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에 의지하여 무명(無明)을 대치(對治)하지 않는다면, 어찌 큰 휴식[大休]이 있겠는가?’ 깨달은 이후 목우행에 대한 ‘수심결’의 말이다. 이것은 깨달은 이후의 수행은 반야에 의지한 수행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치(對治)라는 의미이다.대치, 병을 다스리는 처방화를 내게 한 원인을 살펴긍정적인 면만 생각하면서크게 소리 내어 웃어보라대치란 의학적인 용어로서 어떤 질환을 상대하여[對] 약으로써 다스린다[治]는 의미이다. 병에 대해 약은 적절한 처방이다. 이런 치료적 은유를 불교에서도 자주 사용한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으
‘수심결’에서는 깨달음 이후의 수행[頓悟漸修]을 목우행(牧牛行)으로 표현한다. 중국 송나라 이후 명상수행의 과정을 십우도(十牛圖)에 비유하곤 한다. 십우도란 사찰 벽에 많이 그려진 그림으로서 잃어버린 소를 찾고, 양육하고 길들이고, 마침내 놓아버리는 10단계의 과정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란 우리 자신의 번뇌이고 마음이고 바로 자기를 의미한다.목우행, 깨달은 후 수행끊고자 함이 존재한다면진정한 수행 될 수 없어선악구분 내적갈등 조장보조국사는 목우행을 “깨달은 이후의 수행”이라고 했다. 깨달은 이후의 목우행이 진정한 수행이고,
깨달음 이후의 수행[頓悟漸修]에 대한 강조는 몽산덕이(1231~1308?) 선사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대혜종고(1089~ 1163) 선사가 남송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몽산덕이 선사는 원나라 시대의 인물이다. 몽산덕이 선사는 남송시대에서 태어났으나 몽고족에 의해서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탄생하자, 회유를 거절하고 강남지역의 휴휴암에 은거하였다. 그러면서 고려의 도우(관리들)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몽산덕이의 법문과 문헌자료가 국내에서 다수 발견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의심 크기 크면 클수록상응하는 깨달음
돈오 이후에 점수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왜 점수는 계속적으로 요청이 되는가? 이 점에 대한 전거를 찾아보면, 송나라 시대 간화선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혜 선사의 어록이 있다. 대혜 선사는 여기서 깨달은 이후의 수행을 강조한다. 특히 ‘대혜어록’에서 편지글만 모은 ‘서장(書狀)’을 보면 간화선 수행에서 돈오와 점수의 관계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은 이참정과의 편지글에서 잘 나타나 있다.불법 의지해 번뇌 제거하고행주좌와 현 행위를 고쳐야 주어진 상황 일정치 않으니깨달음 얻은 후도 정진해야이참정은 대혜 선사로부터 깨
깨달음 이후에 닦음이 필요한가? 아니면 깨달음 이후엔 닦음이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런 논의는 해묵은 논쟁이다.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명상수행이 필요한 것은 오랜 세월 익혀온 습관을 단박에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적 고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돈오와 점수의 관계에 대한 주류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깨달음 이후에도 여전히 명상수행이 요청된다면, 그때의 깨달음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비판적 관점이 있다. 이것은 깨달음이라면 응당 무시이래의 습기가 온전하게 제거되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관점이다.번뇌의 원인 발견하
‘수심결’에서 점수의 요청을 어린 아이에 비유한다. 아이는 태어남과 함께 곧장 이미 인간으로서 부족함이 없이 몸과 마음에서 모든 역량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인과 비교할 때 여전히 모든 것들이 부족한 상태이기에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성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많은 경험과 더불어서 내면의 성스런 태아[聖胎]을 장양하는 명상수행이 요청된다는 관점이다.단박에 제거되지 않는 습기는 어떤 습관적 반응을 발생시킬 잠재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종자와 동의어이다. ‘섭대승론’에 따르면 마음에 저장된 종자는 언어적 표상에 의해
“점수란 비록 본성을 깨달아 부처와 다름이 없다고 할지라도 시작도 없는 오랜 습기(習氣)는 단박에 제거할 수가 없는 까닭에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공력을 훈습하고 성스런 태아를 오랫동안 장양하여 성스러움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습기란 행위 만드는 잠재적 힘 각인된 행동 쉽게 변하지 않듯마음 작용도 동일하게 나타나단박 제거 어렵기에 점수 필요이것은 점수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핵심된 용어는 습기(習氣)가 아닌가 한다. 습기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돈오(頓悟)와 더불어서 점수(漸修)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습기를 단박에 제거하
돈오를 하면 곧 그대로 부처라고 말한다. 돈오의 내용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승과 소승의 구분에서 비롯된 종파적인 관점도 포함돼 있다. 소승의 목표는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기에 결코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반면에 대승의 가르침은 아라한이 목표가 아니라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번뇌는 본래 존재하지 않기에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바탕은 부처와 중생이 동일해마음작용 따라 구분될 뿐이다대승불교는 붓다의 가르침보다는 부처님이란 인격 혹은 품성을 강조한다. 가르침은 그 자체
지혜란 사물을 관찰해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지혜는 분별지(分別智)와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분류한다. 분별지는 외적인 대상을 향해 있고 언어적인 분별을 동반한다. 현실적인 문제를 판단할 때 자주 사용한다. 반면에 무분별지는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있고,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데 사용된다.돈오는 한량없는 지혜의 구족그 시작, 그대로 관찰하는 것형상없는 지혜 소멸되지 않아이것이 정진해야만 하는 이유일상에서 분노나 슬픔의 감정에 휩쓸릴 때 우리는 ‘지혜롭다’ 말하지는 않는다. 이때는 ‘감정에 압도당해 있
번뇌는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일상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불교에서 번뇌를 말할 때 흔히 108번뇌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번뇌가 많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왜 번뇌가 본래 없다는 것인가?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생겨났다가 소멸하는 법근본적으로 쪼개고 쪼개면실제로 존재하는 것 없어첫째는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설명이다. 여기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한다. 사물들은 상호 의존돼 존재한다. 마음의 번뇌도 마찬가지로 인연을 따라서 왔다가 인연을 따라서 소멸되기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할
거친 신체적인 느낌은 점차적으로 가라앉으면서 소멸되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산뜻하게 깨어날 것이다.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見自本性], 이것을 간략하게 줄여서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견성은 바로 돈오와 동일한 의미이다. ‘본성을 본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마음의 작용을 본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본래적 바탕 그 자체를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면거친 느낌이 점차 소멸되고고요함·산뜻함이 깨어날 것이 패턴을 깨닫는 게 견성마음의 작용을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
한 생각을 돌이키는 것[一念廻光]은 돈오의 두 번째 조건이다. 일념회광(一念廻光)을 ‘한 생각 돌이킴’으로 번역했다. 회광이란 ‘빛을 돌이킨다’는 것인데, 이때 빛은 어떤 빛일까? 여기서 빛은 은유로서 ‘의식’의 빛이다. ‘의식’의 빛은 곧 마음이다. 마음은 어떤 대상을 ‘향하여’ 있다. 이때의 마음은 ‘~에 관한’ 의식이고, ‘~에 대한’ 인식이기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동사가 아니라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이다.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 못해대상 사라지면 의식도 소멸돼들썩이는 그 마음 되돌리려면지금 절 하거나 눈 감아보라초기불교 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