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의상(625∼702)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비교적 다양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자료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많이 발견되고,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의상의 행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자료를 적당히 취사하여 대체적인 이해체계를 설정하는 작업만을 안이하게 반복하여 오고 있을 뿐이고, 자료 자체의 엄격한 비판과 사실의 본질적인 검토에서 출발한 학문적 성과는 찾기 어렵다. 예를 들면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이후 동해안의 바위굴을
의상(625∼702)은 원효와 함께 신라불교사 인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아서 많은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왔다. 원효가 종합적인 불교사상체계의 수립과 무애한 대중교화사로서 평가된 반면에 의상은 화엄종의 창립자와 근엄 성실한 수행자로서 주목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의상의 행적과 정치적인 역할에 관해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의상의 행적에 대한 자료 정리는 비교적 충실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다양하게 전승된 자료에 나타난 서술 내용의 차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해석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 화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중대의 새로운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그들에 관한 전기 자료는 의외로 많지 않아 자세한 행적을 밝히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효는 재가불자로서 승속을 넘나드는 무애한 교화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거나 교단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후 그의 불교는 제대로 전승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전기 자료와 함께 저술들도 온전히 전승되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의상(625~702)이 생존하였던 7세기 후반기는 신라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은 ‘중고’기의 26대 진평왕(579~632)·27대 선덕여왕(632~647)·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중대’기의 29대 태종무열왕(654~661)·30대 문무왕(661~681)·31대 신문왕(681∼692)·32대 효소왕(692∼702) 등 6인 국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되는데, 신라의 역사를 ‘중고’기에서 ‘중대’기로 구분케 할 만큼 커다란 사회적·사상적인 변혁기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지배체제
1930년 최남선(崔南善)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불교-그 동방문화사상에서의 지위’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통불교론을 제창함으로써 원효불교 이해의 신기원을 열었다면, 1967년 이기영은 ‘원효사상1-세계관’이라고 하는 저술을 출간하여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 대한 전면적인 해설을 시도함으로써 원효불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새장을 열었다. 동시에 이기영은 원효불교를 거사의 관점에서 시종일관 접근하여 유마(維摩)거사를 종교적 전범으로 삼는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실천운동의 새 길을 개척하였다. 그런데 70~
1930년 최남선(崔南善)은 통불교론을 제창하여 원효불교 이해의 신기원을 열었다. 최남선은 통불교론으로 원효불교의 우수성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아시아불교의 역사에서 원효불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 동시에 한국불교사 자료들을 발굴 소개함으로서 불교사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에 강요된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최남선의 한국학 연구는 굴절을 겪으면서 발전의 길이 막히었고, 원효불교의 연구도 중단되고 말았다. 더욱이 해방 뒤의 계속된 불교계의 혼란 상황은 최남선으로 하여금 불교계를
최남선(崔南善)이 최초로 제창한 ‘통불교론(通佛敎論)’은 해방 이후 원효 연구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까지 원효불교 이해의 기본적인 학술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담론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결과 원효불교가 통불교임을 전제로 원효의 불교사상에서 그러한 요소를 찾아내서 증명하려는 방향으로 연구가 집중되었다. 그리고 원효의 불교사상을 한국불교사 이해로 확대하여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설명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이런 통불교론에 대해 강력한
1910년대에 들어와서 근대불교학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이 불교잡지들이었다. 1912년 원종종무원의 기관지로 발행된 ‘조선불교월보’(1912.2~1913.8. 19호)를 시작으로 하여 ‘해동불교’(1913.11~1914.6. 8호) ‘불교진흥회월보’(1915.3~12. 9호) ‘조선불교계’(1916.4~6. 3호) ‘조선불교총보’(1917.3~1921.1. 22호) ‘유심’(1918.9~12. 3호) 등이 연이어 발행되어 불교계몽 역할과 함께 근대불교학의 새장을 열게 하였다.이 잡지들의 편집발행을 담당했던 인
11세기 고려의 전형적인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고 문벌귀족세력이 등장하는 것에 상응하여 불교계에서 교종 계통의 화엄종과 법상종이 주류적인 종파로 대두하면서 (초조)대장경의 완간에 이은 불전 간행의 보완사업으로서 의천(1055~1101)에 의해 경·율·론 삼장의 주석서인 장소를 모은 교장을 간행하였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동아시아 불교사의 업적을 집대성하는 의의를 갖는 불사였다. 그 간행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1090)에는 원효의 저술 44부 87권(또는 83권)의 목록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경주의 분황사를 찾아
원효를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효 불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적과 불교사상의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첫째로 한국 불교학 수준이 아직 초보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욱 직접적인 이유는 원효의 불교 내용 자체가 사상적·사회적으로 수준과 폭이 워낙 높고 넓으며, 한국 불교계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광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 산일되어 접할 수 있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원효는 동아시아문화권의 중심인 당에서 유학한 적이 없고, 신라에서만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불교사상은 7세기 당을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한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원효는 2차에 걸쳐 현장의 신역불교를 접하기 위하여 당 유학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1차는 타의(他意)에 의해, 2차는 자의(自意)로 유학을 단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았으나, 당의 불교계 동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고, 새로 전해오는 경론들을 누구보다 먼저 탐독하여 깊은 이해를 추구하였다.
지금까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원효불교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밝혀오는 과정에서 원효는 먼저 650년 현장의 신유식학을 접하게 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공·유 대립의 극복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어 670년 의상의 귀국을 계기로 당의 화엄학을 새로 접하게 되면서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한 종합적인 불교사상의 토대 위에서 ‘화엄경’의 교설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하는 단계로 진입하였는데, 구체적인 성과가 4교판이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원효불교의 핵심적인 주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