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08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합장하며 1배를 할 때 내려가고 올라오는 과정 속에서 그동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5살 시절 살던 동네의 모습부터 대학교 친구와 웃으며 먹던 음식들까지. 내가 원해서 생각한 것들과 원하지 않았던 생각들. 왜 이렇게나 많은 생각들이 찾아들어 오는지 알 수 없었다.내가 이 몸의 주인인지, 몸이 나를 지배하는 주인인지 의심이 들었다. 사실 몸은 잘못이 없다. 언제든, 어떤 장소든, 어느 상황에서든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을
어릴 적 나는 조용하고 말 없는 아이였다. 잘하는 것이 없고, 잘 해야 하는 것도 못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가족의 잦은 이사로 여러 초등학교를 다녔고, 주변에 친구가 적어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찌그러진 사이다 병뚜껑을 봤다. 동시에 ‘저 병뚜껑은 왜 이름이 병뚜껑인 걸까' ‘누구의 생각으로 꼭 저렇게 생겨야만 하는 걸까' ‘그럼 난 왜 신상욱인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신상욱’이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이렇게 무능력한 건지, 그래서 이렇게 못나게 생긴건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건지,
“이 겁니다. 이 것뿐입니다.”손가락을 들어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뭔가를 가리키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과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선생님은 일요일마다 동국대 대각전에서 법회를 열었다. 매주 그 곳을 찾았고, 이곳이 내 마지막 공부처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생각으로 찾지 말고,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손가락을 들며)이 겁니다.”머리로 헤아리는 공부가 아니라고 하시니, 오로지 선생님이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법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몸으로 선생님의 손가락에만
학창시절부터 신비주의, 영성, 도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 뻔한 삶이 너무 허무해 보였다. 쳇바퀴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무 의미없이 내 삶을 허비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망설임없이 구도자의 삶을 택했다.명상 붐이 불던 80년대 후반. 영성에 대해 공부할수록 스승의 존재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났다. 그러다 한국의 라즈니쉬라 불리는 분에 대해서 알게 됐고, 뭔가 답을 얻을 수 있길 기대했다. 졸업 후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하며
30여년전 청주로 내려와 남편과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한가로이 집 근처를 산책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4층 높이의 포교당 앞에 서있었다. 그 만남이 불교신자로서의 첫걸음이다. 마야부인상이 있던 그 절은 봉명동에서 안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나온다. 대웅전 한채와 함께 유치원을 운영했던 비구니스님의 포교당이었다. 단순히 불교를 알고 싶은 마음에 다니기 시작했다. 스님을 따라 성지순례를 다니기도 하며 불교 기본예절과 찬불가 등을 배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그저 겉으로만 신행생활을 했다.결혼 후 2년이 지났
초등학생 6학년 무렵, 정각사 어린이법회에 입회했다. 가족들을 따라 종종 산속 사찰을 가봤기에 풍경은 익숙했지만 108배, 찬불가, 반야심경 등은 생소했다. 어린이법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불교교리를 배우면서 불교에 점점 흥미가 생겼고, 매주 일요일 정각사에 갈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청소년법회에서 불교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법회 담당 스님은 부처님의 생애, 불교의 상징, 반야심경 낭독, 108배를 가르치셨다. 이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108배다. 청소년법회 스님과 선생님께서 108배를 시키셨고, 그럴
그러던 중 옛 도반이 아무런 설명없이 메일로 김태완 무심선원 선원장의 법문 여러 개를 보내왔다. 전에도 법문들을 몇 개 보내왔던 터라 별 기대 없이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법문 중 ‘모든 게 있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바로 내가 했던 경험이었다. 왜인지 알 수 없는 믿음과 제대로 길을 찾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심선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선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여름정진법회 공지가 있었다. 앞으로 혼자서 공부하리라는 결심은 까맣게 사라지고 일체 망설임 없이 바로 신청했다.들뜬 기대감으로 정진법회에 참석
어릴 적 나는 무척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어머니가 홀로 3남매를 키우며 생계를 꾸렸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불안정했다. 이 때문인지 바깥세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무엇이든 혼자서 해결하는 습관이 들었다.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학창시절엔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겉으로는 온순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은 언제나 우울함과 허전함, 알 수 없는 그리움과 답답함으로 먹먹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종교에 관심을 갖고 정신 서적을 제법 탐독했지만 답답함을 쓸어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이따금 찾아낸 시원한
명상과 ‘법화경’ 독송을 꾸준히 하면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내가 의지할만한 안식처이고 안전지대이며 모든 생명들을 살릴 수 있는 보물임을 알게 됐다. 알아차리는 마음 이외에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었다.‘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기에 모든 형상, 생각, 감정, 느낌들이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기분이 좋거나 화나거나 항상 오염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늘 깨어있었다. 나이와 성별, 국적, 이념, 종교 등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동물들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음을
“너는 누구니. 너는 우리 편이 아니잖아.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누구인지 어디 가서 말하면 다칠거야. 여기에 끼지 말고 저쪽으로 가. ”살아오는 동안 삶을 사로잡은 건 세상이 떠들고 있는 화려함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세상이 나에게 던진 비난·오해·미움·분노·몰이해와 무관심·냉소적인 반응들은 내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평생 풀어야 할 화두를 안겼다.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보호와 도움을 준 감사한 분들도 많았지만, 괴로울 때마다 화두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국적, 종교, 이념 등 그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낸 엄마의 마음이었다. 자식 같은 용사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간식 하나라도 더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개인전화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가족과 여자친구에게 통화를 하게 해주고 종교활동 사진을 찍어 부모님께 보내줬다. 아들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포교사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인사를 드렸고, 부모님들은 반가워하며 감사하다는 답장을 주셨다. 전역한 군종병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끓는 피가 한창인 청춘의 용사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군대라는 제약이 가득한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시골마을에서 자랐던 나는 같은 반 도시아이처럼 하얀 피부를 뽐내던 전도사의 딸과 친해지기 위해 교통수단도 없는 길을 1시간30분씩 걸어 교회에 찾아갔다. 남편과 결혼한 26살이 되던 해까지 교회를 다니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시어머니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당신이 다니시는 조계사를 가자고 했다. 시어머니 말씀이니 ‘한번 따라갔다 오지 뭐’ 하는 심정으로 시작된 길이다.시어머니는 새벽 4시에 도착해 제일 좋은 자리에 촛불을 켜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을 향해 두 팔로 큰 원을 그렸다. 남편과 자식을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 법문 중 “생각을 조복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는 말이 귀에 확 꽂혔다.‘내가 생각을 조복시켰나’ 하는 의문이 올라왔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체험한 것은 뭘까’ ‘어떻게 생각을 조복시키지’ 천근만근 바위덩어리가 가슴에 달린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었다. 너무 답답해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힘들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법회 마지막 날, 선생님에게 ‘똥 막대기’던 ‘뜰 앞의 잣나무’던 다 똑같은데, 도대체 생각은 어떻게 조복시켜야 하는지 여쭸다. 선생님은 그저 웃으며 “보살님, 그냥 이것뿐이에요”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필수 교양수업으로 불교를 공부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접했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었지만 깊은 공감이 몰려왔다. 특히 부처님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다. 80년대 초,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 수많은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이 홍수를 이뤘다. 인도철학과 노자, 장자 등에 푹 빠져 20대를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참나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삶의 굴레 속에 허덕이며 살았다. 그러던 중 60대 중반 친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새 소리. 선방에는 30명 남짓한 수행자들이 좌복 위에 앉아 각자의 수행 주제로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보호받는 느낌도 들었다. 선원에서 집중명상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평온함은 이내 무너졌다. 10년간 요양병원에서 홀로 생활하시며 외롭게 생을 마무리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한동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소홀했던 분이었다.
서른 살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진로와 비전, 대인관계, 직장 문제 등 또래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대학생 때부터 꿈꾸며 해왔던 일들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고,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리되던 시기였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스스로를 위축시켰고, 긍정적이고 활발했던 예전의 ‘나’를 잃어버렸다.어렸을 적 법당은 놀이터였고, 비구니스님들의 존재가 엄마이자 친언니처럼 느껴졌던 곳이다. 가장 좋아했던 곳, 가
어떻게든 1시간은 버티려고 하다 보니, 지나치게 힘을 주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혜연 스님께 ‘쉐우민 방법’으로 지도를 받고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혜연 스님은 ‘고엔카 10일 코스’ ‘미얀마 단기출가’를 알려주고, 순룬 사야도나 떼인구 사야도와 같은 미얀마의 아라한 스님들 이야기도 해주셨다. 스님의 소개 덕분에 고엔카 10일 코스에 몇 번 참가하다 보니, 집을 떠나 더 오랫동안 수행에만 전념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먼저 부처님 말씀인 ‘니까야’를 모두 읽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졸업하고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처음 위빠사나 명상을 배웠을 때, 아무래도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몸은 자꾸 구부러졌고 허리와 무릎은 여기저기 아팠다. 배의 부품, 꺼짐 같은 건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중을 잘해서 신기한 현상들을 경험하곤 했지만, 나는 그런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명상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알았다. 이상하게 ‘이것은 진실’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후 미얀마에 가서 짧게나마 출가생활도 경험하고 15년째 명상을 이어오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어렸을 때부터 친구를 사귀거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까지 강화되자 이참에 제대로 수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소문하다 연락이 닿은 한 선원에서 곧 1년에 몇 번밖에 없는 선회(禪會)를 여는 것을 알게 됐다. 참석해 5박6일간 열심히 정진했는데, 참선 지도는 단 1분 만에 끝이 났다. 호흡 수련 등을 배울 줄 알았는데 단지 “왜 마삼근일까?”하는 의심만 놓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마삼근’이라고 써 붙이고, 나중에는 손에 ‘禪’이라고 크게 문신을 새겨 넣었다. 심지어 꿈에서까지 화두를 참구했다. 그러나 몇 년을 참구해도 전혀 어떠
어린 시절, 불교를 잘 알진 못했지만 절에 열심히 다니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항상 호감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다 입대 후 우연히 부대의 불교 군종병에 선발되면서 매주 3번씩 절에 다니게 됐다. 원해서 된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제대하기 전에 ‘반야심경’ ‘천수경’ 등 기본적인 경전을 외울 수 있었다.제대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는 자동차 정비를 전공했는데, 일본에서 갑자기 외국어에 흥미를 느꼈고 불경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중국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인이 일본에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힘든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