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실상, 그것은 무상이다. 차이만이 존재하건만,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동일성과 짝된 차이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철저하게 무상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무상을 깊이 통찰했다면, 출석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난주에 온 사람과 오늘 온 사람의 동일성을 멋대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진경’이라는 같은 이름을 써서 기고하고 연재하는데, 이 또한 어느새 어
'벽암록' 제27칙은 운문(雲門) 스님의 유명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들어보라.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동일한 이름의 사람조차매순간 세포들의 생멸로 동일한 상태를 찾지 못해무상, 동일해 보이는 것서끊임없이 달라짐 보는 것무엇이 완전히 드러났을까? 누구는 잎이 다 져서 나무의 몸(體)이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질문이 겨냥하는 바를 완전히 오인한 것이고, 누구는 번뇌와 같은 잎들이 다 져서 본체(體)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본체
분석적 인과성은 두 변수 간 관계를 ‘정확히’ 하기 위해, 즉 최대한 예측가능하게 하기 위해, 관여된 변수를 최대한 줄여 둘로 만든다. 변수가 셋을 넘어가면, 그리고 그 변수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적은 태양과 지구라는 두 항만을 고려하면 계산될 수 있지만 거기에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까지 함께 계산하려 하면 계산할 수 없는 사태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데 달의 영향이 없다고 혹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한다. 이렇게 구성
백장(百丈) 스님이 법문을 하면 언제나 듣고 있던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그 노인은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백장이 물었다. “그대는 뉘신가?” 노인의 대답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저는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 주석하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학인이 ‘위대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답했다가 그 과보로 오백생을 여우 몸을 받아 이리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처지를 바꿀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소서.” 그러
사물이 이렇다면,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람에겐 다른 동물과 다른 특별한 본성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아주 흔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니 ‘놀이하는 동물’이니 하는 얘기는 안 들어본 이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여전히 많이들 당연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동일한 물질도 환경에 따라다른 형태의 성질로 나타나인간인 흑인이 노예된 것은끔찍한 백인 만난데서 기인그러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동물행동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만이 생각한다는 건 오래된 착각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동
불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연기’라는 말로 그것을 요약하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기(緣起), 연하여 일어남이다. 어떤 조건에 연하여 일어남이고, 어떤 조건에 기대어 존재함이다. 반대로 그 조건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음, 혹은 사라짐이다. ‘중아함경’에 있는 유명한 문구가 그것을 요약해준다.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조건 달라지면 본성 달라져세상이 불변의 진리 찾을 때불교, 무상함 보는 지혜 제시“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