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대상의 학문 아닌 사유의 학문. 서양철학 공부했지만 내가 품은 의문 해결해 주지 못할 때 과감히 떠나. 불교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나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 터. 나지막한 목탁소리와 함께 노교수의 방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천수경 독경소리가 분당 운중동(雲中洞)의 미물들을 일깨운다. ‘운중사 조실 스님’의 사시 예불 시간. 수년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북재의 아침은 김형효 교수의 고요한 목탁소리와 함께 시작돼 왔다. 몇년전 벽에 청화 스님과 숭산 스님의 사진을 붙이고 미륵반가사유상을 달더니, 요즘은 아예 매일 10시면 직접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발표하는 글이나 강의 내용도 거의 법문 수준이다. 염불선 수행 3년 3년전부터 김형효 교수는 염불선 수행을 해왔
‘사람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서 그대로 머물기 어려우며 몸은 부싯돌의 불과 같거늘 어찌 장구(長久)할 수 있겠는가’ 단청빛 어여쁜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 미타사가 있는 내남면 망성리를 향해 나아갔다. 물어물어 마침내 찾아낸 이정표. 허름한 팻말이 일러주는 대로 짙은 먹구름 사이로 연두 햇볕 일렁이는 소롯길을 따라 올랐다. 드디어 미타사다. 빽빽한 대나무 숲이 휘감고 있는 이 절은 마치 둥지에 살포시 안겨있는 새알 같은 형세다. 한갓진 이곳에 염불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것은 미타사 조실 법장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출가 후 줄곧 염불에만 전념해 온 수행자로 미타만일회를 결성해 21년째 이끌고 있기도 하다. 스님의 일과는 수행으로 시작해서 수행으로 끝난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밤
불기 2549년 하안거 해제날 하루 전인 18일. 35명의 납자들을 안거기간 동안 제접한 조계총림 방장 보성 스님을 만나기 위해 송광사 대웅전을 지나 삼일암(三日庵)으로 향했다. 대웅전에서는 부처님과 역대 조사에 예를 올리는 저녁 예불이 봉행되고 있었다. 삼일암에서 20여명의 기자단을 맞이한 방장 스님은 단번에 “가방은 마루에 두고 들어오라”며 나무랐다. ‘서울에서 어렵게 올라온 기자단의 마음을 왜 굳이 무겁게 만드실까?’ 의문은 삼배를 올린 후 자리에 앉자마자 풀렸다. “숨 한 번 내 쉬고 들이 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굿바이 입니다. 숨 한 번 내쉬는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의 현재심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 예불을 올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약속 시간이 가까웠다 해도 예불은 마치고 얘기를
여름 휴가기간동안 다들 별거 없으셨는지요. 저도 요 며칠 휴가를 받아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러 호주에 와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기러기 아빠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열심히 돈 벌고 아내와 아이들은 호주에서 유학하는…. 제게는 첫째, 아들 하나와 5살 된 막내딸이 있는데 그 어린 아이들을 보내놓고 잠을 설치는 경우도 사실 많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함께 유학 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게 된 남편을 일명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계층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국내 일반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언론매체에 따르면 한 기업의 경우 미성년 자녀를 둔 직원의 10% 이상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할 정도라니 특
세달 밖에 못산다는 말에 손씨는 절망했다. 화려한 지난날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가깝던 사람들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원망과 서글픔에 그는 매일 바닷가로 향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금강경』의 말마따나 인생은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았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다. 내일 내 삶이 끝나더라도 나는 오늘 행복하리라. 삶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오늘도 눈을 뜨고 숨 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딸의 대학 입학만 보고 죽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1994년 12월, 위암 수술 후 3개월을 선고받은 손순호(51·다정혜) 씨. 고등학교 3학년의 딸을 홀로 두고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에게 이름난 성형외과 상담실장으
7월 21일 오후 3시 괴산 다보수련원. 가마솥더위에도 50여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학교와 학원으로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의 틀을 벗어나 고요한 산사에 머물며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것. 서울 불광사와 대한불교진흥원이 7월 21일부터 24일까지 실시한 ‘부모와 함께 하는 제1회 청소년 명상캠프’는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어른들의 수련회마냥 원리원칙의 사찰 생활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들 흥미에 부합해 그저 놀고 즐기는 수련회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다. 지금, 여기에 관심을 가진다.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적극 경청한다.…’ 몇 가지 규율에서 나타나듯 이번 수련회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과 그 뿌
30~40도가 넘나드는 불볕더위입니다. 가마 솥 더위에 불자님들 가정에 다들 별거 없으신지요. 불자 여러분, 건강하셔야 합니다. 제가 맡은 ‘김흥국의 연예계와 불교’는 시원한 글이 되어야 하는데 저도 더위를 먹었는지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글이 나오질 않네요. 으아~ 요즘, 한창 휴가철이죠? 많은 불자님들이 이번 여름휴가를 어디에서 어떻게 보낼까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계실 것으로 압니다. 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산이나 계곡, 강, 바다 등 외국 못지않게 멋지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외국으로 나가 외화를 펑펑 쓰기보다는 알뜰하게 국내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휴가를 가시더라도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한
염불에서 삶의 가치와 희망을 발견했다는 박 씨. 새벽부터 밤까지 염불정진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늘 '나무아미타불'로 꽉 차 있다. cafe.daum.net/yunhwasaegae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 앞에 말씀 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두고 48원이 이루어질까. -신라 광덕 스님 2004년 6월 18일, 바윗덩이처럼 단단하던 추교생(50·도안) 씨가 갑자기 시름시름 앓더니 몸져누웠다. 아내 박복순(48·혜명화) 씨는 처음 감기려니 생각했지만 열은 40도를 오르내리고 혈압은 40으로 뚝 떨어졌다. 약을 먹여도 소용없었을 뿐더러 나중에는 물 한 모금 삼키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1992년, 유서중 거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파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법우에게 받은 영인 스님의 ‘우리말 반야심경’을 무심코 틀어보았다. 순간, 승용차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반야심경구절에 그는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마치 자신의 몸이 스피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독송과 하나가 되는 듯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환희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눈물만 넘쳐흘렀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을 뿐입니다.” 기독교 구원설 이해 안돼 유 거사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성경 공부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던 그에게 주위사람들은 한결같이 신학대학에 입학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항상 의문부호가 하나
조용재(일관·44) 씨와 양은영(무량광·44) 씨는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불자 부부다. 조 씨가 운영하는 전자제어장치 개발 벤처회사인 ‘해동시스템’에서 아내인 양 씨가 일을 해서만은 아니다.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는 모든 일에 늘 같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함께 다져온 불심 덕분일까. 한 업무공간에서 새벽까지 일하다보면 다툼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높아지는 언성은 듣기 힘들다. 서로 존댓말을 쓸 뿐만 아니라 농아인 직원과 나누는 수화 대화로 오히려 말 없는 미소가 가득 피어나고는 한다. ‘화’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 이혼의 아픔을 경험했다. 게다가 운영하던 회사의 부도로 빈털터리가 된 적도 있으니…. 해이해지면 서로 질책-격려 절망의 밑바닥
얼마 전에 불자로써 정말로 감격스러운 자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어릴 때 수학 여행을 불국사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저는 평생 잊지 못할 석굴암과 다보탑을 봤습니다. 그것을 보고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경주는 참 보물이 많은 곳이구나’하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나중에 해인사에 가서 팔만대장경 목판을 구경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에 가보고 나선 ‘아 사찰에는 참으로 귀한 문화재가 많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사찰에서 혹은 스님들이 지키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호국불교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되고 더욱 불심도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인사에서 그 많은 글자를 보관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참으로 아팠습니다. 훼손
수행 프로그램 개발 지도하는 전 현 수 신경정신과 전문의 인류사상 최고의 마음치료사였던 부처님. 그 분의 가르침을 이용해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을 치료하겠다는게 전 원장의 꿈이다. 환자를 돌보면서 각종 명상프로그램을 개발·지도하고, 범어와 팔리어 스터디, 영문불서읽기, 거기에 ‘불교와 정신치료 연구회’를 꾸려 이끌고 있는 그의 초인적인 성실함이 그의 서원을 하루하루 영글게 하고 있다. 1985년 6월 결혼을 앞둔 전현수 신경정신과 원장은 신부의 대학원 스승인 고익진 교수를 찾았다. 처음 의례적인 면식으로 생각했던 그는 고 교수와 대화를 시작되면서 곧 그런 생각을 접고 말았다. 깡마른 체구에 검은 뿔테 안경, 그 너머로 한없이 맑고 깊은 눈.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불교학자라기보다 수행자로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