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생각-바른생각 거리는 과연 얼마중생-부처 나누면 어디서 무엇 얻나 모든 사물 존재는 결국은 이것과 저것의 사이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듯이,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밤이 있어서 낮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으로 가려지면 밝음이 사라져 이 둘의 사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 저쪽의 한쪽은 잊어버린다. 어제는 근년에 보기 드문 눈이 내렸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버려 어제 낮까지 존재했던 자연초목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니 그 속에 있을 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얀 은빛의 세계에만 감탄을 하고 있다. 순간으로 변한 눈 앞의 모습을 이렇듯이 몰라보는 것은 항시 현물존재의 한 면만을 보라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범상한 이들의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의 탓이다. 이러한 무명이 어찌보면 여러
정치인 많아도 바른 정치인은 없는 사회자신 이름 걸맞게 실천하는지 성찰해야 사람살이에는 항시 상대가 있어야 하니, 그 상대에 따라 주어지는 이름이 다르고 그 이름에 따라 실행해야 할 몫이 뒤따른다. 이 주어지는 몫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사람살이의 바른 행위이다. 이를 일러 사회생활의 윤리 질서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몫을 충실히 이행할 때의 마음 자세는 항시 내가 이 행위 질서에 중심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니, 그런 마음 자세는 어디에서나 주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실현할 수가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는 이름은 있으되, 그 이름에 걸맞는 몫을 바르게 실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정치인은 많아도 바른 정치는 보기 힘들다거나, 사회 각층에 지도자는 많으나 지도를
조선 승-유가 사심없는 사귐서세계와 어울리는 지혜를 배워야 어떠한 사물을 살피든지 한 면만을 보다 보면 한 면은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범인들의 안목이다. 마치 양지쪽만 바라보다 보면 추위에 떨고 있는 음지를 잊는 것이나 같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보는 시각도 그렇다. 과거 조선조의 사회는 유교를 국시로 해서 불교의 학대가 심했다 하여 유가의 선비와 불가의 스님들은 마치 양지 음지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었던 사회로 치부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잘 들여다 보면 서로의 어울림이 돈독하여 동도자의 지기보다 더 가까운 사이도 많았다. 오늘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시인이요 고관의 벼슬을 지낸 이안눌(李安訥, 호 동악 東岳)이라는 분과 당시의 스님들이 격의 없는 어울림을 들여다보려 한다. 동악선생은
절망 빠진 사람에 희망 되어준 化成대중-나라 이끄는 도사도 방편 찾아야 사람은 혼자는 못 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울림 속으로 묻어들게 마련이다. 태어나는 순간 어미 자식의 관계가 자연스러이 아비 자식으로 이어지면서 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여 형제자매의 횡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정의 울타리를 삶의 방편을 찾으면서 불가불 벗어나야 하니, 이것이 사회라는 모임이요, 이를 공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면 나라요 세계라는 무한의 공간의 된다. 이러한 모임의 공간이 크든 작든 거기에는 이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이 자동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어른을 집에서는 집의 어른이라 하여 ‘가장’이라 하니, 이 가장의 구실을 아버지가 맡게 마련이다. 일정한 인위적 모임에는 모임의 어른이니 ‘회장’이라 하게 되고
남김 없음의 無餘가 곧 열반버리는 수행이 잘살기 수행 며칠 전에 추석 한가위 이야기를 했는데, 벌써 단풍잎을 감상한다 하고, 그 잎이 뜰에 덜어져 아침저녁으로 빗자루를 들게 한다. 이를 두고 늘 세월이 무상하다 하지만 사실은 무상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정상적 질서의 순환이다. 나무들은 이제 한 해의 마무리를 정상적 순환의 질서에 따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가지를 풍성하게 덮고 있던 잎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있다. 서리가 짙고 나아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잎은 남김 없이 근원의 땅으로 돌아가 다음해의 움트는 숨 고르기를 할 것이다. 이 남김 없음의 무여(無餘)가 바로 열반이다. 사람살이의 주기는 네 계절의 한 해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라는 긴 거리를 놓고 일생의 주기로 삼기에 항시 이 삶과
한가위-섣달그믐 달 달리 보이니일천강에 비친 달은 같아 보일까 삶을 에워싼 주변 여건을 짧은 시간 단위로 잘라 놓고 보면 항상 변화무쌍하지만, 긴 시간으로 확장해 놓으면 항상 변화가 없이 일정하다. 낮의 해를 기준하면 하루의 변화가 여전히 일정하지만, 밤의 달을 기준하면 하루하루의 변화가 있어 보름을 주기로 기울거나 차는 변화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을 한해라는 360일로 보면 변화가 아닌 일정한 반복이다. 사람살이의 낭만이나 풍류로 본다면, 짧은 변화가 없는 해의 대낮보다는 기울고 차는 수시의 변화가 있으면서 밝음과 어둠의 빛의 작용이 있는 달이 사람의 동물적 본능에 더 자극을 주는 것 같다. 낮이라는 밝음의 드러남보다는 밤이라는 가림이 숨어 있는 정서에 촉촉한 윤기를 주어 점감의 싹을 키우는 것 같다.
‘크다·작다’ ‘길다·짧다’는 상대적 개념얽매임 없이 모으고 흩어놓는 지혜 배워야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 시간의 흐름은 길다거나 짧다는 말로 거리를 재려 하고, 공간은 크다 작다는 말로 부피를 따지려 한다. 그러나 이 단위의 측량적 언어는 항상 불확실한 것이다. 길다 크다 함이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그 말의 정확도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영겁이라거나 3세라 하면 대단히 긴 시간으로 인식되지만, 영겁에다 3세를 견주어 놓으면 3세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대천세계니 수미산이니 하면 매우 큰 부피이지만, 대천세계에다 수미산을 견주면 매우 작은 부피가 된다. 이렇듯 모든 존재의 단위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사물에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며
12년째 떡볶이로 군포교에 앞장서고 있는 청산회 회원들. “아~매워, 좀 더 주세요.”“아들!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 8월 27일 일요일 아침 9시 30분 청산회 회원 8명이 경기도 양주시 9200부대 호국 백호사를 찾았다. 청산회가 매월 넷째주 일요일 호국 백호사를 찾아 장병들에게 자장면, 순대, 쫄면 등 먹을거리 공양을 해온 것도 벌써 12년 째. 당시 상임 군법사 하나 없는 백호사에 청산회가 눈을 돌린 것은 자비의 집에서 만난 한 보살과의 인연에 의해서였다. 처음에는 변변한 방석도 없이 예불을 올리는 장병들에게 방석을 만들어 주다가 이제는 정기적으로 백호사를 찾아 음식을 해주니 군종병은 물론 장병들이 아예 ‘엄마’라고 부른다. 파, 떡볶이 떡, 고추장,
사람의 삶은 인연의 어울림개체와 전체 조화 지향해야 사람살이는 서로의 어울림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이라는 존재만을 나타낼 때는 나 홀로로도 충분하겠지만 살이라는 삶을 누리게 하려면 최소한의 상대인 1대1로 시작되는 것이다. 우선 태어남 자체가 어미 자식이라는 상대가 있어 이루어진 것이니, 태어난 개체의 존재로서의 나 자신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몸을 나누어 주신 어머니가 있어 나의 존재가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를 일러 인연 따라 존재한다는 것이리라. 법성게에서 ‘제 본성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不守自性隨緣成)’라 함이 바로 이를 말함이다. 나라는 것을 고집할 수가 없다. 나의 존재가 인정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라는 상대자인 남의 타성(他性)이 있어 이루어졌으니, 이 뒤로 이어지는 삶이 나라
시간은 기준의 차이일 뿐 변함없어순간을 성실히 사는 것이 참 지혜 모든 사물이 존재하려면 공간과 시간의 두 축이 맞물려야 형성된다. 하루의 삶에도 이 두 축의 시간 공간이 항시 변하면서 나의 존재도 거기에 상응하는 질적 변화를 가져 온다. 나라는 존재의 명분이나 직분이 이 시공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고 결정된 명분이나 직분에 적의한 행위를 함이 가치 있는 삶이다. 지난 번에 공간의 크고 작음이 보기나름으로 동일하다는 생각을 서술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시간의 평등을 생각해 보자. 예전과 지금, 어제와 오늘 등으로 시간의 흐름을 재지만 이는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의 차이이지, 시간 그 자체는 항시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시간의 흐름에다 잣대를 그어 놓고 어제니 오늘이니 하여 자신을 그 시간 위에 싣고
오만은 초보적 진리도 모르는 데서 비롯 모든 존재에 똑같은 생명존중 인정돼야 모든 사물존재의 기준에는 절대적 척도가 없다. 크다 작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추하다 함이 상대적 처지에 따른 비교적 척도는 되지만, 그 당체로서는 대소 미추의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작아 보이는 것은 큰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이지 나 홀로의 처지에서야 작고 큼의 척도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산이 높다 함이야 골짜기나 평지에서 보는 이야기이지 허공에서 내려다보면 산은 낮다 함이 오히려 정확한 계척의 용어이다.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침이면 뒷산을 오르내린다. 조그마한 동산이지만 때로 숨을 헐떡이는 경우도 있으니 나로서는 높다는 말을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뒤따르던 청년이 앞질러 뛰는 것을 보면 저 청년은
우주 공간 물량의 증감 없겠으나 편중되는 양 정상 벗어나면 재앙 모든 사물 존재는 주어진 그대로가 이미 그 자체로 만족할 만한 질과 양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이 몸둥이 하나도 주어진 그대로가 분에 맞는 것 같다. 위로 들어간 음식물이 거의 소진되면 배가 고프다 하여 먹을 것을 찾게 되고, 먹을 것을 찾아 맛이 있다 하여 지나치게 먹으면 배가 부르다 못해 거북하여 움직임이 둔해 진다. 여위었다 살쪘다 하는 표현 자체가 이미 정해진 어떤 기준의 양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표현이니, 이 표현 이전에 이미 누구에게나 맞는 질양의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많다 적다 크다 작다의 계량적 언어의 정확한 척도는 주어진 사물의 존재적 기능이나 주변적 상황에 의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가변적 계량의 척도이지 절대적 척도
십계-십선계 손바닥 뒤집기에 불과금기어보다 긍정적 언어 권장해야 평생동안을 어설프게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 물러나 보니, 거울에 비친 늙은 모습이 보기 싫듯이 부끄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름하여 선생이라 하니 남보다 앞서가는 것같은 직업적 명칭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항상 남의 뒤를 따라 흉내내다 만 꼴이다. 내가 가르쳤다는 내용이 내 스스로의 말은 한 마디도 없지 않았던가. 책으로 전해지는 성현의 말씀이거나, 앞선 이의 선각적 의견에 동조하면서, 마치 나의 말인 듯이 가르쳤으니 위선이나 위장치고도 이보다 더한 일은 없었다. 그러면서 선생이 학생에게 지시하는 언어 중에 긍정적 권장의 어투보다, 부정적 금기의 어휘가 많았던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해 본 적도 더러 있다. 교육의 지시어에는 왜 그리
부모를 부처님처럼 모시는게 불교부모의 은혜는 수미산보다도 높아5월은 가정의 달이고, 6월은 보은의 달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한 번 더 되돌아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설정한 시간 단위이다. 의미 있는 두달을 보내며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결국은 부모이다. 윤리적 규정을 어떤 시각으로 하든지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가 없었다면 나의 존재가 없으니, 이 두달을 보내며 부모의 은혜에 대하여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부모를 위시로 하는 사람살이의 규정을 윤리라 하고, 이 윤리의 질서를 정의하는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이 유교의 교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래서 유가에서 불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첫째 이유가 스님들의 출가로 부자 관계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청결을
부처는 覺人이 아니라 覺者깨달음은 사람에 한정되지 않아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게 마련이고 이름이 있어 사물 각자의 기능을 짐작하게 한다. 대체 “부처”라는 이름은 무엇이며 “불(佛)”이라 함은 무엇인가. 너무나 보편화 되어 있고 누구나 쉽게 부르는 이름이기에 새삼스러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의심을 가져보지 않지만, 막상 무엇이라고 말하려 하니 명확한 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불(佛)의 원래의 말은 다 아다시피 인도의 말로 불타(佛陀)인데, 동방으로 건너오면서 번역되어 각자(覺者)라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佛)로 일반화한 것은 원어인 범어(梵語)가 더 의미 있게 생각이 되어 불타(佛陀)를 줄여서 불(佛)로만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동방의 언어문자인 한자로 번역하면서 ‘각인(覺人
기업은행이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이사장 각현 스님)과 손잡고 사용금액의 일부를 노인복지 기금으로 적립하는 새로운 개념의 신용카드를 발급한다. 연꽃마을과 기업은행은 5월 1일 주유 할인 등 다양한 혜택과 사용금액의 0.5%를 독거노인 등을 위한 사회복지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는 연꽃마을 법인카드와 개인 BC카드, 체크카드 발행을 합의했다. 연꽃마을 신용카드 발행은 일반인들이 소외받는 독거노인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써 사회공헌 활동의 새로운 모델로 평가된다. 각현 스님은 “연꽃마을 BC카드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손쉽게 어려운 노인들을 도울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라며 사부대중의 많은 관심을 당부했다. 한편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과 기업은행은 5월 26일 법인사무국
가정은 인간질서의 종합적 훈련장부모답고 자식다운게 세간의 불법 진달래 철쭉꽃이 한창이더니 송화 가루 날려 산길이 노랗게 물들었다. 곧 아카시아 꽃이 피어 향기를 날리면 더위를 식히려고 녹음을 찾게 된다. 신록이라는 말이 어제였는데 이제는 녹음으로 변해 버리더니 어느새 5월의 마지막에 서 있다. 이런 계절의 푸르름에 우리의 마음도 저절로 설렌다. 이렇게 흥분되는 마음을 밖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본 공간인 가정으로 안아 들여 푸른 희망을 간직해 보라는 것이 어쩌면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한 이유가 아닐까. 가정, 이것이 바로 사람살이의 출발점이다. 가정은 인간질서 기본 윤리의 최초 단위이자 무한대로 확산될 가능성을 포용한 극소 극대의 핵심적 공간이다. 부부의 대칭으로 시작된 가정에서 자식이 태어남
삶은 너와 나의 대립-어울림으로 부터 시작‘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이타행의 다른 명칭 사람살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이다. 내가 있어 네가 있다. 이 나와 너의 사이가 바로 인간이란 말이고, 그래서 인간이란 말이 세상과 동의어로 쓰여 왔던 것이다. 이 사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어울림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언어이다. A와 B가 있어 만나려는 찰나가 바로 사이이다. 어머니 뱃속의 열 달 동안은 사이가 없는 동체였지만, 태어나는 순간 바로 나와 너의 상대적 존재로 변하면서 둘의 관계에 사이가 생긴다. 이것이 사람살이의 인간적 어울림의 시작이요, 이 사이의 무한적 확대가 세계가 아닐까. 따라서 사람살이의 시작이 나의 출생의 순간부터이고, 이 순간부터 어미 자식이라는 나와 너의 대립적 어울림이 이루어지고, 이
평등의 남용이 무질서로 이어져참다운 평등원리 깨치면 곧 부처현대의 사회를 규정함에 있어서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이 민주주의요 민주주의의 기본적 요소는 그 구성원 하나 하나의 무게가 똑 같다는 평등일 것이다.이 평등을 권리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나는 법 이론에 문외한이기에), 아무튼 이 권리를 실천함에 있어서 누구나의 행위에 자유가 있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그래서 현사회에서 이 ‘평등’과 ‘자유’만큼 애용되는 단어도 없는 듯하다.그러나 이 평등의 적용에 있어 마구잡이로 남용하다 보니, 오히려 무질서에 가까운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듯한 감이 있어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쉽게 말하여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함은 개개인의 인격의 평등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이의 적용을 사회 조직의 구
목련은 목련, 진달래는 진달래자연은 여법하기에 늘 아름답다계절의 질서란 변하면서도 변함이 없다. 이것이 어찌 계절의 질서 만이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순간도 있는 그대로의 것이 없이 항시 변하고 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진화한다 할 것이다. 진화란 글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변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큰 틀의 자연에다 기준을 두고 본다면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담 밖의 개나리가 노랗게 수를 놓고 있다. 며칠 전만해도 삭막했던 주위가 화사하여 늙은이의 마음까지도 설레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유혹에 이끌린다. 그런데 금년에는 이상한 현상에 새삼 놀라게 한다. 갖가지의 봄꽃이 나름대로 피는 시기의 순서가 있는데, 금년에는 이 순서가 심하게 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