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그릇된 생활수단을 멀리하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통해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바른 생계로 번역하기도 한다. 재가자의 경우 적절한 직업을 통해 건전한 경제적 활동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바른 삶이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는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바른 삶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한 거룩한 제자가 그릇된 삶을 버리고 바른 삶에 의해 삶을 영위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삶이라 한다(DN. II. 312).” 수행자가 버려야 할 잘못된 생활수단의 사례는 어떠한가. “무엇이 그릇된 삶인가. 기만·요설·점술·사기이다. 또한 이미 얻은 것으로 얻음을 추구하는 것이다.(MN. III. 75).” 여기에 열거된 항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네 번째 항목으로서 옳지 않은 행위를 멀리하고 옳은 행위만을 잘 구별하여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이것은 계율의 준수와 깊은 관련을 지닌다. 우리는 바른 행위가 전제될 때 본격적인 명상의 실천으로 옮겨갈 수 있다. “유익한 법(善法)의 처음은 무엇인가. 계율의 청정이며 견해의 올바름이다. 비구여, 이와 같이 비구가 계율이 청정하고 견해가 올바르다면 계율에 의지하고 계율 위에 서서 사념처(四念處)를 닦아야 한다(SN. V. 143).” 경전에서는 바른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살생으로부터 떠나는 것,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감각적 쾌락에 빠진 음란한 행위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행위라 한다(
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세 번째 항목으로서 바르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도성제에 속한 이것은 사성제에 입각하여 바른 견해에 부합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일컫는다. 바른 언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거짓말로부터 떠나는 것, 이간하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 거친 말로부터 떠나는 것, 꾸며대는 말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언어라고 한다.(DN. II. 312).” 팔정도의 여덟 항목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는 지혜(慧)에, 바른 언어와 바른 행위 그리고 바른 삶은 계율(戒)에, 바른 노력과 바른 마음지킴 그리고 바른 삼매는 선정(定)에 배대할 수 있다. 지혜의 영역에 속한 첫 두 항목이 갖추어 질
바른 의도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으로서 마음을 올곧게 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끔 ‘바른 생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팔정도의 바른 의도란 일반적인 생각이나 사고와 구분되며,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의지 혹은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역에서는 이것을 바른 의지(正志)로 번역하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바른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른 의도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떠나려는 의도, 성내지 않으려는 의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이것을 바른 의도라고 한다(DN. II. 312).” 이와 같이 바른 의도는 불건전한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불건전한 마음이 발생하면 일단 바른 견해와 지
바른 견해(正見)란 무엇인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이후의 다른 항목들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철저하지 못하면 나머지 항목의 닦음 역시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팔정도는 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도성제의 첫 번째 항목인 이것으로부터 사성제의 진리는 완성에 이른다. ‘대사십경’에서는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바른 견해는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가 어떻게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삿된 견해가 소멸하고, 또한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무수한 사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소멸한
팔정도(八正道)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도성제를 이루는 여덟의 바른 방법을 가리킨다. 곧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를 일컫는다. 붓다는 고성제를 통해 괴로움의 현실을, 집성제를 통해 그 원인을,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를, 도성제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양상을 밝혔다. 이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팔정도는 맨 마지막의 도성제를 구성한다. 사성제의 순서와 관련하여 일부 이견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집성제는 첫 번째의 고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되고, 네 번째의 도성제는 세 번째의 멸성제에 대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집성제가 먼저이고 고성제는 나중이며 또한 도성제가 먼저이고 멸성제는 나중의 것이 된다. 사실 괴로움은 갈애에서
도성제(道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란 열반을 의미하며 혹은 깨달음의 완성으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도성제는 바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성제의 최종 위치에 놓인다. 괴로움에 대한 인식(苦聖諦)으로부터 출발한 사성제는 마지막으로 그것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도성제라는 실천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그 막을 내린다. 경전에서는 도성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가 있다. 즉 거룩한 여덟 가지 길로서, 바른 견해․바른 의도․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바른 노력․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을 완성한 경지를 가리킨다. 혹은 깨달음의 완성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열반이란 초기불교의 최종 목표로서 사성제의 구조에 배대하자면 멸성제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갈애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든가, “갈애를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열반이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을 내용으로 하는 멸성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멸성제와 열반은 정서적·심리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제시된다. 결국 실천·수행의 관건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얻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맨 처음 읊었던 것으로도 유명한 경구 또한 그것을 나타낸다.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가르침
멸성제(滅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갈애(愛)를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하는 가르침이다. 멸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열반(涅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거룩한 진리(苦滅聖諦)가 있다. 즉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포기·버림·벗어남·집착 없음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괴로움이 그친 이상적인 세계를 생각해보게 된다. 또한 그러한 경지를 스스로 실현하여 머물겠노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멸성제는 우리 자신이 갈애의 속박에 무력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원인인 느낌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처
왜 갈애(愛)가 문제인가. 붓다는 이것으로 인해 집착(取)이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괴로움의 현실 즉 고성제를 집약하는 오취온(五取蘊)이 갈애로부터 이루어진다. 늙음과 죽음으로 귀착되는 불건전한 존재상황(有)이 이것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또한 우리는 갈애로 인해 몽둥이를 들게 되고, 칼을 잡게 되며, 다툼·싸움·논쟁·상호비방·중상모략·거짓말 따위와 같은 나쁘고 사악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라고 한다. 갈애의 발생 경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눈·귀·코 따위의 감관을 통해 특정한 현상에 대한 의식을 갖는다. 즉 감관(根)과 대상(境) 의식(識)이라는 3가지를 통해 구체적인 인식과 경험 활동을 한다. 감관이란 모양과 소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가리킨다. 모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원인을 밝히는 가르침이 사성제의 두 번째 항목인 집성제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거룩한 진리가 있다. 즉 다른 태어남으로 가는 것이고, 즐기고 탐내는 것이며, 여기저기에서 기뻐하는 것인 갈애(taṅhā)이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kāma-taṅhā)․있음에 대한 갈애(bhava-taṅhā)․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vibhava-taṅhā)이다.” 갈애란 마치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구하듯이 어떤 욕구에 강력하게
오취온(五取蘊)이란 무엇인가.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경험적 요인에 집착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때의 집착이란 번뇌와 동의어로서 이들 오온에 대해 애착과 분노 따위를 품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뒤엉켜 드러난 5가지 경험요인을 곧 오취온이라고 부른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바로 이것을 괴로움이라는 거룩한 진리(苦聖諦)의 최종 항목에 포함시킨다. 태어남·늙음·병듦·죽음 따위로 인한 괴로움은 실상 이들 다섯의 요인에 붙잡혀 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다.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괴로워한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부모님은 왜 이렇게 나를 낳으셨을까.” 그러나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분명한 해답을 줄 수 없다
고성제(苦聖諦)란 무엇인가. 고귀한 진리(ariyasacca)로서의 괴로움을 가리킨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이라는 거룩한 진리(苦聖諦)가 있다. 즉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병듦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요, 슬픔·비탄·괴로움·불쾌함·번민도 괴로움이다. 또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된 경험요소(五取蘊)가 괴로움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고 그리고 늙어간다. 태어남 자체에 대해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어남이 자신의 바람이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데에 큰
사성제(四聖諦)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라는 고귀한 진리(苦道聖諦)의 넷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은 보시(施論), 계율(戒論), 천상세계(生天論), 사성제(四聖諦)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는 이들 각각의 과정을 충분히 마친 사람들에 한해 최종적으로 사성제의 가르침을 펼쳤다. 사성제를 빨리어(Pāli)로 표현하자면 ‘4가지 아리야삿짜(cattāri ariyasaccāni)’가 된다. 아리야삿짜란 말 그대로 ‘고귀한 진리’로 옮길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아리야삿짜라는 표현은 고(苦)·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生天論)이란 무엇인가. 보시와 계율의 실천을 많이 쌓으면 죽고 난 이후 즐거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존재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 어떤 이들은 널리 보시를 베풀고 스스로 지계를 갖춘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인색한 마음으로 베풀 줄도 모르고 방탕한 생활만을 일삼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데려다 놓은 것처럼 괴로움이 가득한 지옥에 태어난다고 한다. ‘자나와사바경’에서 붓다는 나디까(Nādika)라는 마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컨대 50명이 넘는 나디까
계율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가리킨다. 계율이라는 용어는 빨리어(Pāli) 계(戒, sīla)와 율(律, vinaya)을 함께 일컫는 복합어이다. 이들은 원래 별개의 쓰임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계란 스스로 맹세하여 지키는 규칙을 의미하며, 율이란 승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규약이다. 따라서 계는 자율적인 반면에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은 별개일 수 없다. 계와 율 모두는 각자의 여건 속에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따라야 할 실천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먼저 보시에 관한 가르침(施論)을 펼쳤다. 그리하여 인색함과 옹졸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 졌을 때 비로소 계율에 관한 가르침(戒
보시(dāna)란 무엇인가.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승가에 바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보시는 남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기쁘게 한다. 베풀 때 느끼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서 보시의 큰 공덕이 될 수 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굶주림과 가난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항상 주변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것은 보시로써 스스로를 길들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또한 보시에는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 이것은 현세에서 풍족한 삶으로 이끌어주고 내세의 행복을 보장한다. 붓다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다. 보시에 관한 가르침(施論), 계율에 관한 가르침(戒論),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生天論)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모르던 사실을 궁리 끝에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수행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누가 가르쳐 주어도 피상적으로만 와 닿을 뿐이고 고민을 거듭해 보지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무릎을 치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깨달음과 더불어 우리는 기존의 낡은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깨달음의 내용이 어떻든 깨닫고 난 연후에는 인식과 실천에 변화가 따라온다. 예컨대 우리는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미워하던 그 사람이 오
해탈(解脫)이란 무엇인가.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무언가에 구속된 상태로부터 풀려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탐냄·성냄·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들이 엮어내는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해탈이란 궁극의 목표인 열반(nibbāna)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감각적 욕망이 빚어내는 번뇌를 가라앉히고, 존재로 인해 야기되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무지로 인해 발생한 번뇌들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곧 초기불교에서 지향하는 해탈의 이상이다. 해탈에 해당하는 빨리어(Pāli) 용어로서 위목카(vimokkha)와 위무띠(vimutti)가 있다. 위목카는 세속을 초월한 지고한 경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행이 진척되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슬기롭지 못한 둔한 마음을 가리킨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아둔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하고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부정하려 든다. 그 결과 꿀 속에 빠져드는 파리처럼 혹은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탐냄과 성냄의 덫에 걸리고 만다. 탐냄과 성냄이 발생하는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3가지 독(三毒)’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리석음은 불행을 만든다. 어리석음은 마음을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이것이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