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지나면 그 뿐…10년간 헛공부26년 공직생활 뒤 100일 기도 발원 어릴 적, 어머님이 초파일이면 항상 절을 찾고 새해가 되면 사찰 달력을 집에 걸어놓는 것만으로 나는 자연스레 불교와 가까워졌다. 특히 고향에 신라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단속사(斷俗寺) 라는 절 터 주위에 석가탑 모양의 동, 서 쌍탑(보물 72, 73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탑 주변은 늘 나의 놀이터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시간이 날 때면 10년 넘게 절을 찾아 법문을 듣고 조사어록과 법어집 등을 읽으며 스스로를 가다듬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소설책 보듯 흥밋거리로만 여겼을 뿐 올바른 수행을 이어가지는 못했었다. 경전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의 수양을 쌓고 그 속에서 좋은 말씀들을
사경하며 부처님 함께하는 환희 체험사경은 허영심과 자만심 버리는 수행 신라 백지묵서(新羅 白紙墨書) 대방광불화엄경 사성기에는 “사경을 하는 방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 생장(生長)시키며 닥나무가 다 자란 연후에는 닥 껍질을 벗기는 자, 연마하는 자, 종이를 만드는 자, 사경을 하는 자, 변상도(變相圖)를 그리는 자, 표구를 하는 자, 심부름을 하는 자 모두 보살계(菩薩戒)를 받아야 하며 재식(齋食)해야 하며 위의 사람들이 만약에 대소변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했을 때는 목욕을 한 연후라야 사경하는 곳에 나아간다”고 했다. 이토록 우리 조상들은 사경을 하는데 지극 정성을 다 하였음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 뒤 고려 때의 감지금니의 화려하고 섬세하게 장엄한 장엄경은 우리 조상의 긍지이며 세계적인
만학의 길에 학위논문 주제로 사경 선택하루에 3시간 자면서 연구하고 수행실수 어느 여름날, 녹음이 짙게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간 곳은 전남 보성군 대원사였다. 집안에 크게 어려운 일이 생겨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처음으로 찾아간 대원사에서 현장 스님을 만났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은 주지 스님은 집안 사정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서예를 하는 내게 수행으로 사경(寫經)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음이 어지러웠던 그때, 내 마음은 사경보다는 염불이나 절을 하면서 그동안의 내 삶을 참회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 스님의 권유를 조심스럽게 뒤로 미뤘었다. 10년 전 그땐 사경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해서(楷書)로 쓰는 사경이 힘들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서예를
3년 수행 후 부처님 호흡법 알아매달 삼 천배…틈나면 절하고 싶어 그 뒤 병원에서 검사 한 이후 병명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스님께서 전생부터 아팠던 습관과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 아프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셨다. 결국 나는 ‘나이롱’보살이 되었다. 가슴이 통증이 와도 이제는 두렵지 않게 되었고, 더욱 신심발심해서 정진하던 어느 날 호흡 수련에서, 아랫배 단전에 굵은 말뚝을 하나 박는 것처럼 묵직한 힘이 느껴지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가 파란 하늘처럼 맑아지기 시작했다. 스님께서 머리가 맑아지면 피곤도 사라지고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되고,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하셨는데 체험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절, 독경, 염불
29세 상기병 앓은 뒤 다시 병 얻어매일 삼천배·염불…새로 태어난 듯 자수성가를 해보겠다고 밤낮으로 뛰어다니던 26살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 누군가에게 의지해야함을 느꼈다. 교회를 나가보았지만 적응이 되질 않았고 오빠의 인연으로 절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노력한 만큼 반드시 대가가 주어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희망에 부풀어 3년만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결혼을 하던지 사회생활을 하던지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고향과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떠나 온지 어느새 8년이 지났다. 아예 머리를 깎으려면 보내줄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절에 간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절대로 여동생을 먼저 결혼시킬 수는 없다고, 자식을 낳았으면 결혼을 시켜야 부모의 도리를 다
염불수행하며 매일 아침 108배와 좌선어느 날부터 온갖 소리가 염불로 들려수행이 이어지고 여러 경전과 글 등을 통해 불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렵게 이 법을 만난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극락왕생의 뜻을 세워 열심히 정진해서 뜻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기도 때마다 극락왕생을 발원하게 되었는데, 극락왕생 발원은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세상일에 마음이 채워져 있는 한 발원이 뿌리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일을 내려놓아야 할 것인데, 다 내려놓아 버리면 어찌 되는 것인가. 한편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부처님께서는 ‘염불하는 자를 결코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하였다. 광명 놓아 이끌어주시고, 관음보살님을 비롯해 여러 보살님들과 모든 하늘신
선용 스님 인연으로 정토선 수행 입문염불하며 출퇴근…“삶의 행복 느껴” 불법을, 그리고 정토선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년 넘게 성당을 다니던 내가 불교로 개종한 것은 아들의 대학진로 때문이었다. 아이 진로 문제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궁리도 해보았지만 확신을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만난 한 사찰의 주지 스님을 친견하고 그 스님께서 해주시는 따뜻한 한마디의 말씀에 감동해 절을 다니기로 결심하게 됐다. 막상 절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무작정 옆 사람이 하는 대로 법회에 참석했고,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 반야심경, 금강경 등의 경전을 열심히 읽고 외우기도 했다. 그 무렵 우연히 불교서점에서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책 한권에 매료되었다. 그 책은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 할 것은 오로지 마음경험속에서 깨달음 의미 새기는 버릇 생겨 태백산으로 떠난 철야 야간만행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길을 법사님의 인도에 따라, 각자의 손전등에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체감뿐만 아니라 산행 도중의 좌선 시간을 통해서 온갖 사물을 보고 느낌과 의식을 만들어내던 ‘눈’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무력한 것일 줄이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든 의식은 귀에만 쏠리게 되고 평소에 별 생각 없이 당연한 것으로 의존해 오던 눈이라는 감각 기관은 그저 꿈벅거리기만 했을 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무기력한 기관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의 느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할 것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믿음뿐
삶의 허무-적응력 부족으로 마음고생봉화산 학바위에서 좌선…눈물 주르륵 오늘도 선원에는 목요일마다 열리는 정기법회에 참석한 도반들의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자리를 정돈한 후 삼귀의에 이어 법사님의 좌선 인도가 시작되었다. 날숨 3회로 좌중을 편안하게 이끄시는 법사님의 인도대로 내려놓기를 하던 중, 문득 살아온 모든 날들을 다 내려놓아 보자는 용감한 생각이 들었고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선정에 들 수 있었다. 내가 우곡선원에 오게 된 계기는 몇 년 전에 실시한 우곡 교원직무연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교원직무연수를 받던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의 허무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 때문인지 유독 세상살이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나는, 방학을 이용하여 기존의 사찰에서 실
매주 토요일-여름·겨울엔 1주일씩 철야화두 참구하며 죽음 공포 극복…마음 출가 첫 번째 일주일 철야정진 이후 2년간 철야를 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참선을 시작해서 1분 여가 지나면 시계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오직 화두만 들렸다. 처음으로 생각을 쉬어본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1초도 안 쉬고 생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이라는 화두를 받았는데, 지속적으로 철야정진을 하면서 마치 정해진 답처럼 ‘예리한 칼을 들고 쫓고 쫓을 새, 갈곳 없는 東山水上行이 내 집안 소식을 토하는구나. 산은 푸르고 물은 맑은데 할 일도 많았던 내 집안 일이 하나도 할 일 없는 그대로구나’하는 답이 나왔다. 그리고 자성자리는 특별히 나만 가지고 있
“향후 10년을 준비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청소년 단체로 발돋움 하자.” 파라미타청소년협회(회장 도후, 이하 파라미타)가 2월 3일부터 4일까지 충북 증평에서 정기총회 및 지도자 대회를 가졌다. 파라미타는 3일 오후 4시부터 대의원과 지도자를 구분, 정기총회를 진행하고 지도자 대회를 개최했다. 지도자 대회에서는 문화재 애호활동에 대한 특강 시간을 갖고 그 동안 각 지역에서 청소년 포교에 일익을 담당한 우수지도자 16명의 공로를 치하했다. 파라미타 회장 도후 스님은 “파라미타는 지난 10년간 연합캠프를 비롯해 문화재애호활동, 국제구호활동, 해외문화탐방 등 종단 내외의 관심과 지원 속에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며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종단에서 어린이, 청소년 포교 지원을 약속한 만큼 종단을 뛰어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죽음 보고 공포백봉 선생님 첫 법문 듣고 생사해결 확신 초등학교 6학년 때 앞자리에 앉던 친구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됐다. 겨우 13살이었지만 친구처럼 병들어 죽거나 아니면 80까지 산다고 해도 죽는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과학시간에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우주에 대해 배우면서는 죽음과 우주에 관한 생각만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고등학교를 가서도 마찬가지여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던지 삶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부
매일 3000배 절-지장보살 염불 수행이기심이 내 병의 원인 알면서 완쾌 처음 내가 그 절에 머물 수 있도록 소개해준 분은 스님에게 “이 학생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파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자, 스님은 “하루에 1000배씩 절을 해라, 그리고 평소에는 지장보살 염불을 죽도록 해”라고 하셨다. 1000배가 어느 정도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108배를 해보고 나니, 1000배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1000배를 매일같이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하지만 도량이 떠나가라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스님의 목소리에 기가 눌려서 “네”하고 대답을 한 터라 어찌 되돌릴 길이 없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를 더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스님은 “요즘 법당에서 매일 3000배씩
재수생 시절 얼굴에 진물 흐르는 병 생겨병원 전전하다 호남 시골의 절에 들어가 지장보살님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20여 년 전 희열로 가슴 벅찼던 발심의 순간들이 아련히 되살아난다. 당시 나는 대학 재수생이었다. 고교시절 학업은 뒷전으로 한 채 오로지 친구들과 노는 것에만 몰두했던 속칭 ‘날나리’라는 부류에 속했던 나에게 재수는 필연이었다. 또 모난 성격 덕분인지 일상적인 말에도 자존심이 상해 혼자 마음의 난행과 함께, 먼저 시비를 걸어 주먹다짐도 서슴지 않았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폭언은 물론, 쉽게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사는 철없는 젊은이였다. 재수를 위한 준비는 타의에 의해 이끌려 간 스파르타 형식의 모 학원이었다. 결국 병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 곳이다. 건물 내에서의 출입통제, 한 달에
법화경 사경 33회 완성 후 빙의 사라져5년간 매일 사경…108번 사경정진 서원 광고를 보고 찾아간 선원에는 늘 법당에서 법화경 사경을 하는 보살님이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마음을 열고 나의 아프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 보살님은 내 눈물을 닦아주며 법화경 사경수행을 하는 분들 가운데 나와 같은 빙의를 극복하거나, IMF 위기를 넘긴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사경수행을 권했다. 그동안 천도재를 열두 번이나 지내고 갖가지 기도를 다 해보았던 나는 선뜻 그 말을 따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6개월이 지난 어느날 서울의 법화경 사경도량인 법화정사와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2년 1월 6일이었다. 이 날은 내 삶에서 결코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주지 도림 스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리니 법화경을
결혼 후 시댁과 갈등 겪으면서 빙의 걸려병원 치료에 천도재·기도해도 호전 없어 신심 돈독한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 사랑 받으며 별다른 문제없이 잘 자랐고,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댁에 들어가 살았는데, 시댁은 종교부터 달랐다. 거기다가 집안 가풍이 너무나 달라서 스트레스와 갈등 속에서 매일 매일이 힘겹기만 했다. 그러던 중 시동생의 결혼식 전날 시숙모님의 무모한 행동에 크게 놀라면서 빙의라는 병을 얻게 되었다. 심한 두통과 온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들고 내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가정을 꾸려가기가 어려워 친정 어머니께 아이들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병을 고쳐보려고 병원에 다녔으나 뚜
하루에 1시간 이상 좌선-일상이 수행몸·마음 알아차리며 생활속 이익 실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탐심을 한 번 알아차린 뒤에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이면 노력해서 취하고 그것이 욕심이면 놓아버리라고 배웠으나, 실제로는 거의 알아차림을 놓치고 실컷 탐심을 냈다가 가지지 못해 끌탕을 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그때서야 마음을 보니 그때 탐심이 있었네 하고 아는 식으로 계속 뒷 북을 쳤다. 이런 경험을 인터뷰 스승에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탐심을 안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스승은 계속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면 알아차리는 시간이 점차 빨라져 막 탐심이 일어날 때 알게 되고, 그래서 대상에 휙 넘어가지 않고 욕망을 조절하는 힘이 생겨 번뇌가 줄어든 생활을 할 수
깨달음 구하는 종교라는 말에 불교입문절 찾아 기도생활 10년 만에 수행 발심 사춘기 시절에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친구의 말에 교회를 다녔다. 그러던 중 19세 때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어머니를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실망감에 하느님이란 존재를 믿지 못하고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그러다가 대학시절 우연히 보게 된 소책자에서 ‘불교는 깨달음을 구하는 종교’라는 구절이 아주 멋있게 느껴졌다. 무조건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알기를 원했지만 마땅히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
1주일 가행정진 끝에 자성염불 성취새벽 예불·염불·좌선으로 하루 시작 철야정진 참석후 적게 먹고 조금 자고 가행정진을 해보라는 스님 말씀을 따라 아기를 안고서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가행정진을 했다. 이상한 것은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와는 달리 모든 상황들이 나의 수행을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가행정진을 시작하면서 인터넷 정토선 카페도 잠깐씩 들러 궁금한 것만 보고 나가기를 일주일 정도 지난 월요일 새벽 염불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성악가의 목소리도 아니고 굵은 남자 목소리에 아름다운 음율까지. 놀랍고 기쁘고 환희로울 뿐이었다. 이렇게 정토선 1차 관문인 자성염불 단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 염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세시쯤 된다. 예불과 염불, 좌선 등 새벽수행을 여섯시까지 하고 하
외손주 기형적 얼굴보며 삶의 의욕 상실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염불…이적 체험 여섯 형제의 맏며느리인 나는 시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연로하신 시 할머님과 어린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스물 여섯.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뒷바라지를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막내 시동생을 대학에 보내지 못하면서 시고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 불화가 생겼다. 칭찬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참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을 주체할 수 없어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부처님 전에 고달픈 삶을 맡기면 그나마 편안해졌기에 도반들을 따라 다니며 관음정근도 하고 절, 사경 등을 했다. 하지만 모든 수행이 그렇듯이 하면 좋기는 했으나 공부의 진전도 없고 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해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