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5년(1550) 이자실이 그린 ‘관음삼십이응신도’의 부분도. 비구니 스님이 합장하고 앉은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땅에 부처님 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바닷길을 헤치고 일본에 도착한 혜편(惠便)은 낯선 일본 땅에서 고구려에서 온 비구니 법명(法明)을 만나 서로 전법에 대한 뜻이 같음을 확인했다. 곧 의기투합한 둘은 함께 법을 전하며 이곳 저곳을 유행했고, 한 곳에서 자신들의 설법을 듣고 발심한 세 여성으로부터 출가 요청을 받게 됐다.그러나 출가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단이 성립되지 않은 일본 땅에서는 삭발염의를 하는 득도만 가능할 뿐 수계는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당장은 이들의 출가를 받아들여 득도를 시키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이
불자들은 보통 계율(戒律)을 스님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자 해서는 안될 일을 규정한 금지조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볼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 즉 스스로 깨닫는 종교이기 때문에 자각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맞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주체적 생활방식을 바로 계(戒)라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성격을 지닌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 또는 교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정한 것이 율(律)이라고 할 수 있다. 계와 율은 이렇게 각각 자율과 타율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글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저서는 물론 어떠한 친필 기록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 세인들이 보고 익히도록 한 경전(經典)은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을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경전 성립의 기운은 마하가섭이 부처님 열반 후 그 가르침이 소실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면서부터 싹텄다. 부처님은 자신의 열반이 임박했음을 알고 각지에 흩어져서 법을 전파하던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따라서 상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가섭도 마가다국에서 함께 수행 중이던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부처님을 향해 떠났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잠기게 됐다. 그런데 이때 어느 늙은 비구의
가야에 불교를 전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 진영. 『삼국유사』‘금관성 파사석탑’조와 ‘가락국기’조에 따르면 서기 48년 5월 인도 아유타국의 국왕과 왕후는 “공주를 가락국에 보내 수로왕의 배필이 되도록 하라”는 하늘 상제의 명을 받아 딸 허황옥을 동쪽의 가락국으로 보냈다. 불교국가였던 아유타국의 왕은 이때 먼 바닷길을 가는 동안 있을지도 모를 바다 신의 노여움(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는 탑을 실었고, 공주의 가야국 생활을 도와 줄 종복 20명을 함께 보냈다. 허황옥은 2개월 여 만인 7월 27일 가락국 별포 나룻목에 도착하자마자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이를 폐백 삼아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른 후 성밖에 임시로 만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온 부처님의 가사(사진 왼쪽)와 자장율사가 신라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가사(사진 오른쪽) “『국사(國史)』에 이런 기사가 있다.(…)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백 알과 부처가 입던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두었다.(…)” 『삼국유사』「탑상편」‘전후로 가지고 온 사리’조에 나타난 이 설명이 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사(袈裟)’에 대한 첫 기록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서 ‘자장율사가 가져
한국불교 최초의 계단인 통도사 금강계단.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조건 중 하나는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약속에 다름 아닌 법률이다. 법률을 만들어 구성원 모두가 그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물론 기업, 학교 등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곳마다 각자에 맞는 규율을 정해 놓은 것이고, 이는 종교 역시 다르지 않아 불교에도 계율(戒律)이 존재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각각 지녀야 할 규율을 설명해 놓았고, 이 규율은 현재까지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6계 등 계율(戒律)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출가자들은 반드시 이 계를 받아 지키면서 수행자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때문에 출가자에게 이 계를
1593년 조선 선조가 서산대사에게 하사한 청옥발우 3합. “부처님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 7일 동안 가부좌를 한 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나서야 선정에서 깨어났다. 그때 그 곁을 지나던 상인 두 사람이 미숫가루를 공양물로 올리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의 여러 부처님들이 그릇에 음식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고, 부처님의 생각을 안 사천왕들이 각기 하나씩의 돌 그릇을 바치자 부처님은 4개의 그릇을 하나로 합쳐 음식물을 받았다.”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권 하에 나오는 부처님의 성도 후 첫 공양모습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사용한 최초의 발우(鉢盂) 형태는 석발(石鉢)이 되는 셈이다. 『사분율』에 따르면 부처님은 비구들이 어떤 발우를 가져야 하느냐고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서울여대 김미자 교수의 복식고증을 거쳐 디지털 복원전문가 박진호씨와 함께 추정 복원한 혜초 인물도.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고단한 여정을 마다 않고 떠나는 인도로의 성지순례. 지금은 교통편이나 현지에서의 숙식 등 순례 여건이 좋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나,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리던 옛 시절에 지극히 제한된 순례 길을 따라 부처의 체취를 찾아 나서는 일은 목숨을 건 구법의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천축으로 순례를 다녀온 후 『법현전(法顯傳)』을 남겨 당시의 인도 모습을 세세히 알린 5세기 초 중국 고승 법현(法顯)은 인도로 가는 교통로였던 실크로드를 “사막의 수많은 귀신들과 뜨거운 돌개바람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지금의 한국불교 선원문화는 성철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로 꽃을 피우게 됐다. 문경 봉암사 전경. 사진=선원총람 중국의 『대동선교고』「사조명」에 “먼 나라의 고사와 이역의 고인들이 험난한 길을 무릅쓰고 법랑 스님이 있는 곳에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법(法)의 깊이가 남달랐던 법랑(法郞·632∼?)은 중국 선종 제4조 도신의 법을 이어받아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은 탓에 전법활동을 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법랑이 세간에서의 전법의지를 잠시 접고 호거산에 들어가 지혜의 등불을 전하는데 전념하던 어느 날, 신행(信行·704∼779)이라는 비구가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제자의 됨됨이를 알아본 법랑은 신행이 문하에든지 7일도 채 되지 않아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이차돈 표준 영정(위)과 고려 말 나옹혜근의 진영.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흰 젖이 한길이나 솟구치니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땅이 뒤흔들렸다.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동물과 식물이 동요하였다.길에서 곡소리가 이어졌고우물과 방앗간에서 인적이 끊겼다.”- 헌덕왕 9년(817) 세운 이차돈 순교비에서 - 신라의 스물 세 번째 임금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지 14년(527)째인 어느날 양나라 무제가 향을 보내왔다.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기에 향의 쓰임새를 모르던 법흥왕은 군신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었으나, 그 누구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모두가 고개만 갸웃거리던 차에 미관말직의 사인(舍人)
우리나라에서 상원사와 더불어 가장 먼저 지어진 통도사 적멸보궁과 금강계단. 불상을 봉안하는 대신 창 밖으로 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한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이 땅의 불국토를 염원하며 처음으로 적멸보궁을 지은 자장율사는 통도사에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추던가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널리 중생의 예불 쉬지 않게 하리”라는 불탑게(佛塔偈)를 남겨 훗날에도 진신사리를 예경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임을 예언했다. 신라시대 왕손인 무림공 김씨의 아들 김선종은 사람들을 두루 아우르는 덕을 지니고 있어 많은 이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때문에 선덕여왕이 조정에 등용시켜 국사를 논할 인물로 꼽았으
사리(舍利)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에는 대부분 사리기(舍利器)나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등의 표현이 함께 등장한다. 여기서 사리기는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담는 그릇을 말하고, 사리기를 비롯해 각종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사리장엄구라고 한다. 사리기는 일반적으로 금, 은, 동, 철, 나무, 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든다. 그리고 사리를 정성껏 봉안했기 때문에 밖(외함)에서 안(내함)으로 갈수록 귀한 재질을 이용했고 3중 또는 4중, 많게는 7중으로 여러 겹의 사리기를 이용해 사리를 봉안했다. 이렇게 사리기에 봉안한 사리는 탑을 세워 탑 안에 안치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리기는 탑의 어느 부분에 안치했을까. 인도에서는 내부까지 이어진 찰주 아래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했고, 중국에서는 목탑의 경우 심주(心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자장율사 이운 진신사리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스승의 유훈에 따라 다비를 했고, 이때 다량의 유골을 수습했다. 이 유골이 바로 불교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리이며, 당시 8개 부족의 부족민들은 진리를 설파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사리 쟁탈전(?)에 나섰다. 자비사상과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놓고 전쟁이라도 일어날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 연출된 자체가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저마다 부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스승의 흔적이라도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다. 이때 드로나(Drona)라고 하는 스님이 이들 8개 부족간 다툼을 말릴 중재자를 자
사경의 종류는 재료, 종이 등에 따라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재료에 따라서 묵서, 금니, 은니, 자혈로 구분하고 경면주사와 송화가루, 황토 등도 사용했다. 묵서(墨書)는 먹물을 이용하는 것으로 백지에 묵서로 서사했을 경우 이를 백지묵서, 황지에 묵서로 서사했을 때는 황지묵서라고 한다. 이어 금니(金泥)는 금을 가루로 만들어 아교를 비롯한 접착제에 개어 붓으로 서사한 사경을 이르는 말이다. 고려시대 목판 고려대장경에 앞서 금자대장경이 있었다고 할 만큼 발달했었다. 이는 경전을 최상으로 장엄하고자 하는 법사리 신앙에서 비롯됐다. 은니(銀泥) 역시 금니와 마찬가지로 장엄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백색이기 때문에 백지보다는 주로 염색한 종이에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갈색 염색지인 상지(橡紙)와 감람색 염색지인 감
700년대 초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제126호. “무수한 세월동안 물질로 보시한 공덕보다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 공덕이 수승하다.”『금강경 지경공덕분』“부처님께서는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쓰기를 수미산만큼 하였다.”『화엄경』“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 해설하면 대원을 성취한다.”『법화경 법사공덕품』지금까지 전해지는 많은 경전에서는 사경(寫經)을 구도와 신심의 극치로 가르치며 그 공덕을 이렇듯 높이 찬탄하고 있다. 사경은 4세기 말 무렵부터 인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가르침을 옮겨 쓰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사경이 시작됐을 당시에 경전을 옮
현재 한국불교에서 옛 전통강원의 학제와 교육내용을 따르고 있는 대표적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이다. 조계종은 전통강원을 ‘승가대학’으로 이름 짓고 있으며 사미·사미니에게 비구·비구니로서의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고 인천의 사표로서 지혜와 원력을 함양하게 하기 위한 기본교육기관으로 삼고 있다. 승가대학은 출가자들이 승려로서 가져야 할 기본소양 및 위의 그리고 부처님 경전을 수학하는 데 중점을 둔 교육기관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찰에서 집단적으로 수학하는 체제를 갖춰 승려생활에서의 위의의 중요성을 더욱 중요시 여기고 예불·간경·소임·대인관계·참선을 통해 세속에서의 습관과 생각을 끊고 출가사문의 생활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교육법을 두어 행자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사미·사미니계를 받은
고려시대 강원의 존재를 나타낸 법주사 자정국존비. 한 사람의 인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가지 꼽으라면 대부분 주저 없이 교육을 첫 번째로 선택할 것이다. 교육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느냐가 곧바로 개인의 인격형성과 사고 그리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데서 유래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이 지금까지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 우리나라의 지나친 교육열에서 보듯, 때론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오히려 개인의 인성을 해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교육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이렇듯 뜨거운 상황인
한국불교 첫 국사인 혜거 스님의 부도.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옛 통치자들은 고승들을 스승으로 삼아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자문을 받으며 국가를 통치함으로써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최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직사회의 종교편향이 이어지면서 ‘숭기억불(개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한다는 뜻)’의 시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가 분열되고 있는 양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통치자가 고승을 스승으로 섬기며 국정을 운영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치자, 즉 임금이 스승으로 삼은 고승을 역사에서는 국사(國師)라고 한다. 국사는 중국 북제에서 550년 법상(法常)이 제왕의 국사가 된 것이 시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고려
현존 최고 오대산 상원사동종. 새벽 산사의 정적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서원이 담겨있다. 따라서 범종(梵鐘) 소리는 모든 중생의 각성을 촉구하는 부처님의 음성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종소리는 지옥에서의 고통을 쉬게 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며, 꿈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지혜의 울림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사찰에서 듣는 범종 소리가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의 사자후와 다름없으므로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흔히 사찰에서 대중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할 때나 의식을 행할 때, 그리고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법구로 소개되는
(사진 위부터)도의 선사 부도로 추정되는 진전사터 부도. 844년 세워진 염거화상탑(사진 가운데). 가장 수려한 작품으로 꼽히는 철감선사탑. 부도(浮屠)란 스님들의 다비장을 치르고 난 후에 수습한 사리를 안치하는 묘의 일종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과 구분하기 위해 부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부도 가운데 탑의 형식을 취한 것을 부도탑이라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석조물과 달리 대부분 부도에 따르는 탑비가 건립돼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당시의 사회·문화상까지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게 특징이다. 이 부도는 단순하게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묘에 머물지 않는다.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세계를 형상화했기에 부도가 만들어진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교적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