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에 위치한 대찰을 방문하면 입구에서 일주문이나 천왕문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 문에는 어김없이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사천왕은 비단 사찰을 지키는 역할만을 하지 않는다. 삼보를 옹호하는 일, 더 나아가 사바세계 중생들의 선악 행위를 관찰하고 이를 욕계천의 우두머리인 제석천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불교에서는 이처럼 불법을 옹호하고 삼보를 수호하는 신들을 호법신중(護法神衆) 또는 옹호성중(擁護聖衆)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호법신중이나 옹호성중들도 알고 보면 각기 위계가 있고 성격이 있다. 기왕 호법성중과
설봉은 동산의 문하에서 전좌로 있었다. 쌀을 일고 있는데, 동산이 물었다. “모래를 일어 쌀을 골라내는가, 쌀을 일어 모래를 골라내는가.” 설봉이 말했다. “모래와 쌀을 동시에 골라냅니다.” 동산이 말했다. “그러면 대중은 뭘 먹겠는가.” 이에 설봉은 쌀을 일고 있던 동이를 엎어버렸다. 동산이 말했다. “옳기는 옳다만, 반드시 이후에 다른 사람을 친견해야만 할 것이다.” 과연 이후에 설봉은 덕산의 법을 이었다.설봉의존(雪峯義存, 822~908)은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에게 인가를 받고 그 법을 이었다. 문답에서 동산은
흔히 종교를 정의할 때, “궁극적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고, 그것을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영위되어지는 의례를 동반한 문화현상”이라고 한다. 궁극적 질문이란 삶과 죽음의 문제와 같은 질문을 말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요소가 의식적 절차인 의례이다. 오늘날 종교를 문화현상으로 정의하는 것은 문화에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에, 종교간의 문화를 서로 인정하자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그럴 때 종교간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인도 전통의 종교인 바라문교는 부처님 당시 주
‘금강경’ 제13분인 여법수지분에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설하였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까닭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는 말씀이 나온다. ‘금강경’에 보이는 36차례 즉비논리 중 8번째로서, 경제(經題)인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반야바라밀’ 자체에 대해서 즉비논리를 적용하고 있는 내용이다.반야사상 핵심구인 반야바라밀을, ‘반야심경’에서 그토록 중시한 반야바라밀을 ‘금강경’에서는 즉비하는 발상도 놀랍거니와, 즉비하였기에 반야바라밀이 된다는 귀결도 언뜻 이해하기 용이하지는 않다. 이는 제8분인
내가 유튜브를 시작한 것은 2018년 12월이다. 이유는 무너지는 불교 교육에 대한 대안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0년대와 2000년대까지가 어찌 보면 불교 교육의 전성기였다. 큰 사찰들에서 불교대학이 만들어지던 시기이며, 이때 가장 부각된 것이 강남의 능인선원이 아닌가 한다. 한때 한 기수에 3000명이 수강했다는 능인선원의 불교대학. 그러나 그 전설은 지금 빛바랜 영광이 된 지 오래다.불교대학은 2010년대가 되며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된다. 그리고 나는 2030년 안에 오프라인 불교대학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一光東照八千土 大地山河如杲日일광동조팔천토 대지산하여고일 即是如來微妙法 不須向外謾尋覓즉시여래미묘법 불수향외만심멱(한 줄기 빛이 동으로 팔천토를 비추니 / 대지산하가 해처럼 밝아지네. / 이것이 여래의 미묘한 법 / 모름지기 밖에서 찾지를 마라.)일광(一光)은 하나의 빛을 말한다. 하나는 여일(如一)하다는 뜻도 있고, 일승(一乘)의 진리라는 뜻도 있기에 이어서 나오는 광(光)은 곧 진리를 말함이다. 그러기에 일(一)은 ‘참다운 진리는 하나다’라는 뜻을 포함한다. 진리의 말씀은 하나지 둘이 되면 어긋나기 때문이다. 동조(東照)는 곧 일광
종교 성상은 항상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는 아래에 존재하고, 신은 위에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우리가 이미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지만, 누구도 감히 스스로를 부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신 스님도 계시고, 심지어는 실제로 현현한 문수보살의 뺨을 때린 스님들도 계시긴 했지만 그 충격요법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더불어 부처를 둘러싼 보살, 나한, 신장들도 모두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무
종교(religion)라는 명사(名詞)는 근대초기 불교에 덧씌워진 명칭입니다. 마치 우리 식단을 서양식단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을 스프라고 불러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찬은 우리 식단에서는 말 그대로 ‘밥과 더불어 먹는 음식’이지만 서양식단에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합니다. 에피타이저(appetizer)라 할 수도 없고 메인 디시(main dish)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사이드 디시(side dish)’라 번역하는 경우도 봅니다만 반찬의 의미와 역할
‘믿음’이라는 말이나 행위는 종교 또는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책 속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믿음’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크게 두 ‘겹[층위層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경전들 속에 등장하는 소위 ‘믿음’과 관련된 상황이나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옛사람들이 만든 과거의 ‘층[겹]’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경전에 믿음을 내는 나 자신이 당면한 지금의 ‘겹[층위]’이다.전자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작동하는 해당 종교 자체의 몫이고, 후자는 그런 종교에 어떤 입장을
한국 사회에서 각 종교, 그중에서도 대형교회와 성당들은 선거 때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996년에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강남 소망교회가 각기 국회의원 6명을 배출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6명 그리고 소망교회가 당선자 8명을 냈으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소망교회가 7명,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가 5명, 수원 중앙침례교회가 3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이때 수원시 전체 지역구 의원 4명 중 3명이 같은 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는 ‘교우
신라는 26대 진평왕(579∼632)과 27대 선덕여왕(632∼647) 때에 국왕의 권위 강화에 기여하는 왕실불교가 완성되어 가는 한편 그러한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격의 대중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실불교‧대찰불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대중불교‧가항(街巷)불교가 새로 대두된 것이었다. 불교대중화의 선구자로서 혜숙은 시골의 농촌에서, 혜공은 골목 거리에서, 그리고 대안은 시장 장터를 무대로 하여 각각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불교를 포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들은 단순한 불교의 포교사‧전도사
선생님들과 보살님들의 백신 접종이 완료되면서, 영상으로만 하던 청소년 법회를 1년 만에 대면법회로 진행했습니다. 물론 인원 제한으로 다 모이지는 못했지만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뜻밖에도 하은이가 BTS를 좋아하는 스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아끼고 아껴, 비닐 포장도 그대로인 BTS의 CD와 굿즈를 부끄러워하며 줍니다. 마음이 너무 예쁩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하은이 덕분에 BTS의 UN 총회 연설을 온 가족이 다 봤다”며 “팬심을 말릴 수 없다”고 놀립니다. 그리고 “내 평생 처음으로 UN 회의를 생방송으로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서는 ‘순교’를 매우 거룩하게 여긴다. 조선 후기 많은 교도들이 권력에 희생된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특히 더 심하여 전국의 도로 곳곳에서 ‘〇〇순교성지’라고 새긴 갈색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에 가톨릭교도뿐 아니라 동학교도와 홍경래난 관련자 등 더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던 곳까지 ‘순교 성지’로 선포하여 중앙과 지방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성역화’하고 있다. 로마교왕이 방한했을 때에 그곳을 찾게 하고는 ‘교왕이 다녀간 곳’이라는 표지판이나 표지석을 세운 뒤 로마교왕청의 힘을 내세워 ‘가톨릭의
탈시설이 쟁점이다. 장애인복지관 기관장으로서 탈시설이라는 단어가 무겁고 진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가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포함되어,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권적 삶이 보장되는 환경을 만들어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탈시설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지난 8월2일 보건복지부는 ‘거주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장애인의 온전한 자립을 뒷받침하겠습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과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안’을 발표했다. 탈시설 로드맵에는 주거결정권
가을의 초입에서 안동 봉정사를 다녀왔다. 안동 대원사 주지 도륜 스님께 보리수아래 수계법회 전계사로 청하고자 갔던 길에 들린 것이다. 조계종 장애인전법단장을 맡고 계신 스님과 점점 좋아지고 있는 사찰의 장애인 환경에 관한 이야기도 나눈 후, 대원사에서 나와 봉정사로 향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시간이 어중간해 택시를 탔다. 억센 안동 사투리를 쓰시는 운전기사는 봉정사에서 나오는 길에 버스 시간이며 만약 택시를 탈 경우 기차역까지 어느 길로 가면 거리가 빠르고 요금이 적게 나오는 것까지 자세히 설명해줬다. 봉정사에 도착해서도 직접 매표
추석 명절을 앞두고 복지관이 부산합니다. 코로나19 이전이었다면 훨씬 더 시끌벅적하게 명절 행사를 준비하고 봉사활동도 펼쳤겠지만 아직은 코로나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아 선물만 전달하고 행사도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돼 명절 분위기가 반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합동차례도 제한된 인원만 참석을 해야 하니 이래저래 명절이 실감나질 않습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상황에서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다 보니 다들 처음 해 보는 온라인 차례가 낯설어 시행 착오와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서로 위로하며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벌써 두 해 째 같은 상황이
승이 정주문수 화상에게 물었다. “만법이 일법으로 돌아가면 그 일법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문수가 말했다. “황하는 아홉 번을 돌아 흐른다.”정주문수는 운문종의 선사로서 정주(鼎州) 문수산(文殊山) 응진(應眞)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용어는 차별적인 일체만법이 순수한 평등일미의 이체(理體)로 귀입한다는 뜻이다. 평등일미의 이체란 마음[心]이기도 하고, 진여(眞如)이기도 하며, 자기[我]이기도 하고, 깨침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질문의 요체는 다만 그 하나[一]에 해당하는 평등일미는 과연 어디로 귀입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전통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종교마다 업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이해하는 내용이 다르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업에 대한 관념은 생각보다 불교의 업이 아닌 힌두교의 업 관념에 가깝다. 문학작품이나 TV 드라마, 영화 등에서 종종 업을 소재로 할 때, 힌두교의 업을 불교의 업인 양 소개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일단 힌두교의 업은 ‘운명론적 업’이다. 즉 업의 관점이 과거 전생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불교의 업은 ‘운명을 개척하는
수천 년 동안 고유한 문화를 간직해 온 우리 불가(佛家)에는 멋들어진 말들이 많다. 도량, 시방, 할방처럼 같은 한자어도 달리 발음하여 흥취를 더하지만, 표현 자체가 처음부터 색다른 것도 있다. 그 가운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것들도 많다. ‘인연이 모여 이 일이 성사되었습니다’나 ‘인연이 다했습니다’와 같은 표현에는 현대서양 분석철학의 논의를 이미 담아두고 있는 듯한 지혜가 묻어난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 절집의 일상 표현 가운데 하나가 철학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려 한다.우리 일상의 말인
종교학에서는 종교의 3대 요소로, 교조와 교리와 교단을 들고 있다. 불교를 그런 종교학의 이론에 기대어 설명하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을 따라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들, 이렇게 3대 요소가 있다. 한편, 제자들은 그 종류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출가 제자이고, 또 하나는 재가 제자이다.학문적 엄밀한 용어는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불교 종단에서는 출가 제자를 ‘승려’라 하고, 재가 제자를 ‘신도’라 한다. 각 불교종단의 종헌이나 종법에서도 ‘승려법’이니 ‘신도법’이니 하는 등등의 용례를 사용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