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부락 다리서 일경 대치시위군중 시간 갈수록 증가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3·1만세시위운동의 거사 일을 3월 30일로 정하고 동민들에게 뿌릴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 내용까지 완성한 성숙 일행이 29일 야밤에 봉선사 서기실에 있던 등사기를 짊어지고 간 곳은 산 속 약수터였다. 성숙을 비롯해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 4명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데 기여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이 약수터에서 격문 300여 장을 인쇄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다시 세웠다. 당시 봉선사 농지를 관리하며 진접면 일대에서 100여 석의 곡식을 거둬들이고 충청도에 있는 토지까지 관리하는 농감 역할을 하던 이순재는 각 동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지월 스님 등 4명 주도주민에 돌릴 격문 완성 성숙이 봉선사로 돌아와 3·1만세시위운동을 이어갈 방도를 모색하는 동안 그의 동지 김법린을 비롯하여 만해 스님의 지시를 받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밤에 전국의 지방사찰로 떠나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이어갔다. 이들의 활약에 따라 지방에서는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동래 일원의 시위는 규모 면에서도 서울의 시위에 뒤지지 않았다. 중앙학림의 학생대표 김법린과 김상헌 등은 3월 4일 범어사 내의 명정학교 학생 30여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3월 7일 동래 장날에 첫 만세운동을 펼친 데 이어, 3월 18일 범어사 일대에서 또 다시 만세운동을 벌이다 100여명
군중 속에서 대중 염원 읽고만세운동 이어갈 방법 모색 3·1독립운동을 하루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청년학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의 준비과정을 비롯해 불교계의 참여와 역할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인쇄된 독립선언서 3만 매를 각 교단에서 1만 매씩 배포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며 각각 경성과 지방에서 배포하도록 했다. 만해 스님은 또 “각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결연히 나섰으나 아무런 득도 없고 회한도 없다”며 “청년학생들도 이러한 뜻을 동포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완성에 매진하고, 특히 서산·사명의 법손임을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청년학생들은 만해 스님의 지시를 받아 각자 선언서를 갖고 서울과
억눌렸던 불교계 반일감정만해 중심의 항일운동으로 성숙이 월초 화상으로부터 만해 스님과 김법린을 소개받아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사상적 무장을 하기 시작할 무렵, 불교계에서는 이미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우리민족의 항일민족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절에 세속과 유리된 환경 속에 놓여 있던 불교계에서도 항일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면서 이미 예고됐던 일이다. 당시 일제는 일부 친일승려와 일본의 조동종 승려간 연합 형식으로 한국불교의 종속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의도는 역효과를 불러와 불교계 전반이 구국운동 차원에서 한국불교의 전통
훗날 3·1운동 참여 계기 돼손병희 선생과도 교분 나눠 철산에서 고양으로 이주한 가족들을 만나고 봉선사로 돌아온 성숙은 공부에 전념했다. 본격적으로 강원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사집, 사교, 대교과 과정에서 앞으로 배워야 할 불경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월초 화상이 조용히 성숙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화상의 방에 들어서던 성숙은 잠시 멈칫했다. 화상 혼자가 아니라 낯모르는 스님 한 분과 또 다른 객이 한 명 더 있었다. 월초 화상은 성숙이 들어서자 “인사 올리거라. 만해 스님이시다.”하고는 예를 갖추도록 했다. 성숙이 삼배의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 만해 스님이 “자네가 성숙인가. 화상께 말씀 많이 들었네.”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만해 스님의 높은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성숙은 그저
월초화상 지시로 가족 이주철산 떠나 경기 고양에 정착부인에 “미안하오” 한 마디월초화상을 만나고 용문사로 돌아온 성숙은 풍곡 스님을 찾았다. “스님, 본사로 가서 공부를 계속 하겠습니다.” 성숙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었던 풍곡 스님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제자를 떠나보내면서도 오히려 “봉선사로 가거든 큰스님을 네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하거라. 큰스님이 네게 큰 가르침을 주고 앞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하고는 봉선사로의 발길을 재촉하도록 독려했다. 성숙은 다음날로 짐을 챙겨 봉선사로 향했다. 지금은 조계종에서 스님이 되려면 반드시 강원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당시의 강원은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수익자 부담이었기 때문에 강원에서 공부하는 학인들도 배우는 만큼의 돈을 내
무지한 백성 일깨우는 것도일제를 상대하는 독립운동봉선사 강원에서 공부 지시 성숙은 본사인 봉선사로 가지 않고 용문사에서 더 공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곡 스님이 왜 자신을 봉선사로 보내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언젠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시점을 용문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봉선사로 가야만 하는 시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풍곡 스님은 봉선사로 가기를 꺼려하는 성숙을 보며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는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거라”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 후로도 용문사에서 사미승이 배워야 할 외전을 공부하던 성숙은 이듬해인 1918년 여름 봉선사 월초 화상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으로 바랑을 짊어지고 봉선사를 찾은 성숙은 월초 화상과
1917년 봉선사 창화강원에서월초 스님에게 졸업증서 받아본사행 거부…용문사서 수학 1917년 받은 사미과 졸업증서. 성숙의 스승인 풍곡 신원 스님의 인품은 도둑 떼를 참회시켜 선량한 불자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회암사 주지로 있을 때 사람들을 대하는 데서도 잘 엿볼 수 있다. 회암사는 사내 대중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땅이 논 열 다섯 마지기 정도여서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대중들이 양식을 아껴서 먹으면 겨우 1년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으나, 인심 좋은 풍곡 스님 덕분에 석달이면 양식이 동나기 일쑤였다. 풍곡 스님이 인심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기 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스님은 그럴 때마다 양식을 주거나 쌀을 팔아 용돈을 만들어 주었다. 주
말 한마디로 도적떼 제압호탕한 성격 자비심 충만 사미교육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한 성숙은 조석송주(朝夕誦呪)부터 배웠다. 조석송주를 외우는 한편으로 출가 승려가 된 사미승이 갖추어야 할 계율과 의례 등이 담긴 『사미율의』를 배워 익혔다. 그리고 600여 권으로 이루어진 반야부 경전 중 가장 짧으면서도 그 내용이 잘 압축된 경전이며 조석예불은 물론이고 모든 불교의식 때 암송하는 『반야심경』을 배웠다. 이어서 고려의 지눌대사가 지은 『계초심학인문』과 신라의 원효대사가 지은 『발심수행장』, 그리고 고려 야운 스님이 지은 『자경문』을 합쳐서 만든 『초발심자경문』을 익혔다. 처음 스님이 된 행자와 사미승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성숙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스님들에게 경계가 되는 교훈을 담
총독부령에 강원체계 흔들지방학림 봉선사 교과 근거용문사서 사미 과정 공부 성숙은 1916년 12월 3일 출가 득도식을 갖고 도첩을 받기 전까지 용문사에서 행자생활을 했다. 원산에서 풍곡신원 스님을 따라 용문사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출가승려가 지녀야 할 덕목은 물론이고, 각종의례와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절에서 볼 수 있는 경전은 모두가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행자들은 천자문부터 배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성숙은 이미 한문을 잘 알고 있었던 터여서 불경을 배우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가 직접 가르치던 글방에서 공부를 한 덕분에 한문을 배워 사서삼경을 보았고, 신식학교인 대한독립학교에서 신학문을 3년 가까이 익혔었다. 대
우여곡절 끝에 봉천행 포기신흥학교 대신 용문사 출가풍곡신원 스님 은사로 득도 1916년 12월 3일 득도식 후 받은 도첩. 독립군이 되겠다고 결연한 각오로 만 18세가 되던 1916년 봄 고향을 떠난 성숙은 신흥학교가 있는 만주 봉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안 삼촌에게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라고 들은 신흥학교는 1911년에 만들어진 무관학교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맺어진 다음해인 1907년 공화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신민회를 조직했고, 대한제국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신민회의 지도자들은 1909년 해외에서 독립군을 창설하고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결의에 따라 1911년 4월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
삼촌에게 독립군 활약 듣고독립운동 결심…1916년 봄갓 결혼한 부인 두고 집 떠나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 성숙이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있던 그 시절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정세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켜서 청조(淸朝)를 무너뜨렸고,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였다. 성숙이 살던 철산의 산간벽지에도 신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소식들을 알 수 있었고, 어느덧 열 여섯 살이 된 성숙은 주변정세를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공화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무슨 무슨 주의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나라를 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