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이 있는 오월, 일상에서 겪는 작은 미움과 짜증, 불평과 불만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 짧은 상식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결국 고통의 원인이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게 아닐까.민속적 분위기 원시적 색채상상 표현하고 욕망 드러내이지적인 화풍에 대한 반란매일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인연(因緣)들이 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이 작은 일들이 쌓이면 어떤 큰 인연이 될 것만 같아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아침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는 너무 얄미운 한 젊은 남자가 있다. 버스 앞문이 열릴
봄비가 내린다. 봄비 소리에 백곡이 잠에서 깬다. 그러고 보니 곡우(穀雨)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고 하는데, 연이은 비 소식에 올해는 풍년일 듯하다. 부정한 사람은 볼 수 없다던 볍씨는 한 해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손에 담겨져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본래 현상을 훼손하지 않고 예배 대상으로서 부처 구현향 피어오르듯 아지랑이 오르는 골목 지나 작은 건물들 앞에 이르렀다. 길 찾아 헤매는 손님 탓에 이민영 작가가 밝은 미소로 마중 나왔다. 좇아 올라간 작업실 안에 있던 여윤구 작가가 살가운 인사를 건넨다. 작업 중인
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설명하기 전과 후의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귀엽고 세련된 느낌의 그림에서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반적 미술작품 속에서 돋보이는 특징이 있는 ‘사이’의 작품이 아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애인의 특징인 ‘차이’를 보려는 듯한 경우가 더러 있다.마카펜 활용해 수를 놓듯 채색소재는 동물·자전거 타는 사람선입견·편협에 대한 반성 계기예술은 종교처럼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의 직업군을 특정하지 아니한다. 물론 보다 전문적일 수는 있다. 아름다움에 관해 보이는 것 이외의 계량적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이라 출가자 중에 작업에 몰두하는 분을 모시고자 발원하면서 작업과 수행이 일행으로 이루어지고 간절한 기도의 정향(定香)이 작품으로 성취되는 수행자를 찾아 나섰다. 인천의 굴포천역에서 내려 걷자 교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건넨다. 사경으로 불보살 형상 표현글자크기 2mm에 농담까지 사경화로 법당 장엄 발원해“하나님 믿으세요.” 건물마다 작은 교회들로 몸살이다. 이윽고 건물 3층 포교당으로 오르자 지호 스님의 작업실이자 불법을 일구는 도량이 반겨준다. 작업실에는 스님의 손을 타고 밭고랑을 흐르는 가갸거겨의 숱한 불음(佛
이기숙 작가를 다시 만난 것은 작년 2016년 6월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갤러리H에서이다. 늘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랜만에 만난 작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2006년 이후 한동안 작업을 못하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붓을 들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부터 항상 쉼 없이 작업을 하고, 늘 새로운 뭔가를 완성해 내기 위해 질주하던 작가가 작업을 쉬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의 형상 단순화시켜 이미지화소박한 배경에 명쾌한 색으로 유희육아의 과정 속에서 아이의 자폐증상은 작가로 하여금 온
무심한 선사(禪師)의 방을 엿본다. 삭발한 선사가 꼿꼿이 앉아있다. 이마에 패인 가로주름과 찌푸린 듯한 미간의 주름살에서 참선의 공력이 읽혀진다. 태산처럼 고요하다. 백색의 내포에 옅은 회색의 장삼을 입고 있다. 장삼 위로 붉은색 가사를 걸친 선사는 한 손에 염주를 쥐고 다른 한 손은 주장자를 세워 잡았다. 그 모습 조용하고 편안하니, 곧 안온(安穩)한 사찰의 선사 그대로다.무한겁 시간 속 수백번 붓질진영이 지닌 오랜 시간 공유충북 보은 법주사에 있는 ‘연담당 세홍 대선사 진영’을 현상모사한 작품이다. 진영은 선승의 초상화를 말한다
왜 기계일까? 보이는 것은 성스러운 대상으로 다뤘음에 틀림없는 불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이보그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계적 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붓다의 예민한 미소와 차가운 사이보그의 촉감이 하나의 형상에 담겼다. 이 흔치 않은 경험은 중앙대와 동대학원에서 아카데믹한 조각을 전공한 왕지원 작가의 작품들이다. 게다가 붓다의 얼굴을 한 사이보그들은 화려한 기계적 장치인 나사와 볼트 등의 골조를 굳이 숨기지 않고 화려하게 움직인다. 마치 생(生)을 꿈꾸는 사이보그처럼, 활(活)하고 싶은 예술가의 창작 욕구처럼. 붓다를 꿈꾸는 인간의
박진홍은 세간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우연히 전시 중인 작가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가 소개한 영상 작품에서 한 폭의 청명함이 노니는 푸른 극락세계의 미묘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전승되는 전통화가 아닌 TV 모니터 속에 한가로운 연꽃과 물고기 영상 작품은 짙은 청색 배색을 바탕으로 한 단색의 간결함과 절제된 영상미를 함축적으로 뽐내고 있다.모니터에 공존의 생명력 부여현상과 허상의 관계를 되묻다잘 알려진 대로 비디오 설치 작품은 백남준 작가의 ‘TV 부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은 최소한의 오브제를 사용하여 불교사상을
따뜻한 햇살과 쌀쌀한 바람이 묘하게 공존하는 계절이다. 힘든 계절이 가고 금방이라도 좋은 날이 올 것 같다가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 바람은 ‘아직도?’ 라고 묻게 한다. 올 듯 말 듯, 2월에서 3월이 그렇다. 나무 위 상처 틈서 핀 꽃치유의 과정이자 자비심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한 박재철 작가의 그림에는 차가운 도시의 보도블록 위의 식물들, 동네 어귀에 허술한 공간위에 핀 꽃, 작고 수수하기만 한 눈길 한번 주기 어려운 풀꽃들이 그 어느 화려한 꽃들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등장한다. 전통회화에서 화훼(花卉)와 초충(草蟲)은 오랜 시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 하늘·땅·인간)에 두루 퍼지게 하리.타출로 입체적 공간 표현‘쓰임’을 위한 공예 지향‘삼국유사’ 제3권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의 마지막에 적힌 찬시(讚詩)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4)이 당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만불산(萬佛山)을 조성토록 공장에게 명하였다. 침단목(沈檀木)을 새겨 만든 만불산에는 온갖 산천의 형상 안에 만불
몇년 전 변대용 작가의 전시 제목인 ‘당신의 위로와 위안’ 앞에는 생략된 문장이 있다. 아마도 ‘당신의 상처와 아픔’ 정도의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위로와 위안은 상처와 아픔이라는 선행(先行)이 있어야만 가능한 단어다. 상처와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공동의 사건일 수도 있으나 다분히 개인적 경험의 행태(行態)로 무한 생성되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치의 가치를 보증한다. 상처의 경험시 필요했을 위로라는 구조.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어 굳이 오늘의 예술로 꺼내 말하기 회피하는 이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작가는 놀랍게도 구상
움직일까 말까 두렵다. 한발 한발 딛고 일어선 만큼 되돌아 갈 수 없는 생(生)의 보폭, 잔뜩 움츠린 아픔이 매달리 듯 세찬 바람으로 스민다. 봄이 온다. 기지개 펴듯, 지난 산란의 아픔이 봄의 전령 되어 따숩도록 비춘다.개구리·개구리알에 빗대어6년간 108번뇌 시리즈 작업우울감 속 내재된 긍정 표현권금영의 개구리는 긴 겨울의 동면과 봄 사이에서 주저하는 번뇌를 던진다. 개구리의 원래 형태인 알 무더기의 끈끈함으로 무한 증식하는 변이적 모습은 우두커니 우리 삶의 생태와 엇비슷함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성체가 되기 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