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니부룩에서 한국의 유교를 가르치는 마크 쎄튼(Mark Se-tton)교수는 대한민국 교육부가 편찬한 국민윤리 교과서의 내용에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쎄튼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문제의 국정교과서는 제1장에서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거의 전적으로 서양사상에 의존하고 있을 뿐, 동양의 심오한 인간관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공부한 바로는 동양의 전통적인 인간관이야 말로 오늘날 현대인의 윤리의식을 바로 잡을수 있는 중요한 원리를 간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이를 무시하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인간의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휴머니즘(humanism)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이 동서간에 크게다르다. 동양에서는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전국신도회는 과연 통합될 수 있을까? 최근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18대 회장에 추대된 선진규씨가 통합 가능성을시사해 이 문제가 수면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조계종은 그동안 '한 종단 두 신도회'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1955년11월 창립된 전국신도회와 개혁 종단 출범 이후 97년 3월 창립된 중앙신도회를 놓고 교계는 왜 한 종단에 두 신도회가 존립해야만 하느냐는 지적을해왔다. 당시 중앙신도회는 전국신도회를 흡수 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지만 전국신도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신도회의 40여년의 역사를 버릴 수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양 신도회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은 가운데 중앙신도회는 송재건 회장을주축으로 조직 구성에 들어갔고, 전국신도회
한국불교의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의 신도회 조직이 지연되고 있는 때에 범불교재가연대회의가 구성되고 이 모임에서 오는 6월 10일, `변화의 시대-재가불자의 역할 모색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해서 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이 토론회가 조계종의 개혁평가를 비롯해서 출가.재가의 올바른 위상과 역할모색,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전국재가조직 건설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조계종이 추진하고 있는 신도회 조직과는 어떠한 관계를 갖게 될 것인지 궁금하게 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동안 신도회의 조직을 위해서 조계종 총무원과 가졌던 협의를 중단하고 종단을 초월한 전국적인 재가신도조직을 건설하겠다는 의도에서 범불교재가연대회의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토론회에
노스님의 권위 상실, 직위·학번 우선 풍토초발심·수행공동체 정신 회복해야"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자손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대개 파괴란 것은 무너져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없애고 끊는 것이다. 그러나 파괴라고 해서 모두를 무너뜨려 없애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않는다. 다만 구습(舊習)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조선불교유신론》서구문화와 자본주의의 유입은 농경문화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만해 스님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불교의 포교방식이나 수
쉽게 말하면 불교를 담아낸 그림이지. 그러나 단순한 그림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야. 그 속에는 종교적인 장엄함이 담겨있어. 혼이 담겨있는 것이지.그래서 불화를 그린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한게야. 작가 자신은 작품을 통해자신이 표출하고 싶은 부처를 그려내는 것이지. 그래서 불로(佛母)라고 하는것이지. 불화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은 바로 이 불모라고 하는 언어에 이미내재돼 있어. 부처를 그려내는 사람을 쉽게 말해 작가라고 한다면 작가가부처를 형성해 내는 거지. 여기에 종교성과 예술성이 있어. 작가가 그려낸부처를 보고 사람들은 신심을 가질 수 있는게야. ▲한국의 불화는 곧 한국적인 불교의식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지녀 왔던 종교관과 우주관,
대통령선거의 계절이 되니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그 속에서 또다시 ‘용공', ‘빨갱이'의 유령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이 이번 선거의 앞날을 걱정케한다. 건국 50년사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번지레한 간판을 세워놓고, 그 뒤에서 영세집권의 ‘황제'를 꿈꾼 야심가들이 수없이 대통령선거를 악용했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배반하여 황제가 되려했던 문민정치가 리승만씨가 그랬고, 가장 깨끗했던 선거로 선출된 문민정부를 탱크로 몰아내고 권좌에 앉은 군인출신의 박정희씨가 그랬다. 그 뒤에 또하나의 섯부른 ‘황제지망생'이 있어, 그의 정적의 고향에서 양민 대학살까지 저질렀으나 추악한 이름만 남기고 실패작으로 끝난 군인도 있다. 문민대통령 리승만씨와 군인대통령 박정희씨에게는 출신성분은 다르지
농촌·공단 지역 어린이 포교 선두 눈높이 포교, 다양한 프로그램 실시 인재 불사에 궁색한 불교계 풍토에도 불구하고 동심(童心)을 끌어 안기위해 진력하고 있는 곳이 있다. 경북 구미 원각사(주지 대혜 스님) 대웅전은매주 일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어린이들의 재잘 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지난 해 8월 어린이 법회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법당 안은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찾을 수 있는 놀이터로 변해 버렸다. 원각사 어린이 법회는 경북 구미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두 개의 사찰 어린이 법회 중 한 곳. 새싹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고 있지만 실제 활동에 있어선 너무도 열악한 것이 교계의 현실. 50여 개의 사찰이 있지만 어린이 법회가 열리고 있는 곳은 구미불교포
행자님이 깨우는 소리에 새벽같이 옷을 가다듬고 세면대로 향했다. 심금당에서 가리개 사이로 처음보는 우바이 우바새들이 갈라져 자보는 것도 불국사 수련회의 진미인 것 같다. 아침은 법공양인 발우공양을 했다. 조심스레 정성을 다해 청수로 발우를깨끗이 비웠다. 평소 음식을 남기고 버렸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왠일인가. 저녁공양때는 3,4조가 청수를 다시 나누어 마셨다. 스님께서 하시는 발우공양대로 속세인도하면 쓰레기 물걱정을 안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속세에서 이런 고요한 아침을 반기기는 정말 어렵다.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를 보고싶어 아침 7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짬을 내 경내를 걸었다. 범종을 지나 백운교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 이럴수가. 나무가지 사이로 햇살이비
유가(儒家) 聞人過失 如聞父母之名 耳可聞而口不可言 是非終日有 不聽自然無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待左右 當嚴而惠 左右之言 不可輕信 必審其實 親愛之言 亦不可偏聽 若聽一面設 便見相離別 남을 비방하는 말을 듣거든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여겨 귀로듣기만 하고 입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누가 종일 시비가 있더라도 듣지 않으면 자연히 사라진다. 누가 와서 옳다 그르다 하고 말하는 사람, 그가 곧시비하는 사람이다. 좌우의 사람을 대할 때는 엄격하면서도 인자하여야 한다. 좌우의 말을 경솔하게 믿지 말고 반드시 그 진실을 살펴야 한다. 친애하는 사람의 말도 역시 편견되게 들어서는 안된다. 만약 한 쪽 말만 듣게 되면 서로 갈라서게 된다. 輕言輕動之人 不可與沈計 易喜易怒者
1988년 5월 16일 창간한 본지가 이번호로 지령 500호를 맞았다. 숫자적 개념으로만 따지면 500은 큰 수는 아니나 주간전문지로서 볼 때 지령 500호는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롭다. 주지하다시피 주간 전문지가 지령 500호를 맞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어느덧 본지가 지령 500호를 맞게 됨은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11년의 세월이 흘렀으며본지를 성원하고 애독하는 독자들이 탄탄하게 조직화돼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의지령을 더할 때마다 경영진과 편집진 등 종사자 모두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과 정성이 보태졌고 매회 새롭게 독자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정보를 발굴하고 가공하기위한 `땀과 아이디어'는 매번 숨막히는 연속이었다. 본지는
우리가 일산으로 최근 이사온 후로는 출퇴근시간에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세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또 한번은 전철을 타야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두 시간 정도를 길에서 보내고 나서야 학교에 도착한다. 자연히 집에서 좀 더 일찍 떠나야 하고 또한 전철에서는 옆의 사람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다음에 옮기는 얘기는 이렇게 해서 우연히 엿듣게 된 얘기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퇴근 길의 전철에는 내 곁에 두 사람의 중년 부인이 앉게 되었다. 그 중의 한 부인은 아들이 군복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부인은 남편과 함께 가능하면 자주 아들을 면회 간다. 그런데, 아들의 부대에는 집에서한번도 면회오지 않는 군인이 있다는
성낙주의 소설 의 문학성은 고타마 싯다르타와 코살라국의 비유리왕의 갈등 구조 미학이나 당대의 불교 설화 구조를 재구했다는 점에서 찾기 보다는 말라국 파바성 출신의 대장장이 춘다와 그의 아들 나무크시아, 그리고 카라카인 야수비등의 주변인물의 서사 구조와 미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신적인 차크라바르틴인 붓다와 정치적인 차크라바르틴인 비유리왕의 이야기는 춘다와 나무크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를 돕기 위한 시대적 배경과 인물 창조의 보조 장치 또는 메세지 전언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소설적 장치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소설이 단순히 석가시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며 그 당대의 서민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정신 부재의 이 시대의 삶을 환기시켜 주기위한 픽션이라 할 때 더욱 그러하
언젠가 신문의 해외토픽에서 기막힌 이야기를 읽었다. 가끔 배가 아픈 증세를 보인 사람이 병원에 찾아갔더니 뱃속에 수술하고 남은 수술칼이며 거즈 같은 것이 그득해 새로 수술을 하고 핀세트며 수술 가위 등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최근에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우리 병원들의 문제가 정말 간단치만은 않다는 것을 실감케 되었다. 우선 가장 심각한 것은 의무진의 실수 가능성이 의외로 높다는 것이다.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의사들의 솔직한 고백으로도 병원진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과실, 그리고 뜻밖의 사고가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환자들이 정말 편안하게 병원을 신뢰하면서 진료를 받기는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케 되었다. 서
〈법보신문〉이 지령 500호에 이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 동안 어려움도 많았겠고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는데, 척박한 여건을 딛고 교계의, 또 나아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신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기까지 이끌고 온 이들과 밀어 준 독자들 모두에게 경하의 말씀을 드린다. 한 때 객원논설위원으로 〈법보신문〉 시평을 격주로 기고한 적이 있었다. 청탁을 받고 첫 글을 실을 때만 해도 〈법보신문〉을 과연 몇 사람이 구독하며 내 글을 누가 꼼꼼히 읽기나 하랴 하고 솔직히 좀 가벼운 심경으로 임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정을 모르는 경솔한 태도였다는 것이 금방 판명되었다. 여기저기서 글 읽었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평소 불교와 인연이 없는 듯해서 〈법보신문〉을 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학교의 선배,
"새롭게 일어서는 불교 구현 위해 제2의 창간 자세로 임할 터" 88년 5월16일 설레이는 가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법보신문〉이 어언 10년의 성상을 넘어서 지령 500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무량겁의 절대 경지를 말하는 불교적 시간관(時間觀)에 견주어 볼 때 500이라는 숫자는 한낱 티끌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심이란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이어서 지령 500호의 신문을 발간함에 이르러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자축과 다짐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령 500호에 이르기까지 〈법보신문〉이 걸어온 발자취는 영욕과 희비, 좌절과 희망이 점철되었던 지난 10여년의 우리 불교사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육군 17사단 훼불사건에서 보았듯이 정법을 훼손하는 무리
"시시비비 명쾌하게 가리는 정론지 명성 이어가길" -고산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법보신문〉 지령 500호를 축하드립니다. 열악한 교계의 언론환경 속을 꾸준히 걸어온 〈법보신문〉의 모든 가족들을 향해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법보신문〉이 처음 창간되던 때 〈법보신문〉에 거는 교계의 관심과 기대는 자못 큰 것이었습니다. 그 관심과 기대에 `법보'는 비교적 충실히 답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하면서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정론지가 되고자 애쓰던 노력들이 그것입니다. 〈법보신문〉은 포교지로서도 많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독자를 진리로 안내하고, 신심을 중장시키는 교량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법보신문〉을 펼치면 산사의 향기가 퍼지고, 정진 납자들의 날선 구도의
불교언론을 죽이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요즘같은 태평성시에 그 무슨 망발이냐고 눈을 휩뜰 부류도 있겠지만 불교언론에 몸담고 있는 당사자로서는 요즘같이 불교언론에 쏟아지는 몰매를 보지못했다. 지난 한달간 세개 이상의 매체가 불교언론비평을 크게 혹은 비중있게 다뤘다. 이중 두개 매체는 지금 불교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에서 발행되는 기관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호를 바꿔 재창간한 교계 주간신문이었다. 발행주체가 매우 다른 이 세 군데 매체는 그러나 내용면에서만큼은 공통점을 보인다. 교계언론풍토에 대한 심한 불신과 질책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불교언론이 언론은 언론이되 하는 모양새가 언론(정론)으로 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자사이기주의에 빠졌다거나 기자정신이
조계종이 금년도에 추진할 종무계획을 발표했다. 종단의 안정과 화합, 수행중심의 승가상 확립, 포교전법사업의 내실화, 대사회활동의 다각화와 전문화, 종도중심의서비스행정의 실현, 종무행정의 전산화와 불교종합정보망사업 추진, 불교종합회관건립불사 추진 등이 주요내용이다. 이와 같은 사업계획은 고산 스님의 새집행부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를 예측케 하는 기본 자료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종무계획' 만으로 볼 때 고산 스님의 새 집행부는 지난해에 비해 특별히 새로운 구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금년 중에 불교종합회관을 착수하겠다는 것과 지난해 종단사태와 관련 수행중심의 승가상 확립을 위한 참회법회와 교육실시 등은 전에 없던 항목이어서 눈길을 끄는 정도다. 이러한 사업계획은 새집행부
겨울 산천이 본체를 드러내 놓고 있다. 스스로 장식을 제거하고 뼈대를 노출시키고 있어 한층 아름답다. 더욱이 올해는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산이 건조하고 삭막한 분위기마저 든다. 방문을 열고 산을 바라보면 우뚝 우뚝 서있는 산뼈들이 다가서는 것 같다. 그리고 차가운 침묵과 고요가 엄습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마음 속에 번뇌들이 빠져나가고 산 속에 숨어있던 때묻지 않은 고요가 찾아든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생명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비록 개체는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생명체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마음을 비우고 사유(思惟)를 맑히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무아의 경지이다. '나'란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