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사세왕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말씀 드렸다. “세존이시여, 아버지를 해친 저의 참회를 받아주소서, 저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참회합니다.” 부처님은 그를 향해 말씀하셨다. “지금이 바로 자신을 돌아보아 참회할 때이오. 때를 놓치지 말고 참회하시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허물을 가질 수 있소. 그러나 곧 스스로 그것을 고치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오. 나의 가르침은 넓고 커서 어떤 허물이라도 용서합니다. 왕은 지금 참회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아사세왕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셨다. “세상에는 죽어서 천상에 나게 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짓지 않고 선행만 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증일아함경’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신앙적 시구(詩句) 한 수가 있다. 불교 경전의 구절은 아니다. 서양의 한 시인의 시구이다. 나에게는 일종의 신앙고백과 같은 글귀로 들렸다. 신앙고백이라 하면 초월적인 분에게 의지하며 지극정성으로 무엇인가를 희구하고 발원하는 일로 시작된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거나 혹은 “나는 참회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기도를 드리고 소망을 비는 방향이 이 시인에게서는 거꾸로 되어있었다. “하나님, 당신은 제가 죽고 없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였다. 요즘 말하듯 윗사람에게 불손하게 공갈(?)하듯 발설하는 것으로 이 시의 첫 구절은 시작되었다. 오히려 미약한 죄인으로 자신을 고백하거나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 분에게 항변하듯 말한다. 그러나 기실 이 시인은 남처럼 자신의 신앙을 들어낼 줄
부처님께서 중생의 몸으로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미혹(迷惑)한 중생들에게 빛이 되기 위해서다.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욕망의 독을 이른 말이다. 불조는 욕망을 안고 사는 사바의 삶은 마치 어둠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정의하며 삶이 어둡고 거친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는 영원한 빛이다. 그래서 연등회도 무명한 사회를 밝히는 뜻이 담겨 있다. 이러한 뜻 깊은 성탄일을 앞두고 욕망의 불집에서 스스로 타 죽어가는 사건들이 있어서 안타깝다. “(삼독의 미혹은) 마치 어린애가 칼끝에 묻어 있는 달콤한 꿀을 핥아먹는 것과 같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혀에 상처를 입고 만다”는 42장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사회적으로는 통합진보당이 독사보
참 반가운 일이다. 조계종이 노동위원회 설치를 본격화했다. 자승 총무원장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약속한 게 현실화한 셈이다. 당시 자승 원장은 “노동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다. 비정규직 비율이 한국 사회처럼 높은 나라는 드물다. 이 나라처럼 정리해고가 자유로운 나라도 많지 않다. 당장 독일과 비교해볼 일이다. 독일은 직장 문을 닫으려면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생계 대책 계획서’를 제출해야 가능하다. 한국처럼 기업은 망하지만 기업인은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나라는 전형적인 후진국 문화다. 조계종이 노동위원회 법령을 만들겠다고 나선 계기가 된 쌍용자동차 해고사태로 노동자들이 곰비임비 생명을 잃고 있는 현실은 단순히 개탄만 할 일이 아니다. 전쟁을 떠올리게 할
안자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초나라의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초나라 왕은 안자가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모욕적인 망신을 주어 초나라의 위풍을 더욱 높이고 싶었다. 그는 안자의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성문 옆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통해 성 안에 들어오게 했다. 초나라 왕의 음모를 직감한 안자는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건 개구멍인데 어찌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성문으로 드나들고 개만이 개구멍으로 드나들지요. 그런데 내가 ‘개나라’에 왔단 말입니까?” 이 말에 초나라 왕은 기가 꺾여 성문을 열고 안자를 맞았다고 한다. 안자는 초나라 왕의 부당한 차별에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키는 작지만 그것을 빌미로 사람을 개 취급하려는 초나라 왕의 오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 시대의 지도 원리는 서구사상만으로는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동양사상의 진면목이 절실한 까닭을 불교에서는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구중심의 가르침이나 그 문화 현상들은 모든 것을 나누어 분열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의 가르침은 모두를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서구문화의 잠재를 쉽게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히 우려되는 것은 분열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다. 남북이 분단 된 이후 민주정부의 수립을 깨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역적 분열이 조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 망령은 군사정권이 종식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고질적 모순은 민주화의 봄을 맞는 김영삼, 김대중 두 정권이 창출될 때도 심화되어 나타났다. 비교적 정치 경륜이 높았던
불자라면 좋아하는 스님이 한두 분 있기 마련이다. 직접 알아 가깝게 모시기도 하지만 멀리서 혼자 짝사랑하는 경우도 많다. 나에게도 역시 그런 스님이 계셨다. 이미 입적했지만 일타(日陀) 스님이 바로 그렇다.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스님의 별칭을 만들었다. 지난 세기의 음악 지휘자였던 ‘부루노 왈터’의 이름을 본 따서 “왈타(曰陀)”스님이라고 붙여드린 것이다. 스님은 선수행과 지계(持戒)에 각별하였지만, 세속의 일에도 관심 있어 하셨다. 두루두루 아시는 것도 많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모두 받아드리고, 내치는 법이 없었다. 성철 스님의 엄격하고 정형화된 분위기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타 스님의 주처가 바로 성철 스님의 코앞 암자여서 더욱 대조적이었다. 외국 여행도 좋아하셨다. 지식도 풍부하고, 다
4·11총선은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자는 야권의 호소가 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한나라당에서 이름을 바꾼 새누리당이 원내 1당은 물론, 과반의석을 확보하며 승리했다. 더러는 총선 결과를 놓고 ‘이변’으로 풀이 하지만, 이변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투표 결과를 예측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한 채, 자신의 분석이 틀렸다고 해서 ‘이변’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선거 결과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성찰이 필요한 곳은 민주통합당이다. 선거 국면 초기에 민주당은 원내 과반의석 확보가 목표라고 할 정도로 객관적 조건이 좋았다. 보수언론조차 인정하듯이 청와대가 국민을 상대로 불법 사찰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산에 가서 보면 반듯한 바위에 음각된 이름들이 있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멋있는 짧은 시구라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은 그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 시의 맛을 즐기면서 모처럼의 도도한 시심에 잠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 석 자는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보아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선한 감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바위에 새겨진 이름 석 자는 차라리 한 줄기 풀잎을 보는 것만도 못하고 한 마리의 송충이를 발견하는 것만도 못하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의 이름자가 바위에 새겨진 그 자체가 식상해서 보기 싫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자기의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 싶었을까? 혹 덧없는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
불조(佛祖)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들이 우주의 도리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인생고가 따른다고 한다. 그래서 조사(祖師)들은 사바의 삶을 일러 불난 집에 비유하여 화택고해(火宅苦海)라고 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체가 그야말로 화택고해의 심각한 지경에 직면해 있다. 4·11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4년을 돌아보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CEO출신의 경영철학을 믿고 맡긴 권좌가 국가경제 부흥의 공약과는 거리가 먼 패도(道)라고나 할까? ‘건설’을 앞세운 자연파괴와 부조리로 점철된 화택은 그대로 고해다. 그토록 자신에 찬 건설 경기마저 죽고 없을 뿐 아니라 부익부빈익빈의 심화로 국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릴까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또 개인적 신앙에서도
세속의 얽힌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종교로 눈길을 돌린다. 정치적인 난국, 사회적인 파행이 생길 때마다 종교적인 해법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한다. 종교를 현실문제의 마지막 돌파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면 “화쟁적인 태도”, “상생적인 접근”, “마음 비우기”,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들린다. 어느 특정종교에서 제시한 해법이라도 그렇게만 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종교의 이념이 오히려 전쟁의 명분으로 그대로 이용되는 것을 보았다. 악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고 정의로운 선이 기필코 승리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며 전쟁을 선언한 부시 대통령은 최근의 예다. 오히려 동양전통의 용어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을 붙였으면 더 간단했을 것 같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 반대편 제거의
조계종 총무원의 현응 교육원장과 도법 화쟁위원장이 불교 개혁에 공감을 표한 뒤 어느새 석 달을 맞고 있다. 나는 종단 내부에서 그 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추진되고 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통합종단 50년을 맞아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세운다면 마땅히 ‘제법무아’를 비롯한 삼법인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교의 가장 근본적 가르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체로서 ‘진정한 나’ 또는 ‘참나’를 찾는 게 불교라는 주장이 종단 안팎에서 지배적 담론으로 소통 되어 온 게 사실이기에 그 뜻을 정확하게 짚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묵 스님을 비롯해 초기 불전 연구에 나선 스님들은 그동안 종단 안팎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참나’의 담론에 깊은 성찰을
만해 스님이 쓴 ‘고난의 칼날에 서라’는 산문에는 스님의 삶과 정신세계를 추상할 수 있는 글을 만날 수 있다. “세상 사람이 쉽고 성공할 일이면 하려하고 어렵고 성공할 가망이 적은 일이면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어떤 일을 볼 때에 쉽고 어려운 것이나, 성공하고 실패할 것을 먼저 보지 말고 그 일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백 번 옳은 말이다. 94년 종단개혁 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 구성을 위해 각 단체의 대표자가 모여 논의하는 가운데 한 대표자 스님이 말했다. “권력과 금력을 가진 서의현 총무원장과의 싸움은 계란을 들고 바위에 달려드는 격이다.” 곧 승산이 없다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나는 실망했다. 다른 스님도 아닌 대중적인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왔다 가신 뜻 무엇인가? 열반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금년은 총선과 대선이 20년 만에 함께 치러지는 해이다. 총선은 4월 초순으로 코앞에 다가와 있다. 불가에서도 얼마 전 정치인들 못지않게 부끄러운 일이 있었던 범어사 주지 선거가 다시 25일로 잡혀 있다. 그리고 전국의 본산주지 선거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세속의 총선에 뛰어든 정치인들과 불가의 주지 선거에 나선 수행자들의 진정성은 무엇일까? 권력욕에 노출된 것은 아닌지 열반절에 즈음하여 성찰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열반은 중생을 교화하시던 육신의 몸이 윤회가 없는 영원한 불성(佛性)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몸은 모든 생명으로 화한 천백억화신이 되신 것이다. 열반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니르바나(nirv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WFB)라는 국제회의가 조계종단의 주관으로 올 6월에 열릴 예정이다. 요즘 개최되는 수많은 국제회의 중 하나로서, 여수 국제박람회와 연계되어 개최될 것이란 소식이다. 아직 열리지도 않은 이 국제회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여기에 남다른 소회가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불자들이 세계불교도우의회를 생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날, 우리 불교가 밖의 국제사회와 별로 교류가 없었을 때, 그 회의는 거의 유일무이하게 외국과의 통로 구실을 했다.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청담 스님을 위시하여 몇몇 고승 분들을 모시고 고 이기영교수가 태국이며 인도를 다녀온 것을 나는 기억한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이번회의는 우리 불교의 또 다
선거철이다. 특히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겹쳐있어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예비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 소식이 쏟아진다. 새삼 말할 나위 없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칠 법을 만들고 집행할 ‘대표’들을 선출하는 일이기에 선택의 기준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문득 5년 전이 떠오른다. 지리산 화엄사로 현산 스님을 찾았을 때다. 스님과 인터뷰하던 끝자락에 세속의 이야기가 나왔다. 많은 국민이 대기업 CEO출신인 이명박 후보가 경제를 살리리라고 믿고 있어서 그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드렸다. 스님의 우려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명박 씨가 부자로 성공했으니, 자신들에게도 부자는 아니지만 뭔가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을
한 노스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 심각하게 말씀드렸다. “스님, 저는 지금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그 이유는 형제간보다도 더 가까이 지낸 친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벌써 40여 년 동안이나 우정을 나눈 사이입니다. 어려서부터 학교를 함께 다니는 것을 비롯해서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지난 해까지의 삶을 그야말로 동고동락해 왔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그의 부친이 돌아가시고 막대한 유산상속을 받은 다음부터 돌변한 것입니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노스님은 몸을 일으켜 창가에 서서 말씀하셨다. “이리로 와서 창밖을 내다보시오.” 그는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보입니까?” 그는 노스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예, 향나무가 보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정진만 하고 사는 수행자의 삶이 그립다. 더욱이 이점은 순치황제의 시에서 느끼는 출가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까닭이다. ‘산하대지 모두 얻어 내가 주인 되었어도/ 나라근심 민생걱정 일만 더욱 번거롭다./ 백년을 헤어보니 삼만육천 날들인데/ 승가절집 한가로운 반나절만 못 하구나. 그는 중국천하를 제패한 대제였음에도 통일 위업을 바둑한판 승부에 빗대고 왕위를 버렸다. 마치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을 뿐, 이 몸뚱이는 금생뿐인 일과성의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이지, 특히 시사에 관한 정치 경제 분야의 뉴스를 보면 온통 부정적인 얘기들뿐이다. 2012년은 ‘정치의 해’라고 불린다. 총선, 대선이 함께 치러지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불가에서
지역의 대표사찰이자 말사를 관장하는 본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들이 많다. 절 안의 대소사도 챙겨야 하고 지역 사정도 살펴야 하며 종단의 현안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본사주지로서 어쩌면 당연한 의무일 수 있다.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선운사가 문화와 복지, 수행과 포교의 도량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모든 대중들이 마음을 모아 달려가고 있지만, 숨을 돌리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주지 못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신년이 되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찰경영이다. 그간 선운사는 노후수행마을 조성, 불학승가대학원, 사회복지관 운영 등을 하면서 수행과 함께 지역포교를 위한 투자를 해왔다. 많은 불자들의 지지와 격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