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 연왕·조왕 허리 굽히자비로소 마주보고 긴 시간 설법 임금이라도 이름표 떼어야만 불법의 바다에 들어올 수 있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가끔씩 서울을 갈 때마다 치루는 곤욕이 있다. 서울이란 곳이 워낙 사람이 많은 동네다 보니 이래저래 낯선 얼굴과 마주쳐 인사할 일이 생긴다. 그럴 때면 으레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공손한 말과 함께 명함이 건네지기 마련이고, 오고가는 명함세례 속에서 혼자 이방인이 되곤 한다. 그렇게 사람살이의 예의도 모르는 놈이 된 부끄러움에 멋쩍게 웃으며 빈손을 내밀다보면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공자님 말씀이 절로 생각난다.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하나니, 앞으로 올 자
옛 선사는 환부를 도려낸 의사교만한 자에겐 백정의 칼일 뿐 앵무새 입 닫고 가슴을 열어야 평안의 싹이라도 틔울수 있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지혜는 칼과 같다. 칼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이지만 한편으론 매우 위험한 도구이다. 똑같은 칼이라도 의사 손에 쥐어지면 치료의 도구가 되고, 백정 손에 쥐어지면 살상의 도구가 되며, 철부지 손에 쥐어지면 자해의 도구가 된다. 지혜 또한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지혜의 가치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벽암록’에 다음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유엄(惟儼)이 스승 석두의 회상을 떠나 호남성 예주 약산(藥山)에 머물 때 일이다. 화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대학시절, 드넓은 강호를 떠돌며 펼치는 무인들의 스펙터클한 액션과 낭만에 매료되어 한동안 만화방에서 산 적이 있었다. 시간 때울 거리를 찾는 지루한 친구들 앞에서 무림의 수많은 문파와 계보를 거창하게 설명하며 서너 시간쯤 너끈히 설을 푼 적이 있었다. 그 무협의 세계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검(寶劍)이다. 우여곡절 끝에 천하제일검을 얻어 하루아침에 절정고수로 등극한 주인공이 무림의 고수들을 추풍낙엽처럼 무찌르는 장면을 설파할 때면, 말하는 사람 입에서도 듣는 사람 입에서도 연신 “캬아~~” 하는 감탄사가 터지곤 하였다. 그러다 허황된 이야기마저 지루해져 친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설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마조 도일의 방문을 두드려 단박에 통발을 잊고 유희삼매(遊三昧)를 얻은 남전 보원(南泉普願)은 귀종 지상(歸宗智常)·삼산 지견(杉山智堅)·마곡 보철(麻谷寶徹)과 벗이 되어 천하를 행각하였고, 수도 낙양으로 남양 혜충(南陽慧忠)을 친견하였다. 이후 남전산(南泉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오두막 한 채를 짓고는 비탈진 언덕을 개간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선정에 들며 조용히 살아갔다. 찾아가도 반기는 법 없고, 물어도 그럴싸한 답변 한 마디 없고, 휭 하니 떠나버려도 눈살 찌푸리는 일 없이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산에서 풀을 베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둔덕 아래로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손짓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와 안기던 개가 주인을 물 경우가 있다. 하나는 새끼를 배었을 때이고, 또 하나는 먹던 밥그릇을 찼을 때이다. 개만 그럴까? 새끼와 밥그릇 앞에서 사나워지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명체의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욕구, 즉 본능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은 자기보존욕구와 종족보전욕구이다. 먹을거리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매혹적인 암컷 앞에서 염치불구하기는 사람이건 짐승이건 매 일반이다. 해서 동물세계도 인간세계도 식욕과 성욕의 충족을 위한 싸움은 그치질 않는다. 붓다는 젊은 시절 이런 생존경쟁의 비열함과 아픔을 목격하고, 이를 혐오해 싸움판을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깊은 성찰을 통
우리가 부처님이 되는 것은 민들레가 튤립되는 것 아님 본질의 세계에 주목하면 민들레와 튤립은 곧 평등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부처가 되려고 발버둥 치던 마음이 바로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은 도일에게 스승 회양은 게송 하나를 일러주었다. 마음바탕은 모든 종자를 머금어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트네삼매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 모양 없나니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생겨나랴. 달마의 가르침을 흔히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마음의 바탕은 실로 ‘대지[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봄볕이 돌아오고 때맞춰 봄비가 내리면 온 대지에 새파란 싹들이 돋아난다. 참새부리처럼 뾰족이 주둥이를 내민 그 싹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성병(性病)도 아니고, 성병(聖病)이라니? 혹자는 별스러운 단어로 현혹시킨다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의 마조행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개원(開院,713~742) 연중의 일이다. 소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에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을 지닌 한 스님이 형악(衡嶽)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좌선하고 있었다. 마(馬)씨 성에 도일(道一)이라는 법명을 가진 그 젊은 수행자는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손짓 하나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지 않고, 수많은 경전을 읽고 이해해 늘 되새기며 살아온 수행자였다. 이른바 모범생이었다. 그런 그가 “성품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