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 6일 입적 성철·향곡 스님 등과 문경 봉암사서 결사 불국사 중흥 견인도 “차별지와 무차별지라는 말이 있지. 둘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덩어리는 하나야.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을 보고 둘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꽃과 잎을 이루는 요소는 하나거든. 평상심이 바른 도요 번뇌가 곧 보리이듯 禪과 敎를 부처의 마음(佛心)으로 律을 부처의 몸가짐(佛行)으로 해 귀결처의 일치를 찾아야 하는 것이지.” 지극히 인자하고 고귀한 人天의 스승으로, 경계가 무너진 참 수행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월산 스님이 입적하신지도 어언 8년이 지났다. 평생 이뭐꼬 화두를 놓지 않은채 걸으면서도 참구하고(行亦禪), 앉아서도 또 참구하며(坐亦禪)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던 월산 스님은 또한 납자들의 발걸음
2005년 8월 13일 입적 서구에 위파사나 전파 미국-미얀마서 대중교화 “수행해야 행복” 강조 미얀마 출신의 세계적인 위파사나 수행자 우 실라난다 스님이 8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입적했다. 스님의 세수는 78세. 미국 테라바다 불교회 고문이자 세계적인 아비담마 권위자로 추앙돼온 스님을 보내고 비단 미국이나 미얀마의 불자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불자들이 깊은 슬픔에 빠졌다. 스님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보리수선원에서 아비담마를 지도할 때까지 건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뇌종양이 발견돼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 실라난다 스님은 미국에 위파사나를 전한 1세대 상좌부 스님 중의 한 명이다. 1959년 미국 정부의 초대로 처음 미국을 방문한 이래 아시아와
55년 8월 종회의원 피선 총무원장 3회 역임 62년 동국학원 이사장 무소유 삶…본분사 강조 경산 스님은 탁월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교단 화합을 위해 헌신했던 현대불교의 큰 기둥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종단 분규로 위기를 겪던 조계종 총무원장 소임을 세 번이나 맡으면서 종단의 안정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동국학원 이사장과 종교단체 대표를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사회적으로도 불교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타고난 행정가’, ‘뛰어난 행정승’이라는 별칭이 따르기도 했다. 1917년 6월 함경북도 북청에서 태어난 스님은 일본 동경대 철학과를 졸업한 형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 인생의 문제 등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잦았다. 이처럼 자신의 일대사에
2003년 8월 6일 입적 종교간 성직자 모임 주도 갈등-반목 해소 앞장 생명-환경운동 견인 “일철 스님은 관용과 조화라는 종교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었다. 특히 스님은 수행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종교지도자로서 경영과 행정 등의 영역에서도 남다른 능력을 겸비한 ‘준비된 인재’였다. 무엇보다 스님이 이웃 종교인들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문(門)은 달라도 도반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2003년 8월 8일 광주 증심사에서 열린 일철 스님의 다비식에서 종교간 화합과 협력의 신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던 원불교 이응원 교무는 조사를 통해 도반의 입적을 이렇게 애도했다. 일철 스님은 철옹성 같은 종교간 갈등의 벽을 무너뜨리고 이 땅에 화합과 협력이라는
1928년 7월 16일 입적 만공-혜월 등과 더불어 경허가 낳은 ‘세명의 달’ 대비다라니로 확철대오 수월 스님은 근대 한국 간화선을 중흥시킨 경허 스님의 제자로 평생을 중생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눈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시대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소먹이꾼으로 일하며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공양하는 등 스님은 평생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수행자였다. 그러나 이런 스님의 삶은 텅빈 허공처럼 또 한 낮의 태양처럼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럴듯한 법상에 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느 스님처럼 이렇다할 행장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禪敎 정통한 선지식으로 추앙1932년 7월 백양사 출가조계종 제5대 종정 역임동국대 ‘대학선원’ 개원‘참사람 운동’ 전개도서옹(西翁) 스님은 백양사를 무대로 ‘참사람’ 결사를 주창하며 임제정맥을 이어온 한국현대불교의 대표적 인물이다. 서옹은 한국 선문(禪門)에서는 드물게 선교(禪敎)에 두루 정통한 선지식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자유자재로 회통한 박학다식한 선사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다.1912년 10월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난 서옹 스님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가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간디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었고 간디의 삶을 통해 불교와의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다.대학에 입학한 후 서옹은 출가를 감행했고 1932
1979년 7월 10일 입적 15세 전부터 독립운동 제헌국회의원 활동도 86년 대통령 표창 추서 효당(1904~1979) 스님은 13세에 출가, 1979년 입적할 때까지 원효 교학연구와 차선 삼매로 일관했으며 건국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당 스님하면 15살이 되기도 전인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생동안 계속된 스님의 독립운동에는 만해 스님의 동지적 신뢰가 근간을 이루었다. 1904년 경남 사천군 서표면에서 4남 3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효당 스님은 1910년 고향의 사립학교인 개진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인 교사 배척과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으며
1989년 6월7일 입적 33년 유점사서 출가 시인부락 동인 활동 불교 역경에도 앞장 고인 물밑/해금 속에/고물거리는 빨간/실낱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등 뒤의/나를 바라보는 큰 눈을 생각하다가/나는 그만/그 실낱같은 빨간 벌레가 된다. 월하 김달진 거사가 인생의 원숙기에 접어들 무렵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읊었던 「벌레」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시에서 실지렁이와 인간이 함께 중생이기에 둘이 아니며 따라서 그 둘은 동일한 우주적 법칙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는 화엄의 세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월하 김달진 거사. 그는 이처럼 평생을 시인으로서 때로는 한역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가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홍포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김달진 거사는 1907년 경남 창
2000년 6월 8일 입적 17안거 성만…수행 강조 조계종 원로의장 역임 폐사지 공림사 복원 탄성 스님은 조계종단이 풍랑을 맞아 흔들릴 때마다 묵묵히 수행자의 근본을 지키며 종단을 구해낸 버팀목과 같은 인물이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 90년대 들어 발생한 2번의 종단 사태 때마다 스님은 종단의 난제를 해결하는 구심점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탄성 스님은 1930년 10월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자란 스님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손에 이끌어 인근 사찰을 찾곤 했다. 그러던 스님은 1944년 계룡산 신원사에 들러 그 곳에서 한 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사흘 닦는 마음은 천년을 두고 보배요, 백년동안 물건을 탐낸다
1963년 6월 3일 입적 동인지 『폐허』로 등단 20년대 허무주의 이끌어 기독교서 개종…불교 심취 “출가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출가해 있었으며, 무소유의 규율에 매이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무소유에 투철했으며, 시인이면서도 시에 매이지 않았으며, 불교인이면서 불교마저도 초월하셔서, 차를 마시고 담소하시는 일상사가 곧 신통 묘용일 수 있었던 분이 바로 선생이시니…” 1963년 6월 3일 당시 국민회당(현재 서울시의회)에서 봉행된 오상순 시인의 장례식에서 시인 이원섭 씨는 이 같은 추도사를 통해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공초(空超) 오상순은 1920년대 동인지 『페허』로 등단해 ‘허무주의’라는 새로운 문학사조를 이끌며 한국 근대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참선과 방랑의 생활과
1969년 5월 26일 입적 15세 나이에 자경문 강설 평생 청빈한 삶 일관 어린이-노인 포교 주춧돌 혜옥 스님은 근대한국불교에서 금룡, 수옥 스님과 함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15세의 나이에 법상에 올라 사부대중을 향해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했는가하면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해 사라져 가던 비구니 법맥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1901년 경북 금릉군의 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 살림이 그러했듯 스님의 속가(俗家)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3세 되던 해 아버지 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자 스님의 어머니는 그를 해인사 삼선암으로 출가 시켰다. 이후 동자승으로 밀양 심상 소학교를 마친 스님은 1914
1985년 5월 19일 입적 만공 스님에 전법게 받아 덕숭총림 초대 방장 수행자 본분사 몸소 실천 혜암 스님은 경허, 만공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근대한국불교의 선맥을 계승한 선사였다. 여느 선사와 달리 특별히 기괴한 성정이나 걸림 없는 무애 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100세가 넘도록 묵묵히 참선 정진에 몰두하면서 수행자로서 본모습을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더욱이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며 한국 선종의 법맥을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한 선지식이기도 했다. 1885년 황해도 백천에서 태어난 스님은 11세 되던 해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의자 돌연 출가를 결심하고 경기도 양주 흥국사로 들어갔다. 3년 간의 행자생활을 마친 스님은 이후 보암 스님을 은사로 금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