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꾸 눈이 침침한 것이 원시가 오는 것 같다고 한다. 우리의 눈이 원시가 되는 그해가 인생의 절반을 산 날이라고 했다. 원시가 되면 단지 시야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집착에서 조금 멀어지라고 몸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식도 사람도 모든 것이 가까워지기만을 갈구한다. 무엇이든 자기 가까이 더 가까이 끌어당겨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의 본질인 양 끌어당기기만 한다. 하지만 시력에 원시 현상이 나타날 때쯤이면 이제부터 서서히 사람도 지식도 조
석가족의 한 신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카필라국은 안온하고 풍요로워 백성들이 많습니다. 제가 출입할 때마다 많은 대중이 뒤따르고, 미친 코끼리·미친 사람·미친 수레도 항상 따릅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삼보를 잊을까 두렵습니다. 죽으면 어디서 태어날지도 걱정됩니다.” 부처님이 말했다. “그대는 나쁜 곳에 태어나지도 나쁜 일도 없을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도 말라. 마치 큰 나무가 밑으로 가지를 늘어뜨려 한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진 것과 같다. 만약 그 나무의 밑동을 베면 나무는 어디로 넘어지겠는가?” “나무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가 1929년에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것은 담배 파이프를 그린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를 기입하면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그림과 사물을 혼동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을 풍자하고 있다. 파이프 그림으로 담배를 피울 수는 없지 않은가?요즘 들어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 카이스트의 명상과학연구소를 두고 과학이 불교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표출된
‘부처님 법 전합시다’ 처음 불교를 접한 날부터 들어왔던 ‘성불하세요’라는 인사말이 올해 바뀌었다. 가히 한국 불교사에 대전환점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성불을 미루고 전법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끔 얘기 나눈 적은 있지만 이렇게 공공적으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처음 조계사 법당에 들러 절을 하고 청년회에서 나누어준 불교 기초교리 책자를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단숨에 읽고 불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해 스스로 개종했고 6개월이 지나 출가하였다. 무엇이 한 젊은이의 삶의 나침판을 일순간 180도 바꾸어 놓았을까?바로 지장
부처님이 라운존자에게 물었다. “사람은 무슨 이유로 거울을 쓰는가?” 라운은 “얼굴이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그렇다. 만약 네가 장차 몸으로 업을 짓고자 할 때, 반드시 그 몸으로 지을 업을 관찰해야 한다. 이 몸으로 지을 업이 깨끗한가, 깨끗하지 않은가, 나도 위하고 남도 위한 일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내가 이 몸으로 지을 업은 깨끗할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그 일이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할 것으로 생각되거든, 마땅히 지으
석가모니께서 중도에 입각한 4성제 8정도를 설하신 곳이 인도, 파키스탄, 네팔 지역이었지만, 오늘날 그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가 거의 없고, 힌두교, 이슬람교가 주류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우리 불자들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크리스트교의 경우에도, 예수가 가르침을 편 지역이 유대였지만, 당시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유대인들 중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는 거의 없으며, 개신교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북유럽 일부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주류 종교로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다. 이
대학에 갓 입학한 어느 뜨거운 여름날 이제 막 운전을 배운 친구가 부모님 농장의 트럭을 끌고 담양에서 광주로 나왔다. 그 친구는 어디서 들었는지 덜컹거리는 트럭을 몰고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화순 도암면 운주사(雲住寺)로 나를 끌고 갔다. 절인지 폐허인지 알 수 없는 허름한 공간을 거닐다 야트막한 야산에 누워 있는 한 쌍의 와불 옆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와불의 직립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두고 쌓아 온 천 년 동안의 꿈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절이라는 선명하게 구획된 공간 밖 여기저기 박혀 있는 허물어져가는 석탑, 논밭이나 수풀에
우리는 가끔 미래가 공포스럽지 않을까 걱정한다. 앞날에 대한 걱정 근심이 전혀 없다면 정말 중생의 삶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살아가는 사바세계 사람들은 항상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무시하며 계획을 하고는 그 사이에서 괴로워한다.일찍이 세존께서는 이러한 시공간의 문제가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갈파(喝破)하시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원한 자유인 대자유인의 삶을 이루셨다.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영원한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신 여래라는 표현이고, ‘대자유인’
고대 인도,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 비유리왕은 군사를 일으켜 카필라국을 향했다. 부처님은 그 소식을 듣고, 국경 지역의 앙상한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멀리서 부처님을 본 비유리왕은 수레에서 내려 부처님께 공손히 예배했다. 왕은 부처님께 가지와 잎이 무성한 좋은 나무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 메마른 나무 밑에 앉아 계시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친족의 그늘이 그래도 바깥사람보다 낫다”고 답했다. 석가종족을 지키기 위한 부처님의 뜻을 알고 비유리왕은 카필라국 정벌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본국의 멸망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부처님은 이렇게
‘종(宗)’은 본디 천자(天子)가 산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향해 올리는 제사의식을 가리키는데, 거기에 교리의 가르침까지 확장하면 ‘종교’가 된다. 중국의 도교, 인도의 브라만교, 우리 민족의 하느님, 일본의 신도(神道), 이집트와 인디언의 태양신 등이 ‘신을 향한 숭배 의식’이라는 점에서 종교의 범주에 속한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인간이 간구하는 것은 국태민안 및 지배자의 권력과 개인의 행복 등 기복이다.그런 동아시아에 서양에서 릴리전(Religion)이 들어왔다. 릴리전은 라틴어 ‘다시’라는 뜻의 리(Re)와 ‘연결
수십 년째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경구가 있다. 진리는 유행하지 않는다. 참 억울한 말이다. 진리가 거짓의 뿌리를 단박에 잘라낼 수 있는 마법의 칼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진리는 결코 유행 따위는 하지 않는다. 유행하는 모든 것은 진리일 수 없다. 진리는 절대 유행할 수 없다. 다만 유행하는 상상의 세상을 그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진리 없는 세상에서 지지치 않고 진리를 상상하는 힘, 이것이 진리의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행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세
‘모든 것이 변화하고 우리는 괴로워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서.’‘화엄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언젠가 ‘여자의 변심은 무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변화가 무죄인 것이 어찌 여자만이겠는가.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감성이 무딘 남성들의 변화 속도가 더뎌서 마치 변화 없는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남자들도 늘 변화를 모색하며 변화하고 있다.변화가 문제가 아니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라고 벌써 2500년 전 세존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도 그 명제적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는 변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