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질이 완고하여 알아차림과 의지가 없다. 어찌 (대상에 대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은 필히 너의 불성이다.”유식불교서 마음은 세 종류일상현상에 집착하는 마음조건에 상호작용하는 마음참되고 부족함 없는 성품위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까? 여기서 첫째는 몸과 마음의 구별이다. 둘째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마음의 작용 그대로가 불성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의 몸과 마음의 구별은 쉽게 이해가 된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색깔을 본다면
“하루 온종일 가운데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함을 안다. 이것은 필경 어떤 물건인가?”‘수심결’서 묻는 첫 질문알아차림은 동물도 있지만분명한 앎은 인간의 특징유식, ‘원성실성’으로 설명이것은 보조국사가 ‘수심결’에서 우리에게 묻는 첫 번째 질문이다. 마음은 하루 온종일 끊임없이 인연을 따라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마음은 조건을 따라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흐름이다. 마음은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춥고 배고픔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즉심시불(卽心是佛). 부처란 바로 마음이다.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부처를 밖에서 찾는 것을 방지하고 곧장 진실에 나아가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을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우리의 내면, 마음으로 향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형이상학적 문제가 현실로, 부처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결 구체화된 접근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다.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마음에 대한 이해와 정의는불교·심리학 분야 핵심 과제마음을 객관적 존재로 믿지만의식과 대상
종교란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과 같은 절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대체로 서구의 종교는 이런 경향이 있다. 이런 종교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라고 요구하면 신의 존재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은 절대적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이런 종교적 논의는 부처님 당시에도 아주 많았다.부처란 바로 지금 여기의 경험“진리 보면 곧 여래 보는 것”이것을 떠난 진리는 따로 없어부처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초기경전인 ‘일체경’에 의하면 어
불성이란 개념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대승불교는 ‘무엇이 부처인가?[如何是佛]’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이 질문은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는 필연적이다. 이 질문이 없다면 확고한 신앙적 믿음과 강력한 실천력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논쟁을 해온 과제이고, 앞으로 계속될 질문이다. 무엇을 부처라고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 있었기에 불교는 그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보조국사 시대에도 이런 논쟁을 했던 것 같다.부처될 자질·자격으로 인식공, 근본바탕
‘수심결’은 ‘마음을 어떻게 닦을 것인지’를 설파한 보조국사(1158~1210)의 저술로 고려시대 이후 오랫동안 수행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도 ‘수심결’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헝가리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선어록 가운데 ‘수심결’이 오랫동안 가장 널리 읽혀진 어록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그만큼 ‘수심결’이 마음 닦는 비결을 간절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문답형식으로 핵심 주제들을 잘 정리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심결’의 첫 번째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세상은 불타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