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업장소멸이다. 선근의 증장이다. ‘기도를 하면 실제로 업장소멸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잠시 유식(唯識)의 얘기를 들어보자.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개체의 모든 생물 정보가 저장 돼 있는 8식 알라야식이 있다. 개성, 인격, 성격 등을 결정짓는 개체의 원천이다. 알라야식을 의지처로 해서 생에 대한 강한 집착, 생존의 기쁨, 죽음의 혐오, 불로불사의 소망, 자신의 영원불변을 추구하는 의식이 말나식이다. 말나식은 자신의 영원불변을 희구하면서 무상한 자신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착각한다. 기만의 주범이라 할 수 있다. 둘은 한 몸으로 개체성을 지지하는 것은 알라야식이고 지지받는 것은 말나식이다. 그런데 또 지지받는 말나식이 자신을 지지하는 알라야식을 지지하며 개체성을 지탱하고 있다. 이들 두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다. 땅거미가 지자 메뚜기가 말했다.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 다시 만나 놀자.” 하루살이가 대답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살이용 심장을 가졌다. 메뚜기가 개구리와 놀았다. 날씨가 추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얘기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 놀자.” 메뚜기가 말했다. “내년이 뭔데?” 메뚜기는 한 철만 산다. 잘 알려진 우화 같은 얘기지만 의미심장하다. 차원이 달라 서로의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명 중생들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모른다.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 있음을 모른다. 삼계육도는 모두가 자기가 좋아서, 자기 수준이 그것밖에 안돼서 그곳에 가는 것이다.등불은 자기 몸을 태운다. 강렬히 태우면 강한 빛이 나온다. 자기의 몸을 태운다는 것은 얼마
내 안에 항상 싸움이 있다. ‘진짜 나’와 ‘가짜 나’의 싸움이다. 진짜 나는 부처님의 나요, 가짜 나는 ‘번뇌의 나’ ‘악마의 나’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내 안에 있고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 항상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대체로 ‘악마의 나’에 지는 예가 다반사다. 우리가 법을 연마하고 기도 정진해야만 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부처님도 깨달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악마와 싸우셨다. 많이 싸우고 많이 지고 실패하면 할수록 능력이 커지기는 하지만 참으로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고 힘겹다. 항상 우리는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잘나가다 옆길로 빠지는 ‘나’ 변덕을 부리는 ‘나’는 항상 ‘악마의 나’, ‘물질적인 나’다. ‘악마의 나’, ‘가짜 나’는 항상 두려움과 불만의 원
발심한 사람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을 것인가의 문제가 『금강경』에 등장한다. 자신을 항복받는다는 것은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항복받지 않으면 남을 제도하기가 어렵다. 자신을 이기고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란 결국 탐욕을 이기고 이기심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기적 욕망이 모든 재앙의 불씨임을 아는 사람은 우주의 법칙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몸은 물거품이요 번뇌를 독사처럼 아는 사람은 만유가 허깨비라는 것을 안다. 이기적 자신을 항복받고 통제한다는 것은 탐욕의 악마, 독심의 악마를 항복받고 제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내면세계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이다. ‘부처님의 나’와 ‘악마의 나’가 끊임없이 싸
무지한 사람일수록 잘못된 선택을 한다. 부족한 사람일수록 고통의 늪이 깊어진다. 마음공부가 부족해 병마에 시달리고 수행이 부족해 실패하기 쉽다.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 유전공학자 자크 모노는 유전자를 연구하면서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가 유전자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듯 여겨진다. 우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혁신의 원천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탁원한 지혜 거룩한 힘, 불가사의한 힘이라 불리는 존재는 무엇일까? 부처님 신 밖에 더 있는가? 부처는 마음이요, 마음의 흐름인 생각은 기의 흐름이다. 기는 전자로 원자로 분자로 질량으로 응집된다. 기는 살기 활기 생기 등등해서 어떤 정보를 지닌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결국 기로 만들어진 질량은 수많
새해가 왔다는데 달력이 바뀌고 숫자만 바뀌면 새해인가? 내가 새로워지고 내 마음이 새로워져야 새해라 할 수 있으리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듣기 좋은 덕담이 한창이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짓지 않는 복을 어찌 받으랴.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하기가 쑥스러우니까 그저 짓지 않는 복이라도 많이 받으라고 난리다. 받으라는 대로 다 받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어떻게 하면 마음도 새로워지고 복도 많이 짓고 또 받을 수 있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열심히 살면 된다. 부처님 따라 걷는 길은 해탈의 길이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따라 걸으면 된다. 해탈의 길은 어려운 길인가? 아니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간단하다. 부처님 말씀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가보면 저절로 알
“태어남은 한조각 구름이 생겨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다.” 널리 알려진 게송이다. 구름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허공 가운데 가득한 습기가 찬 기운을 만나면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된다. 물도 찬 기운을 머금으면 얼음이 되지만 봄이 오면 따사로움으로 녹아져 내린다. 냉기는 만상을 굳게 만들고 따사로움은 만상을 풀어지게 만든다. 암세포도 마찬가지다. 냉기어린 암세포를 온열요법으로 치료한다지 않는가? 자비심으로 하나가 되면 따뜻해지고 사랑스런 마음이 가득해지지만, 갈라지면 냉기가 돌고 증오가 싹튼다. 왜 사랑의 마음 자비심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되는가? 사랑과 자비심을 깨는 것이 모든 재앙과 고통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이지만 중생들은 갈라져있기에 무명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사랑과 자비심에 이반
불교는 원(願)의 종교다.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창조하는 종교다. 원을 가진 자는 정진으로 자기를 불사른다. 결국 그는 등불이 된다. 원을 가진 자는 등불이기에 함부로 살지 않는다. 투철한 계획 따라 산다. 그는 철저한 수행으로 자신을 닦음으로써 만 중생을 제도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닦음으로써 보살이 된다. 부처가 된다. 닦지 않는 자는 업 따라 산다. 원따라 사는 보살들도 과거 전생에 업이 있으면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닦는 참된 원력보살은 끝없는 정진을 통해 스스로의 허물을 벗는다. 업장을 자꾸 벗겨야 진짜가 드러난다. 부처님 힘이 나온다. 자꾸만 자기를 벗겨보라. 전혀 다른 차원의 혁신적 인간이 된다. 정진하면 할수록 부처님 마음이 되고 자신을 벗기면 벗길수록 세상은 불국토가 된다. 참
세월의 흐름이 화살 같다더니 한 해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갔다. 얼마만한 소득이 있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올해는 경제위기다 뭐다 해서 참으로 숨 가쁘게 지나갔다. IMF에 버금간다 해서 모두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좀 나아진다는데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정부 뿐 아니라 모두가 열심히 노력들을 하니까 분명 나아지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악화가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 가히 세계는 하나라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시쳇말이 아니라 이제 그 어느 누구든 전 인류에 대한 공동체적인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세계가 좁아질수록 상호의존도가 크고 결합력이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게 분명하다는 관념이 손에 잡히듯 느껴진다. 부처님 말씀대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입에 맞는 떡은 없다. 자신의 마음에 꼭 맞는 조건은 언제 어디서건 만나기 어렵다. 조건이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사람들이 진실로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겠는가?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좋건 나쁘건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던지는 헌신 가운데 부처님께서 함께 하신다. 아무리 거칠어도 부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아무리 괴로워도 부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현실의 처절한 고통에 너무 괴로워 말라. 인생은 으레 그런 것.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가능한 한 감사의 삶을 살라.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모두가 순간이다. 모두에 감사할 때 몸과 마음의 건강이 담보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감사함을 잊고 고통을 이기지 못할 때 몸과 마음도 해치게 된다. 감사가 없는 곳
배부르고 편한 자가 도를 닦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악마는 그에게 재앙을 주어 수행을 하도록, 법을 가까이 하도록 일깨운다. 악마는 그의 적이 아니라 그의 도반이다. 욕망에 의해 타오르는 불길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 오직 법의 단비로만 그것을 끌 수 있다. 진리를 갈구하는 자, 부처님을 따르라. 부처님의 축복이 마음깊이 스며들 때 해탈은 그의 품안에 있다. 모든 인연의 사슬을 걷어내라. 혈족마저 벗어나라. 나무뿌리를 자르면 잎들이 마르듯 인연의 뿌리를 끊으면 윤회는 끝난다. 등불의 불빛이 밝혀지는 순간 아승지겁의 어둠이 사라지듯, 깨달음의 강한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 억겁무명의 베일은 걷혀지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과 감각에만 신경을 쓸 뿐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본성에 대한 자각과 복종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고프면 어떻게 하나. 또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해야만 하나. 아닌게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법식(法食). 법약(法藥), 법공양(法供養)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아프고 고프면 법을 공급받아야만 한다. 부처님께서도 “마음이 고프면 법식을 공급받아야만 하고, 독심 이기심 때문에 마음에 생긴 병은 법약으로 고쳐야만 한다”하셨다. 법 따라 선하게 살아 마음에 병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의 내세는 좋을 것이라 하셨다. 법을 공급받으면 마음에 생긴 이기심이라는 고질병은 치유가 가능하다 하셨다. 중생들의 마음병 가운데 가장 큰 병은 독심이다. 이기심이다. 사람은 독심 때문에 마음이 병들고, 법식을 공급받지 못했기에 마음이 고프다. 부처님
탁월한 인물들이 폭발적 업적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끊임없이 갈고 닦아 고차원에 살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보이는 세계이거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고차원적인 존재들의 도움을 힘입는다. 탁월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수행을 통해 자신의 좌와 업장을 열심히 이겨낸 존재들이다. 기도와 수행이 그들을 탁월한 존재로 만들었다. 닦은 만큼 보이고 갈고 닦은 만큼 빛이 난다. 수행을 통한 그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상을 변모시킨다. 『원각경』의 ‘일심정 다심정 국토정 법계정(一心淨 多心淨 國土淨 法界淨)’과 통하는 얘기다. 내 한마음이 맑아지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맑아지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맑아지면 나라가 맑아지고 법계가 청정해진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동체대비란 말을 자주 쓴다. 우리 모두는 한 몸이기에 누구나 크나큰 사랑 속에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일심동체는 또 어떤가. 한 마음으로 한 몸이 되라는 뜻이리라. 우주는 한 몸이다. 하나다. 인드라망이란 말 역시 우주가 하나로 그물처럼 연결돼 있다는 얘기다. 하나임을 모르면 단절이다. 주변과 단절된 사람의 미래는 어떨까? 진리는 만상을 하나로 만드는 위대한 힘이다. 그 힘을 깨달은 사람이 부처다. 위대한 힘의 화신인 부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를 따르는 자를 진리의 세계, 하나의 세계 열반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게 한다. 수행자는 진리를 연마하고 진리를 바르게 따르며 부처의 길을 간다. 진리를 깨달으면서 번뇌의 강을 건넌다. 번뇌를 떠난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과 하나이기에 그를 자각하는 정도에
흔히 불교에서는 우주를 바다에 비유한다. 무량무변한 허공과 맞닿아 있는 바다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이해가 된다. 수평선에서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만난다. 무한 평화다. 나무화장세계해(南無華藏世界海) 비로지나진법신이라 『화엄경』 약찬게가 노래한 것처럼 우주는 바다다. 얼마 전 한 언론 매체에는 수십 미터짜리 엄청난 고래가 물 위로 올라와 사진에 찍혀 나왔다. 사람이 흡사 자그마한 벌레같이 보였다. 언제인가 1백여 미터에 달하는 고래가 잡혔다는 보도를 본적도 있다. 도대체 바다 속에는 얼마나 거대한 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을까? 바다를 생각하다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면 또 한 번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된다. 어느 철인이 얘기했다던가. “짙푸른 창공은 한없이 나를
무명이 모든 재앙의 근본이다. 인연중생의 세계도 무명으로 시작한다. 십이인연법도 무명이 첫머리다. 온갖 번뇌 역시 무명으로부터 나온다. 무명번뇌가 모든 재앙을 부르기에 우리는 항상 무명을 걷어내는 수행에 진력해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참의 빛이 약해지고 참의 태양이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둠 가운데 갖가지 부패가 생기고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양심이 오염되어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깜깜하기에 앞길을 모르며 깜깜하기에 문제가 안 풀리는 것이다. 무명 때문에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갖가지 삶의 문제가 생기는 이유 역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다. 무명이 앞길을 가리기에 어두운 것이다. 우리가 정법을 연마하고 삼보를 받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서이다. 정법의 길을 가면 위대한 광명의 세계
왜 부처님께서는 경전마다에 법을 펼칠 것을 강조하셨는가? 『금강경』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부처님 말씀을 남을 위해 설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하셨다. 또 『법화경』에서는 법사의 공덕을 한없이 찬탄하셨다. 그뿐인가? 부처님 말씀을 전해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면 누구든 필경에는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없다하셨다. 부처님 본인도 “나는 이 땅에 법을 펼치러 왔다”하셨다. 또 『열반경』에도 “법(法)이 불(佛)이요 불(佛)이 법(法)이다”고 하시면서 법의 중요성을 지극히 강조하셨다. 이처럼 법의 중요성을 지극히 강조하신 이유를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법이 불이기에 부처님 법을 전하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일깨운다는 사실 하나
화엄에서는 허공을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라 부른다. 부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시다. 무한 풍요와 완전 원만함이 부처님의 대명사다. 허공은 무한 풍요와 무진장의 세계다. 모자람이 없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인간은 왜 이다지 부족함을 느끼고 괴로운 것일까? 업장중생이기 때문이다. 이기심 따라 지은 죄업 때문에 그러하다. 무명업장 중생들이지만 우리들도 부처님 전에 나오면 평안해진다. 왜일까? 부처님께서 법당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전당이라 하셨다. 우리의 수행은 칠흙 같은 무명의 암흑으로부터 광명의 세계를 향해 나가는 길이요, 해탈의 길, 혁명의 길이다. 업장소멸의 길 역시 부처님 전 밖에서는 찾을 길 없다. 현실 속에 열반을 구현하는 길이 부처님 전을 만나는 길이다. 모든 것은 변해가고 있고 구르고 있다. 정
어제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영상기록물로 모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쉼 없이 그 모든 장면을 찍어대는가? 또 찍혀진 장면들은 어떤 성질의 것인가? 화엄에 보면 부처님은 무한한 눈이 있으셔서 온갖 사물을 모두 꿰뚫어보신다고 하셨다. 또 무한한 귀ㆍ코ㆍ혀ㆍ몸이 계셔서 모든 만상을 낱낱이 듣고 점검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정녕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계신다. 부처님의 무한능력이 업 따라 중생의 몸을 쓰고 나타난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들의 몸과 마음 가운데 무한능력자의 숨결이 함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완전자이시고 영원하신 부처님께서는 완벽을 위해 끊임없이 모든 상황들을 입력하고 계신다. 코치나 감독들도 항상 선수들의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찍어놓고 잘못을 고쳐나가지 않는가? 안
사람들은 흔히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무엇에 속박되고 있기에 그러는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자유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유자재의 경지를 가르치셨다. 그 어느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해탈의 자유를 말씀하셨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한다면 속박의 주체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바로 ‘나’란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너무 많은 굴레 속에 산다. 우선 육신의 굴레가 있다. 보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듣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생각하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등등 한도 끝도 없는 굴레가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를 속박하는 것 모두가 굴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같은 굴레로부터의 해방감을 누리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