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정한 진리 잣대는 상대적두 끝에 매달지 말고 중도 지켜야 사물의 모든 존재는 그 개체로서는 절대자이지만, 주변의 존재와 맞서게 되면 절대가 아닌 상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의의를 인식하려면 상대와 맞서야 정의가 이루어지지 홀로의 절대에서는 어떤 정의도 성립될 수가 없다.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되는 ‘선’도 ‘악’이라는 상대적 정의가 있어서 그 의의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윤리를 정리하기에 평생을 바친 공자도 “선과 악이 다 나의 스승이다”했는지 모르겠다. 어찌 삶의 가치적 정의만이 그러랴. 삼라만상의 존재 그 자체가 상대적이다. “골이 깊어야 산이 높다”는 말이 있다. 골은 되도록 아래로 뚫리는 것이요, 산은 되도록 위로 오르는 것이니, 산이 가만히 있어도 골이 깊어지면 그
무더위는 물+더위의 상극적 모순 합성어모순을 통해 모순 넘어선 진리 자리 터득 20여일을 나라 밖으로 노닐다 어제서야 돌와왔더니, 장마가 이어지면서 기온이 올라가 여독을 푸는데에 힘이 든다. 더위가 그냥 더운 것이 아니라 무덥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캐나다이었는데 거기에도 기온은 25-6도를 넘나들지만 더위를 느끼지 못하였으니, 습기가 전혀 없는 건조한 기온이기 때문에 땀이 나지를 않아 며칠이 지나도 속옷을 갈아 입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곧 날씨에 무더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연의 진리란 묘한 것이다. 열기로 대표될 더위라 함이 냉기로 대표되는 물과 만나야 실제로 더위를 느낀다는 상극적 모순의 합일을 여기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말의 오묘한
외형적 차이로 사물 판단하는 게 중생하나 가운데 일체 있음이 진리의 세계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외형으로만 본다면 각기 다 다른 질량을 갖고 있지만, 존재할 수 있는 원소적 원리로 본다면 대소경중의 질량이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외형으로만 사물을 보기 때문에 대소경중의 차이에서 그 내면의 원소적 질량까지도 작다고 무시하거나 크다고 경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삼킨다(一微塵中含十方)’는 일승적 사상으로 본다면 모든 사물의 질량에는 대소경중의 차이가 없다. 그러기에 ‘풀씨에도 수미산이 들어 있다(芥子納須彌)’는 진리의 표현이 있지만, 외형적 사물 인식에만 사로잡힌 우리들 범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모순적인 언어가 없다. 작음의 극소치로 상징화한 풀씨의 크기에 극대치로 상징화한 수
육체 고와도 마음작용 없으면 살덩어리혜안국사처럼 마음 잘 열고 닫음이 관건 사람의 존재가 너와 남이 있어서 형성되듯이, 모든사물의 존재는 서로의 대칭 속에서 인식되게 되는 것이다. 어둠의 혼돈인 무극의 상황에서 분화의 운동이 시작되는 태극으로 진화하면서 음양이라는 어둠과 밝음의 두 갈래로 나뉘에 물질의 생성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물 존재의 대칭적 구조인 것이다. 나라는 개체의 존재가 인식되려면 너라는 대칭이 있어야 되면서, 나의 개체 하나만을 인식하려 해도 대칭적 구조를 외면하고는 설명될 수가 없다. 육체의 살덩이만으로도 나를 인식할 수 있지만, 인식한다는 이 작용이 없이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으니 인식이라는 이 작용이 결국은 육체의 살덩이와 맞서게 된다. 이럴 때 육체와 맞서는 인식 작용을
부부애를 別로 규정함은 ‘존경’ 전제한 것광덕·엄장 설화는 ‘정신적 사랑’ 본보기 사람살이란 만남으로 시작된다. 한 생명의 태어남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만남의 순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만남이 없으면 생명의 존재가 형성되지 않는다. 존재의 원리를 인연이라 설명하는 불교적 정의에 머리 숙여짐은 이러한 원초적 지침부터가 틈새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모 자식의 존재적 결정이 부부라는 남녀의 결합을 전제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으니, 인간 윤리의 원초를 부부로 보는 유교적 윤리 규정은 현실적 삶의 근간을 명확히 한 것이어서 역시 시공을 초월하도록 영원한 진리이다. 이러한 만남의 끌림이 되는 힘의 인력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인간적 지각의 예지일 것이고, 이 지각의 예지가 너와 나의 만남
세간법 포함한 일체가 모두 불법법대로 살아가는 게 참다운 불자 삼라만상의 자연 물상은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잡 생각을 조금만 멈추고 이 자연을 관찰하면 저절로 감탄할 수 밖에 었다. 사람의 배움이나 지식이란 이 정연한 자연 사물의 원리를 알아 따르려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문명이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정도의 발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존재하는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여 순응하는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놀라운 새 지식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물 존재의 이치를 규명한 것이지, 이 존재를 부정하거나 초월하는 부존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존재의 사실을 법이라 한다. 따라서 불교 그 자체로서 법이다
사명당 지혜-용기로 전란 마무리스님 가르침 양국화해에 도움 되길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태평양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위치이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내룡(來龍)인 등줄기의 산세는 대륙을 등에 업고 있어, 그야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맛있는 풀잎에 벌레가 많이 몰리듯, 지리적 조건이 이렇듯 아름답기에 과거의 역사 속에는 우리 강토를 침식하려는 벌레들의 군집(群集)이 잦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했던 것이 1592년(선조25)의 임진왜란이었을 것이다. 일본열도는 지형적으로 대양 속에 떠 있으면서 아세아대륙 쪽으로 굽어 있어 항시 대륙을 흠모하는 형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국토가 버티고 있어 넘보기 어려운 풍수지리이다. 이를 항시 못마땅해 하다가, 대륙으로
상업화에 忍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돼인욕은 서로 화합케하는 공존의 원리 우리의 문화는 농경의 문화이다. 네 계절이 분명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문화이다.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가꾸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여 겨울에 한가로이 지냈다. 이러한 순환적 주기 속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품성이 이루어져 참는 미덕이 형성되었다. 그러함에도 수양의 한 방편으로 항시 ‘참아라’ 하고 가르쳐 왔다. 여인의 삶에 어려움이 시집이라는 남의 집을 내 집으로 삼고 사는 일이다. 그러기에 시집보내는 어머니는 ‘참을 인(忍)’자 셋만 가지면 무엇이든 이겨낼 것이라고 타일러 보낸다. 농경의 사회에서는 참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아무리 조급히 굴어도 봄날에 뿌린 씨앗은 여름 지나 가을이라야 수확할 수가 있고
척불의 조선도 민족 기저에 불교 흘러 심청전은 유불공조 조화된 불후 고전 윤리 질서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자식이 어버이에 대한 효도일 것이니, 이는 시공이나 이념이나 종교적 신앙을 초월하여 중요시된다. 그러나 사람살이의 윤리에는 부부가 으뜸이 된다. 부부가 있어야 사람살이의 집단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인상을 받아, 여타 종교의 교시에는 효도를 소홀히 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조에는 유교가 사회질서의 틀을 지배하니, 불교는 자연 뒤로 밀려나게 되고, 충효와 같은 윤리 질서가 불교에는 중요시되지 않는 것 같은 오해를 하게도 된다. 고전 소설의 으뜸으로 치부해도 손색이 없을 〈심청전〉의 주제는 효이다. 이 소설이 조선조의 작품이니, 이것이 바로 유교적 교리가 뒷받침이 되어 형성된
안팎 노력 있어야 새 생명이 탄생하듯 배우려는 열정 있을 때 가르침도 의미 계절의 오고감에는 어김 없는 순환의 마디가 있어 무한한 시간 속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24절기로 춘분이 지난 요즘의 산과 들에는 새싹이나 꽃이 피려고 들석거리는 느낌이다. 진달래가 피었는가 하면 목련이 피어 있고 개나리는 노란 봉오리를 내보이고 있다. 벚나무의 끝가지에는 터질 것같이 부푸른 꽃봉오리가 탐스럽다. 이런 싱그러운 주변 속에서 거니는 아침의 산책길은 저절로 흥겹다.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아름답고 오묘하다. 단단한 나무 가지를 뚫고 올라오는 꽃봉오리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초목도 생물이니 생물의 생명적 힘이 솟아 오름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생명의 힘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도 없는데 어느 사이 초목의 외형을 변
집을 짓되 집에서 벗어나는 누에 닮아야지식은 지혜로 전환될 때 참다운 가치 시간의 흐름 속에 마디를 정해 놓고 스스로 희비에 엇갈리는 것이 사람살이가 아닌가. 한 해라는 마디를 정해 놓고 새 해가 되었다고 좋아하는가 하면, 좋아하는 시간의 몇 분 전을 섣달그믐이라 하여 아쉬워했다. 그런 아쉬움과 희망을 겪은 지 엊그제인데, 봄이 왔다 하여 여러 가지 절차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배움이라는 일상적 행위에도 어떤 제도적 마디를 정해 놓고, 졸업이다 입학이다 하여 분주한 요즘이다. 배움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입학이라 하여 축하하고, 그 제도를 마치고 나오는 것을 졸업이라 하여 또 경하한다. 그렇다면 입학과 졸업이라는 제도적 시간 거리에서 얼마만큼 성숙되어 경하를 받는 것일까. 과연 성숙되어진 것
기쁨 있으면 슬픔 있는 게 이치인고의 참음이 수행 정진의 길 사람의 삶이란 시간과 공간이 맞물린 교차점의 이동이다. 이는 기하학의 평면적 이동과 같은 것이다. 곧 시간이 y대라 하면 공간이 x축인 셈이다. 이 교차점을 따라 이동되는 것이 하루하루의 생활이요 이것이 누적되어 하루, 한 달, 한 해라는 시간의 단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교차점이 바로 삶의 좌표가 되고 이 좌표의 이동을 선으로 그으면 곡선을 이루게 된다. 이 삶의 곡선이 바로 삶의 발자취이다. 엊그제는 설이라 하여 또 하나의 시간 단위에 큰 점을 찍었다. 설이라는 시간의 앞과 뒤도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일초 일분의 찰나적 경과임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여기에 큰 의미를 두어 기뻐하기도 서글퍼하기도 한다. 자라나는 어린 이에게는 한 해의 보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