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에서 경전, 선, 불교미술, 비교종교학, 현장수업인 문화유적답사 등 불교분야를 폭넓게 알게 했다. 특히 현장수업으로 야외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을 다녀온 이후 불교유적의 매력을 느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지도교수와 ‘당간지주문화유적답사반’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14년째 문화유적답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대부분은 불교유적인데 국보와 보물인 탑, 불상, 부도 등이 벌판에 혹은 산속 언저리에 덩그러니 놓였고 관심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매월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오면 홈페이지에 사진과 관련 내용을 기행문 형식으로
“너는 내 운명이다.”언니 따라 처음 갔던 절에서학생회 활동하며 공부에 갈증포교사 제도 알고 난 뒤 감격언니를 따라 처음 갔던 절은 비탈진 오솔길 따라 한참 오른 뒤에 일주문이 보였던 산사였다. 일주문 넘어서기가 망설여졌던 그 절의 불교학생회에 가입했고, 매주 토요일 방과 후 어김없이 법회에 참가했고, 고등부 3년을 개근했다. 2학년 때는 부회장을 맡아 법우들을 챙기며 법당을 정리정돈하고 법회를 진행했다.우리 절 학생회에는 지도스님도 지도법사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들은 학생회 하나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절을 수소문했지만
필연으로 받아들인 북한이탈주민 포교는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 일요법회를 마친 뒤였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모두 점심공양하러 가고, 평소 같으면 포교사들도 서둘러 종교활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서둘러 귀가 길에 올라야만 고속도로 정체현상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북한이탈주민 한 분이 남아서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발길을 붙잡았다. 모두 법당을 나가고 포교사만 남은 상태에서 본인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데 그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같은 처지의 북한이탈주민과 오히려 개인적으로 답답한
새내기 불자는 목마름을 해결하고 싶었다. 포교사 품수 뒤 하나원에 배정열악한 환경 속에 10여년 활동혼자 법회 진행한 경험 큰 계기12년 전 어느 봄이었다. 당시 재적사찰이던 광명 금강정사에는 불교대학이 없었다. 직장 인근 강남 봉은사에서 불교대학과 인연이 닿았다. 불교기본과정을 마친 직후라 교리에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봉은사 불교대학 입학은 필연이었다. 1년 과정을 마칠 즈음, 포교사고시 제도를 알았고 시중 서점에 들러 서적을 구입해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불교 전반에 걸쳐 골고루 문제가 출제되기에
책임감과 의무감이 생겼다. 교도소 봉사회 결성 나눔 앞장부족한 자신에게 회의감 들 땐성철 스님 법문 떠올리며 발심‘여주교도소 사랑(나눔)봉사회’가 결성된 후에는 직원들이 매달 회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소규모 모임일 때는 노력봉사만 했지만 달라졌다. 봉사회가 발족된 뒤 노력봉사는 물론 독거노인과 형편이 어려운 다문화가정 등 소외이웃에 정기적 후원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급식비와 장학금도 지원하게 됐다. ‘여주교도소 사랑(나눔)봉사회’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여주지역 여러 복지단체에서 봉사를 실천하고
수용자들의 눈물은 더 뜨거웠다. 교도소 교도관이자 전문포교사늘 수용자 마음 편안하길 기원‘금강경’ 읽고 면담…사경 권선임사체험을 하면서 참회했다. 입관 전 유언장을 썼고, 수의를 입은 뒤 관에 들어갔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지극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했다. 관에서 수용자들이 나오면 탄생발원문을 읽어주고 두 발을 씻겼다.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 역시 임사체험을 하면서 발원을 더 굳건하게 했다. 관 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이 세상 내가 온 목적은 중생제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난, 현직 여주교
서귀포총괄 군포교팀은 새로 품수 받은 신규팀원을 포함하면 17명이다. 하지만 사정은 다른 포교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참석률이 5~7명 내외로 저조하다. 수병들에게 점심을 직접 만들어 제공하고 법회 진행까지 도맡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인원이다. 어쩌겠는가. 부처님 일인데 불평불만할 시간이 없다 할 뿐이다. 점심식단은 주로 국수와 과일 그리고 튀긴 통닭이나 족발이다. 젊은 수병들 입맛을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고기를 곁들인다. 가끔 피자, 햄버거, 짜장면도 준비한다. 요즘엔 군장병들과 간격을 줄이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김밥재료들을
삶은 정말 예측불가능하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고나 할까. 불연도 정말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최선을 자부한 삶, 병마로 나락비구니스님 따듯한 위로에 감화체험 나누고 싶어 포교사 발원그동안 사찰이라는 도량은 참배나 기도, 정진을 행한다는 의미보다 말 그대로 방문에 그친 어떤 공간에 불과했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구경삼아 아들과 집과 가까운 사찰을 찾아 어설픈 삼배와 함께 예불에 참여하고 점심공양을 하고 오는 게 전부였다. 분명 우리말로 예불의식을 하는데도 참 알아듣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직장에서 23
스님의 끈질긴 설득에 원주불교산악회 인터넷 카페운영을 맡았다. 정상 등반을 못하는 회원들과 절에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하산 시간에 맞춰 1080배 정진, ‘금강경’ 독송 등. 신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원주불교산악회 인연으로 신행어린이청소년팀서 포교에 매진전문포교사·선혜품계도 받아1년 정도 지나 주변 도움을 받아 원주불교대학에 입학했다. 어렵게 시간과 학비를 내서 시작한 공부인 만큼 열과 성을 다했다. 나를 불교로 이끌어 준 것은 내 절망이었고, 신행에 깊이와 배움을 더하고 나누도록 이끌어 준 사람은 원주불교산악회장, 지금은
좌절했고, 주저앉았고, 세상도 바닥으로 꺼졌다. 분하고 억울했고, 초등학교 6학년 딸아이를 양육해야 했고, 신용불량자가 됐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잃어버렸다. 2003년 가을, 난 망했다. 누군가는 모스님이 용하다며 권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보냈다.빚쟁이 신세로 전락한 모진 삶‘금강경’ 독경과 정방사 기도로고통 매듭을 풀며 다시 태어나교수인 지인이 자기가 보던 거라며 책과 테이프를 한 박스 보내 줬다. 손때가 얼룩얼룩 묻은 무비 스님의 ‘금강경’ 초판과 큰스님들 법문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쪽으로
제주 4·3 당시 집안 대가 끊길 위기를 넘겼고, 2대 독자인 유복자로 태어날 수 있었던 일은 부처님 가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견디는 데 익숙했고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으며, 그 이름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아내를 맞이했고, 수행도 늘 같이 했다. 대 끊길 위기 넘기고 가족 이뤄부처님 가피로 행복한 일상 찾아수용자에 불법 전하며 자비 전파3남2녀를 낳아 길렀고, 6명의 손자와 2명의 손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추석 다음 날에는 외손자까지 본가로 찾
제주 4·3이 일어나는 해, 독자였던 아버지는 난리를 피하지 못했다. 인천형무소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됐다. 당시 아버지 나이 19살, 꽃다운 나이에 위태로운 시국이라는 시절인연은 너무 가혹했다. ‘성도’란 이름 의미 찾고자 매진매일 자신 되돌아보며 참회진언불자들 제주불교 피해 기억해야2018년이면 제주 4·3이 70주년이다. 물론 내 나이도 70살이 된다. 반공을 무기 삼았던 지난 정권은 4·3을 ‘빨갱이 집단’으로 낙인찍어 연좌제의 사슬로 동여맸다. 입 밖으로 말 한 마디 못하게 족쇄도 채웠다. 후손들은 신원조회란 이름으
어린이청소년 포교라는 길을 걸으면서 간절히 되묻곤 한다. 자신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청년기, 중장년기를 살고 노년기로 간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이 마음은 아직도 어린이청소년기에 있는 천진불 마음이다. 도대체 변하지 않은 이것은 뭘까. 절하는 할머니 보고 느낀 전율다시 느껴보려 신행활동 매진시장에서 전법하며 행복 발원일 열심히 하고, 기도 잘 하고, 3000배 하고, 등도 꼬박꼬박 달고, 보시하고, 불사 잘 동참하면 신행 잘 하는 줄 알았다.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연꽃이 물에서 나오나 물에 젖지 않는다.”IMF시절 발심으로 인연미술봉사로 시작해 포교일반·전문·선혜품계 품수경전 ‘삿 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ndarica Sutra)’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 ‘묘법연화경’이다.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만 물에 젖지 않는다’는 그 말씀에 담긴 의미를 뒤늦게 알았다. 포교사 활동 10년이 지나서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됐다. 이런 경이로운 삶을 열어준 것이 일반포교사, 전문포교사, 선혜품계로 이어지는 불법의 인연이었다. 아주 사소한 발심이 씨앗이었다. IM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사찰 속 불법 알리고 싶어경전 공부·예불 참여 신행익어가니 해설이 절로 술술처음에는 삶이 힘들고 어려워 삼보에 귀의했다. 기도를 올리고 많은 것을 바라기 위해 절을 찾았지만 상황이 나아진 게 없었다. 다만 그 상황을 바라보고 상대를 대하는 나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한층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관념도 바뀌었으며 그런 부분을 그들 역시 좋아하고 행복해했다.교리와 경전을 공부하고 사시불공에 참여하면서 공덕과 내공이 만만찮게 쌓였다. 범어사를 찾는 많은 신도들이 부처
어김없다. 아내 덕에 금정불교대 입학실낱 같았던 불연 두터워져사찰해설하며 삶을 담금질매주 일요일이면 부산 금정산 자락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등산객, 외국인 방문객과 여러 불자들 그리고 다른 사찰의 신도들이 개인 또는 단체로 조계종 제14교구본사 금정총림 범어사를 찾는다. 사찰순례든 관광이든 제각각 다른 목적으로 범어사에 든다. 이들은 일요일마다 범어사 일주문 앞에 정복을 가지런히 차려 입은 포교사들과 마주한다. 틀림없다. 외호신장처럼 서 있는 이들은 부산지역단 사찰문화해설 금정팀 소속 포교사들이다. 금정팀은 모든 이들에게 산문과 석
“자비몰유적인(慈悲沒有敵人) 지혜불기번뇌(智慧不起煩惱).”갖가지 행사 열정적 지원요양원 자비원 봉사 열심절집서 반출가 경험 환희‘자비에는 적이 없고 지혜에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래도록 몸에 배인 습은 새벽 4시30분 어김없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포교사가 되고나서부터 몸에 밴 습이다. 포교사가 삶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셈이다. 직장에서 정년퇴임 후 회갑지나고 인생 후반부는 그런 습으로 살아오고 있다. 세안 하고 몸을 단정히 한 뒤, 새벽 5시면 서가에 모시고 있는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벽
시작은 개인적인 부분이었다. 독실한 아내의 기도 외호정년퇴임 뒤에 깊은 불연군법당에서 첫 전법 활동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갈 만큼 어렵다고 했던 직장 승진고시를 준비하면서 불연이 손을 내밀었다. 독실한 불자였던 아내는 원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니 무조건 외우라며 수첩 하나를 건넸다. 독송본 ‘금강경’이었다. 승진시험 준비로 바빴지만 틈나는 대로 읽었다.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열심히 읽었다. 이게 도움이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없지만 몇 차례 고배를 마신 뒤 승진시험에 합격해 간부가 됐다. 아내가 기도하러 가는 남해 보리암이나
불교대학을 졸업하면 끊어질 공부가 걱정이었다. 포교사를 발심한 이유도 부처님 가르침을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서였다. 늦었지만 포교사 시험 대비반에 합류했다. 불교대학 2년을 포함해 10년은 더 공부하고, 특히 초기경전 모두를 깊이 있게 읽어 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포교사를 시작하면서는 전문포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문포교사 품수를 받는 올해는 많은 고민 끝에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부처님 공부라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어느 학인스님 말씀이 힘이 된다. 여러 인연으로 공부 이어와군포교·정애
슬픔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한여름, 시야를 순식간에 가리는 폭우처럼 갑작스러웠다. 의사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거센 빗줄기 같았다. 딸아이와 사별로 후회·자책3000배 등으로 극복하면서불교대학·포교사 인연 닿아“의사의 한계를 느끼고 이런 말을 할 때가 가장 힘듭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의사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니,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느라 의사의 말을 제대로 듣기 어려웠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중학교 졸업을 앞둔 12월 초였다. 딸아이는 급성골수성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