바라는 건 꿈에도 아니오이.
당신이 업신여긴 외국인이 바로 내 도반이요 형제입니다 한밤중에 깨어나 보니 새벽 2시35분이다. 꿈을 꾸었는데 작년 겨울 한국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 어느 방글라데시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19살에 한국에 들어와 인생의 황금기인 20대를 한국에서 다 보냈다는 그는 이주 노동자 강제 추방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단속 대상자로 걸려서 잡혀가고 있었다. 왜 그런지 한동안 그 모습이 좀처럼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끌려가면서 그는 외국어 억양이 섞인 한국말로 크게 외쳤다. “저도 사람입니다. 나에게도 권리 있어요! 나에게도 권리 있어요!” 한국인보다 조금 더 까무잡잡한 피부색, 유창한 한국말이지만 그 속에 섞인 외국인 특유의 억양, 더 낳은 삶을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이방인의 나라
더 좋게 하려는 마음이 앞서다보면 자칫 일로 인한 번잡함에 빠지는 법 언젠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수행모임에서 포교지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말씀들이 있어 함께 시작했던 적이 있다. 그저 소박한 책자를 만들어 인연 닿는 이들이 함께 나눌 수 있고, 작게나마 수행 인연을 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몇 편집 도반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한동안 편집을 하다 보니 욕심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될 수 있다면 글을 많이 실었으면 좋겠고, 책의 용지도 좀 더 두껍고 좋은 것으로 하면 좋겠고, 설법과 경전내용도 더 보충된다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 사진도 첫 화면만이라도 흑백이 아닌 칼라로 넣으면 좋겠고, 인쇄도 마스터 인쇄보다는 옵셋 인쇄로 하면 더 좋겠고, 더 나아가 원고만 주면 편집 대행해주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내 말이었나 남의 말이던가 “끝도 없는 정치 얘기 그만 좀 하소.” 같은 절에 있는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스님과 신도님들이 모여 최근 한국 정치에 관해 한창 열을 내면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신 스님 한 분께서 우리들을 향해 말을 툭 던지신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언제 난상토론을 벌였냐는 듯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지난 2주간 누구를 만나든지 온통 한국정치 이야기뿐이었다. 절도 예외가 아니어서 신도님 두세명만 같이 앉으면 다들 정치 이야기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 날따라 나도 신도님 틈에 끼어 여러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 말씀이 날아온 것이다. 스님의 지나가는 한 말씀이 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