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참 묘한 곳이다. 이백(李白)이 “하늘과 땅은 만물이 잠시 깃드는 여관이요, 세월이란 끝없이 스쳐 지나는 나그네”라고 노래했던가? 비탈에 늘어선 나무, 울퉁불퉁한 바위, 구름과 개울 따라 흐르다보면 온 세상을 다 가질듯이 뻗대던 사람들도 절로 세월의 나그네가 된다.숲은 참 묘한 곳이다. 산마루에 올라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소매로 훔치면 드넓은 하늘을 돌고 도는 태양과 그 사이를 유유히 떠도는 구름, 온 숲을 헤집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바람과 둘러 둘러 쉬었다 또 흐르는 강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길게 한숨 돌리고서 개미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고 그 열에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를 범부라 하고, 아는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실천하는 자를 도인(道人), 즉 진리의 길을 걷는 자라 한다. 진리의 길을 걸어 평안(平安)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닿기란 생각만큼 용이하지 않다. 갈림길과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여정에는 훌륭한 길잡이[導人], 즉 스승이 필요하다.귀감(龜鑑)이란 말이 있다.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사람의 눈이 밖으로 나있다보니 타인의 장단을 논하긴 쉬워도 자신의 허물은 보기 어렵다. 그럴 때
송나라 때 종열(1044~1091)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그는 식견이 빼어나고 행실도 남달랐기에 젊은 시절부터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여러 납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를 유행하던 그의 발걸음이 운개산(雲蓋山) 지화상(智和尚)의 처소에 다다랐을 때였다. 지화상은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고 이내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어버렸다.“스님, 왜 웃으십니까?”눈가에 주름에 자글자글한 지화상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길게 마시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수좌를 가만히 살펴보니 기질이 남다른 구석이 있구먼. 그런데 왜
송나라 때 일이다. 불안 청원(佛眼淸遠)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설당 도행(雪堂道行) 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스님은 언행이 부드럽고 온화했기에 나이 들어 소임을 놓고 뒷방에 물러나서도 대중들은 늘 대소사를 스님과 상의하였다.어느 날 원주가 씩씩거리며 스님의 방을 찾았다. 벌건 낯빛으로 보아 꽤나 분통이 터지는 듯하였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인 도행 스님이 꼬부장한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왜 그리 심기가 불편한가?”“노스님, 요즘은 아랫사람을 모시고 살아야 할 판입니다.”“무슨 일인데 그러나.”“새로 들어온 행자 말입니다. 점심을 먹고
금화(金華)에서 경론을 강의하던 회지(懷志)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열네 살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오랜 세월 경론(經論)을 연구했던 스님은 학식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소탈했기에 동오(東吳)의 많은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어느 날, 멀리서 찾아온 객승들을 맞아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서였다. 객승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회지 스님은 자신이 품은 평생의 뜻을 넌지시 밝혔다.“요즘 불교집안의 행태를 보면 천태(天台)니 화엄(華嚴)이니 유식(唯識)이니 하며 제각기 종파를 세우고는 분분한 논쟁이 그치질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송나라 서주(舒州) 태평산(太平山) 흥국선원(興國禪院)에 새로 주지가 부임하던 날이었다. 선원을 이끌던 전임 주지는 황룡 혜남(黃龍慧南)선사의 제자인 유청(惟淸)이었고, 신임 주지는 오조 법연(五祖法演)선사의 제자 혜근(慧懃)이었다. 인사치례는 약소하기 그지없었다. 유청 스님은 대중방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소임자들을 소개하고는 곧바로 혜근의 손을 방장으로 끌었다. 툇마루에 지팡이 하나 달랑 걸쳐진 방장은 그 속도 휑했다. 바닥엔 방석 두 장, 벽엔 삿갓과 바랑이 전부였다. 귀밑머리가 희끗한 유청은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후배에게 물었
아둔하기 그지없는 처응 스님 구운 무로 스승 심신고통 해소제자의 진심 알아본 스승 수단 법연도 두려워할 법기 만들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행여 준마를 울타리에 가두는 건 아닐까, 옛 스승들은 늘 염려하였다. 나의 장점으로 타인의 단점과 겨루고 있는 건 아닐까, 옛 스승들은 늘 스스로를 점검하였다. 그래서일까? 품안에서 키우던 제자에게 훌륭한 자질이 보인다 싶으면 종종 믿을만한 벗에게 단련(鍛鍊)을 맡기곤 하였다. 보령 인용(保寧仁傭) 스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거두던 제자들 가운데 처청(處淸)과 처응(處凝)이라는 두 제자가 눈에 쏙 들어오자 인용 스님은 곧장 둘을 백운수단(白雲守端)선사에게로 보냈다. “
황벽회상서 세 번 맞고 물러나대우 몽둥이에 부처경계 들어 “뼈 부숴도 은혜 갚을 길 없어”스승 입적 후 황벽 선사 시봉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당나라 때 일이다. 조주 남화 출신에 의현(義玄)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이 한분 계셨다. 의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랐으며, 계율에 뜻을 두어 수십 년 율장을 탐구하며 칼날처럼 계행을 수지하였다. 또한 여러 경전과 논서를 두루 탐구하였으며, 특히 유식(唯識)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산더미 같은 전적들이 약방문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처방전만으로 병을 치료할 수 없음을 안 의현은 선지식을 찾아 제방을 편력하였다. 그가 찾아간 곳은 황벽산(黃檗山) 희운
매일 심부름만 하던 문열스님 ‘도대체 왜’ 냉가슴만 앓다가 시렁위 물통 깨지는 소리에 깜짝놀라 일어서다 깨달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송나라 때 문열(文悅)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용흥사(龍興寺)에서 출가한 스님은 작은 키에 예쁘장하게 생겼고, 성품이 순직하였다. 경론(經論)을 두루 섭렵하며 세월을 보내던 문열은 열아홉 한창 나이에 책을 덮었다. “장부가 세속을 등진 까닭은 오직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기 위해서이다. 어찌 서생(書生)노릇에 그치겠는가.” 지팡이 하나 달랑 지고 산문을 나선 문열은 천하 선지식을 찾아 강회(江淮)로 유람을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균주(筠州) 대우산(大愚山)의 수지(守芝
깃발·바람 다투는 제자들에게‘마음 움직인 것’이르는 말 듣고선지식 알아채 출가할 것 권유혜능이라 이름 주고 그 제자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의봉(儀鳳) 원년(676), 새해를 맞아 남해(南海)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印宗) 법사가 보름간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였다. 발보다 빠른 소문은 곧 원근에 널리 퍼졌고,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몰려든 인파로 낮이면 절 마당이 사람들로 빼곡했고, 밤이면 행랑채가 야시장처럼 북적되었다. 그 틈에 산발한 머리가 어깨까지 늘어진 처사도 한 명이 끼어있었다. 1월8일 밤이었다. 벽에 붙어 새우잠을 자야할 만큼 사람이 많았던 까닭에 방안에는 퀘퀘한 훈기가 가득했다. 구석에서 좌
혜가, 달마대사 스승 삼으려 발심하고 결연한 의지 보여 안심법문에 깨닫고 정진해 “내 골수 얻었다” 인정 받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 정광(正光) 원년(520)의 일이다. 낙양(洛陽) 땅에 신광(神光)이라는 박식한 스님이 한분 있었다. 얼마나 책을 많이 봤는지 고금에 모르는 일이 없고, 입만 열었다하면 현묘한 이치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해서 주위에서 다들 그 명민함을 부러워하고 경외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늘 탄식하였다. “공자와 노자의 가르침은 예절[禮]과 술수[術]와 풍류[風]와 법규[規]뿐이요, 장자와 주역도 오묘한 이치를 완전히 밝히진 못했
월당 스님에 실망한 수행자들모두 떠나고 선방 텅 비자이유 물으며 따지는 사제에게‘기다림의 의미’ 가르침 내려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송나라 때 월당 도창(月堂道昌)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스님은 여섯 살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열세 살에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는 교학의 바다를 두루 편력하고 제방의 종장(宗匠)들을 참방한 후 운문종 제5세 묘담 사혜(妙湛思慧) 스님의 법을 이었다. 사혜 스님이 열반하신 후, 월당 스님은 정자원(淨慈院)으로 처소를 옮겨 발우와 석장을 풀었다. 그러자 청정한 계의 향기와 명철한 안목을 흠모한 학인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많던 학인들이 다시 구름처럼 흩어졌다. 까닭이 있
재능이라곤 없던 시탄 스님 생명 꺼져가는 청년 살려내 제자 지책은 그 스승 입적 후 3년상 치르며 ‘관음보살’추앙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조선 영조 때 일이다.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자락 남장사(南長寺)에 시탄(時坦)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다 평범한 외모, 기예와 재능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분이었다. 늙수그레한 나이에도 마당 쓸고 걸레질하는 게 그의 일과였고, 낡은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그에게는 나무하고 등짐 지는 궂은일도 “이것 좀 하시오” 한 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숱한 이들의 ‘이래라저래라’에도 도통 말이 없고 그저 순한 웃음만 달고 살았기에 같은 절 스님들도 “스
한 살 어린 스승 찾아간 법연 방앗간 일 시켜도 지극정성 자상한 가르침에 화두 타파 훗날 개당해서도 스승 찬탄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송나라 때 일이다. 35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한 법연(法演)이 성도(成都)의 어느 강당에서 ‘유식백법론(唯識百法論)’ 강의를 듣고 있었다. “보살이 견도(見道)에 들어가면 그 순간 지혜와 이치, 경계와 정신이 그윽이 계합해 증득하는 주체와 증득하는 대상을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입문이 늦었던 만큼 법연의 학구열은 치열했다. “증득하는 주체와 대상을 분별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증득’이라 한단 말입니까
불보살에 스승 회복 빌던 극문 스승 차도없자 손가락 불붙여약왕보살전에 빌고 또 빌어 소식들은 스승 차츰 기력회복 송나라 때 일이다. 귀종사(歸宗寺) 당우(堂宇)가 화재로 소실되자 관에서는 주지인 황룡 혜남(黃龍慧南, 1002~ 1069) 스님에게 책임을 물어 옥사에 감금하였다. 명망 있던 승가의 대덕들과 재가자들의 탄원으로 방면되긴 하였지만 스님은 당신의 죄를 스스로 물으셨다. 혜남 스님은 주지 직을 사임하고는 문하의 대중을 모두 흩어버리고 홀로 황벽산(黃檗山) 적취암(積翠庵)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그러나 어미젖이 간절한 어린 송아지들의 발길은 쉬이 어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뿌리쳤지만 극문(克文)을 비
부지런함 대명사 양기 스님 부실한 집 걱정하는 학인에 자신을 위한 공부 소홀한 채 겉치레에 신경쓴다며 질책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송나라 1035년, 균주(筠州) 구봉산(九峰山)에서 황제의 명을 받든 방회(方會)선사는 멀리 양기산(楊岐山) 보통선원(普通禪院)으로 향했다. 산 높고 골 깊은 곳에 자리한 터에 몇 년간 주지(住持) 자리가 비었던 탓에 그 절은 황폐했다. 법당은 기둥이 삭아 틀어지고 요사는 기와가 벗겨져 흙덩어리가 처마로 굴렀지만 시운(時運)이 기울어 황후장상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고 인적이 드물어 선량한 단월들의 보시 역시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살림살이는 궁벽
삼태기 스님이라고 불린 혜공자신 따르며 흉내내는 원효에 네 행동이 타인에 행복 못주면 나·너 모두 손상시킴 일러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신라시대, 혜공(惠空)이라는 신비한 스님이 있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표표히 거리를 떠돌던 그는 가끔씩 절에 들러 우물 속으로 들어갔고, 우물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다 우물에서 나올 때쯤이면 꼭 푸른 옷을 입은 하늘나라동자가 먼저 나타나 그의 출현을 예고하였고, 우물에서 나온 그의 옷은 늘 뽀송뽀송하였다. 그는 커다란 삼태기를 걸머지고 미치광이처럼 산발에다 옷고름까지 풀어헤치고 쏘다녔다. 하지만 곁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고질병이 저절로 나았기에 귀족의
도둑질 장면 보고도 침묵 돈 잃은 아이엔 대신 내줘스스로 자기죄 깨닫게 유도진정 참회해야 재발도 방지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조선조 영조 때 일이다. 금릉(金陵) 직지사(直指寺)에 쌍운(雙運)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15세에 속리산(俗離山) 추학(秋鶴)장로를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이후 환성(喚惺)ㆍ송매(松梅)ㆍ회암(晦庵)ㆍ호암(虎巖) 등 여러 대법사의 강석을 두루 참방하고, 직지사에서 강석을 열어 당대의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명성을 드날렸던 분이다. 스님은 온화한 분이셨다. 오랫동안 휘하에서 수학한 이건 새로 들어온 이건 한결같이 대하며 늘 말수가 적었고, 크게 소리 내어 웃거나 노기를 드러내는 법이 없으셨다. 그 온화함에
제자 법우 회상 학인들 파계에스승 도안 말없이 회초리 보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전란의 연기와 봉화가 끊이지 않던 남북조시대, 살육과 증오의 피비린내를 피해 긴 세월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떠돌던 도안(道安, 312~385)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는 신승(神僧)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불도징(佛圖澄)의 수제자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얼굴까지 못생겼던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그의 언행(言行)은 옥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맑고 청아해 만인의 척도가 되었다. 학덕(學德)의 향기는 곧 바람을 거슬러 사방으로 퍼졌고, 그가 항산(恒山)에 사탑을 건립하고 머물자 수많은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안은 그곳에 14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