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수행을 하고 싶었던 한 젊은 스님이 있었다. 그는 마음의 고요와 평온을 얻고 싶어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의 암자를 찾아 들어 갔다. 그곳에서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온 종일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번잡한 도심과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생각이 너무나 복잡하고 수많은 욕구들로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에 오직 일념의 상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였다. 결국 오래지 않아 그 스님은 하루 종일 특별한 생각 없이 오직 하나의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속으로 산에 들어와 수행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하나의 상태로 유지하여 괴롭지 않게 하는 것이 수행이며, 그러한 수행을 잘 했다는 뿌듯함과 깊은 행복감에 휩싸여 시간 가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가로
구수한 무화과차 한잔을 우려내니 풍겨 일어나는 향기에 둘러앉은 손님들이 저마다 향기에 대한 품평을 읊조린다. 다시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순간 더 다양한 감탄과 만족의 표현이 터져 나왔다. 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맛있는 차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행복하다며 이렇게 차를 마시며 행복해하면 이것이 차명상이냐”고 물었다. 어느 수준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본래 명상의 목적이 괴롭지 않고 지혜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감각적 느낌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명상의 목적이라고 답해 주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버립니까? 이런 것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다들 이런 기쁨을 누리기 위해 사는 것 아닙니까?”짧은 시간 안에 설명해 줄 수 있는 답을 찾기가 힘들어 대신 『마간디야의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 혹은 사소한 언행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산다. 남들에게는 별 문제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아주 무거운 불쾌감으로 작용한다. 마음의 평온은 결국 혼자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흔히 일반 사람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일들을 통해 또는 자신을 만족시켜 주는 어떤 조건을 만나면 즐겁고 행복해한다. 그래서 더욱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해 부지런히 자신을 즐겁게 해주거나 만족스런 조건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은 부정적 감정 처리에 너무나 취약하다는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
연산(演算)이라는 수학 용어가 있다. 연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인데 그냥 쉽게 말해 계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계산기나 컴퓨터 등의 핵심 원리이기도 하고 요즘은 경제나 날씨, 생활 패턴 등을 분석하거나 예상하는 등 거의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돈이나 숫자를 계산 할 때 방법은 다를 수 있겠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동일하다. 즉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법칙이다. 연산 작용에서는 계산과 마찬가지로 어떤 값을 입력하면 나름대로의 처리과정을 거쳐 일정한 결과를 산출한다. 같은 값을 입력했는데 할 때마다 결과가 다르거나 전혀 상관없는 것을 입력하고 어떤 일정한 결과를 기대한다면 이
이라크에서 폭탄 테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주 그런 일이 발생하다 보니 그저 무덤덤하게 신문을 읽을 뿐이다. 현장에 있지 않아서 생생하게 느낄 수 없지만 분명 그 피해자의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의 순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업을 지었기에 저런 처지에서 살아가야 할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기사를 읽어 내려갈수록 마음은 약간 불편했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 일이라서 그런지 이내 다른 기사를 읽는 순간 그 기사의 내용과 기분은 사라져 버렸다. 스포츠면의 기사를 보니 영국의 프로축구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박지성 선수를 비롯해 몇 명의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저 멀리 외국의 축구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사 내용은 그날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지
해외로 공부하러 가고 싶은 한 후배 스님이 있었다. 이따금 잊고 있다가 만나게 되면 차 한 잔하며 서로의 인생 계획도 주고받고 그러면서 꿈을 꾸듯 각자의 사는 모습을 그려 보곤 했다. 어느 날 그 스님 방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런지 방안 한 쪽 벽면에 온통 책으로 꽉 채워져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의 책들이 영어 공부에 관한 서적들이었다. “스님은 영어를 무척 잘하시겠어요?”꽂혀 있는 책들로 미루어 상당한 수준이 아닐까 추측되었다.“저에게 지금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영어입니다.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알아야 되는데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영어인 것 같습니다.”“아니 이렇게 많은 책을 보셨는데 아직 영어를 잘 못하신단 말입니까?”“못하니까 책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잘 알려진 이 화두는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사용되었는데 이 물음의 원래 의도는 간절히 그 물음의 뜻을 탐구하여 근본 마음자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 한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저절로 알아질 것이다. 부처님 당시 밧차곳따라는 한 수행자가 어느 날 부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다. “수행승이 해탈하게 되면 사후에 어디에 태어납니까?” 이 물음에 부처님은 사후에 태어난다는 질문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자 밧차곳따는 재차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수행승이 해탈하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밧차곳따는 그럼 태어나기도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인간이 살아 있는 시간 동안 3분의 1은 잠자는 시간이고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 중에 밥 먹는 시간이 대략 8% 그리고 기타 화장실을 가거나 청소, 목욕, 옷을 갈아입는 시간 등이 또 8%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 중에서도 텔레비전 시청, 신문보기, 잡담, 멍하니 있는 시간이 절반이며 실제 활동하는 시간에도 집중력과 사고의 명확성이 낮은 상태가 많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두뇌 능력의 10%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의 10%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결국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의 결과 자신의 능력도 더욱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명상을 오래 해왔다는 한 젊은 여인이 친구와 함께 찾아 왔다. 본인이 경험한 것도 자랑할 겸 또 내가 차명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외국의 한 명상 센터에서의 생활을 무용담같이 실감나게 토해내는데 녹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처음 따라준 그대로였다. 묵묵히 듣고 있다고 갑자기 내가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 좋아하시는데 수행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보살 말은 그냥 오래 앉아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수행센터에 들어가 그냥 묵묵히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저절로 된다는 논리였다. “그 참 쉬운 방법이네요!” “아닙니다.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행을 위해서는 당연히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꼭 오래
바쁜 현실 속에서 수행을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기회는 많지 않다. 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수행의 마음을 내어보지만 생각만큼 그리 쉽게 수행이 되지는 않는다. 이론적으로 수행방법과 힘, 열의가 갖추어지면 수행을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수행이 잘 된다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수행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그래도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갖은 애를 써본다. 수행이 안 될 때는 분명 안 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수행이 잘 되는 조건과 원인들은 개발시키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수행이 잘 되고 안 되는 것에 앞서 수행 방법의 핵심을 알고, 방향을 잡는 것도 수행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부처님은 네 가지 종류의 수행자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일종의 편견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견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견해일 뿐 이것도 엄밀히 말해 절대적인 견해라고 할 수는 없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나라와 민족 사이에는 이렇게 견해의 차이가 있고 이러한 견해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혹은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 요즘 사회적으로 여러 정치적 문제 때문에 시끄럽다. 이런 현상은 나라의 역사와 함께 항상 있어왔던 문제지 요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마다 견해는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갈등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다보면 내 견해를 고집하는 것도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내 견해를 버리고 상대방의 견해를 따르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이 된다. 우리
우리가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심히 할 때는 몇 몇 상황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몇 가지 상황을 꼽자면 절박할 때, 재미있을 때, 강한 열정에 휩싸일 때 등이다. 절박할 때는 중요한 목표를 실패 없이 성취하고자 할 때,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거나 괴롭고 위태로울 때 벌어지는 상태이다. 절박함은 스스로 만들기 보다는 주로 주어진 어떤 상황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있을 때는 선천적으로 좋아하거나 잘 하는 것일 때, 많은 성과가 기대될 때, 혹은 흥미를 느끼는 활동을 할 때 일어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이 따를 때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어떤 일에서 의미를 느낄 때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열정 혹은 믿음은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았을 때, 내
수행을 하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괴롭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수행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먼저 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수행에 대한 열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방법을 알고 열정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실천 수행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수행을 적극적으로 하려 하면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장애 요소들이 생겨난다. 이들 장애요소들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기 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익숙한 생활의 한 부분들이었는데 수행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절제하거나 없애야 되는 유익하지 않는 것들로는 적절하지 않은 음식이나 과식, 술, 담배, 오락, 잡담, 감각적 쾌락 등이 있다. 평소 생활에서 이러한 것들을 즐기고 또 그다지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았
공부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핑계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래서 공부가 안 되고 또 저래서 공부를 못하고. 조용하고 공기 깨끗한 곳에 가서 한가로이 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닦여질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시간이 된다 해도 평소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기 때문이다. 맛지마 『짜뚜마에서 설한 경』의 내용을 보면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네 가지 수행의 어려움이 나와 있다. 경전에서는 이 네 가지를 고기를 잡으러 물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두려움에 비유하여 파도의 두려움, 악어에 대한 두려움, 소용돌이에 대한 두려움, 상어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였다. 어떤 출가 수행자가 있는데 자신 보다 나이 어린 고참 수행자가 자신의 언행과 생활에 대해 훈계하고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을 여행하려면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스님 신분으로 여행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찰 문화와 다른 것들이 많아서 실례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국의 어느 시골 절에 간적이 있는데 첫째 날 아무도 식사하라는 말을 해주지 않아 하루를 꼬박 굶은 적이 있다. 참 매정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찰 가까운 곳의 식당에 가서 밥을 사먹었는데 모두들 이상한 눈치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찰에 영어를 조금 하는 스님이 계셔 손님이 왔는데 왜 밥을 안 주는지 물었고, 또 밥을 안 주어서 밖에 식당에서 사먹으러 갔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 태국 스님의 말이 여기서는 각자 아침에 탁발을 나가서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탁발해 와야 한다고 했다. 외국 스님도 예
‘어찌 저렇게 멋있고 잘 생기셨을까? 아마 앞으로 나의 모습도 저런 모습이 되겠지.’ 아침 일찍 공양을 받기 위해 마을로 향해 걷고 있던 젊은 라훌라 존자는 자신의 바로 앞에 걷고 계신 거룩한 존재의 자태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걷고 있을 때는 오직 걷고 있는 사실만을 알고 있어야 되지만 그날은 눈에 들어온 형상에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때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존귀한 분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에 라훌라 존자의 상념은 뿌듯함에 휩싸여 그 순간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의 상념은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앞서 가시던 부처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라훌라여, 어떠한 몸이나 물질이든지 그것이 과거나 미래나 현재 어디에 존재하던 간에 혹은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그 모든 것은 영
인도에서는 오랜 세월 참으로 다양한 수행법이 존재해 왔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보니 원숭이 흉내를 내고 사는 인도 사람이 소개되었었다. 3억이 넘는 힌두교 신들 중에서는 원숭이 신이 있기 때문에 원숭이 흉내를 내고 사는 것을 일종의 고행 또는 수행으로 여기며, 만약 그런 수행을 하게 되면 자신의 죄업이 정화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믿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비롯되었는데 부처님 당시에도 성행했던 수행 중에 하나였다. 경전에 보면 어느 날 개의 흉내를 내고 사는 ‘쎄니야’라는 수행자와 소의 흉내를 내고 사는 ‘뿐나’라는 수행자가 부처님을 찾아왔다. 개의 흉내를 내는 수행은 벌거벗고 다니며 사람들이 땅에 던져 주는 음식만을 먹었으며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 혹은 누워 있을 때 개처럼 똑같이
부처님 당시 유명했던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니간타 나타뿟따는 어느 날 마가다 국의 아봐야 왕자를 만나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해보라고 한다. “왕자여, 가서 부처님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오, 당신도 다른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지? 만약 그런 말을 한다면 그대와 우리 범부들은 똑같다고 말하고 만약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왜 데바닷따에 대해서는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는 당신의 말에 올바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왕자님은 부처님을 논파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크게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아봐야 왕자는 조심스럽게 니간타가 말한 질문을 부처님께 물어보았다.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에 일방적인 대답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는 답을 기대했던 아봐
한 농부가 밭을 일구다 우연히 오래된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오래된 것으로 뚜껑까지 잘 덮여 있어 농부는 마치 무슨 보물을 발견한 것 마냥 기뻐했다. 더 기쁜 사실은 항아리 뚜껑을 열자 그 안에 검고 딱딱한 냄새나는 어떤 물체가 가득 담겨 있었는데 아마 오래 전에 담가 둔 된장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였다. 오래된 된장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발견했다는 소문은 금세 여기 저기 퍼지기 시작했고, 몸이 아픈 사람과 골동품에 관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항아리나 그 속에 들어있는 묵은 된장을 팔라고 난리였다. 그럴수록 그 농부는 그 항아리를 집안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 두고 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농부는 갑자기 큰 병이 들어 약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그 농부에게
부처님 당시 어느 날 건축사였던 빤짜깡가 장자는 우다이 존자와 느낌의 종류에 대해 서로 논쟁하게 되었다. 우다이 존자가 주장하기를 부처님께서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빤짜깡가 장자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자신이 듣기로는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두 가지만 말씀하셨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강한 몰입의 상태 즉 삼매에 든 자가 경험하는 상태일 뿐이라고 하였다. 서로 자신들이 부처님에게서 들은 내용이 옳다고 논쟁을 하고 있는데 그 때 아난다 존자가 그 광경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 내용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 가지 이든 세 가지 이든 그 때 상황에 따라 방편으로 말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