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수일행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친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친할머니께서는 가을이 되면 추수를 끝내고 정갈하게 다듬은 햇곡식을 머리에 무겁게 이고 손주 중에 유달리 착하다 하시며 나를 데리고 마을 뒤 조그만 암자에 가셔서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할머니 옆에 앉아 절도 따라하고 기도문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불심(佛心)의 씨앗이 나에게 심어진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니 시어머니께서도 진실한 불자셨습니다. 그 당시는 마을 근처에 사찰이 없을 때라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머리에 이고 가는 과일이 어찌 그리 무거웠던지 손자 점시해 주시라는 기복적인 기도에 저도 마음이 동하여 부처님께 애원하는 기도
▲43·반야지 순간순간. 한 순간도 부처님을 잊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슴에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업이 되니 만사형통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불을 자꾸 하면 부처님과 한 마음이 되니 남에게 베풀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저는 평소에 운전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많이 염불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간혹 얌체족 운전사를 맞닥뜨리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거든요. 얌체 운전도 여러 가지입니다. 깜박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차는 물론, 잘 가다가 갑자기 서버리거나 작은 차라고 무섭게 들이대는 덩치 큰 트럭들 모두 얌체족입니다. 운전하면서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저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 건 얌체 운전이 아니었습니다
▲43·반야지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을 믿고 따름으로써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입니다. 극락에 가면 성불합니다. 극락세계는 부처님께서 48원을 세워서 진실한 과보와 진실한 보답으로 만든 실보장엄토요, 아미타 부처님께서 공덕을 지어 만든 공덕장엄토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관음사에선 재작년부터 공파 스님을 모시고 ‘대승기신론’을 1년간 공부하고 또 ‘정토삼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주지스님이신 지현 스님을 모시고 장엄염불을 시작으로 ‘아미타경강기’를 매주 수요일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에 입문하지 6년 된 불자입니다. 6년 전 아이들을 머나먼 호주에 두고 한국에 온 뒤 우울증에 걸릴 뻔 했습니
▲ 47·휴암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기 얼마 전이었다. 스님 법문집을 읽었다. ‘일기일회’와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을 읽으며 과거 의문과 공부를 되살렸다. 이렇게 부평초처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불안과 공포와 욕심과 짜증으로 점철된 삶이 괴로웠다. 그리고 얼마 후 스님이 입적하셨다. 생전에 못 뵌 것이 아쉬워 길상사를 찾았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아침 참선수련에 참여했는데 결국 법정 스님은 나를 40년 동안 끊임없이 격려해주시고 마침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깨달음이 숙명처럼 찾아왔다. 역시 생물학,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이었다. 슈레징거의 고양이는 주·객관에 대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드린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밀폐
▲ 47·휴암 비스킷을 먹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네를 밀어주셨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하얀 옷을 입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이제 떠나야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떠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죽는다고 하셨다. 웃으면서 가셨다. 죽음이 뭔지는 몰랐지만 여하튼 헤어지는 것이라 울며 매달렸다. 울다가 잠에서 깼다. 할아버지는 멀쩡히 잔디에 물을 뿌리고 계셨다. 6세 때 일이다. 죽음은 이렇게 강렬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동안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로 가실까?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죽음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이 있을까 등등의 고통스런 생각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느덧 그런 생각은 일상
▲ 62·경주 눈이 수북하게 쌓이고 볼을 에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날, 고등학생 10여명과 선생님 한 분이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60년대 덕산 삼거리에서 수덕사까지 10리 이상을 걸어 수련대회를 가는 풍경이다. 당시 장항선 기차를 타고 3시간 이상 걸려 삽교역에 도착, 해미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덕산삼거리에서 내려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2였던 내게 세속과 단절됐던 수덕사 절간에서 열흘 동안의 참선정진과 원담(혜공) 큰스님 법성게 강의는 인생에 크나큰 자량이 되었다.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 봉은사에서 광덕 큰스님을 뵙고, 달밤에 하얀 배꽃이 핀 배밭을 지나 나루터로 오던 기억은 어제 일인 듯 가깝
▲62·경주 11년 11월11일! 새벽 5시30분쯤 평생도반 수형 보살과 집을 나섰다. 오늘은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기로 한 날이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보리방편문 120독, 아미타불 금륜관 1200념의 새벽일과를 마치고, 금강 카페에 제2차 염불선 천일수행 714일째 수행기를 올린 뒤다. 도시의 번잡함을 뒤로 하고, 운무와 어우러진 산세가 실경 산수화보다 아름다운 길들을 지나 월정사에 다다랐다.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 너머 옷을 다 벗은 키 높은 나무들이, 일주일쯤 전이면 화려했을 단풍을 추억하며, 내방객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상원사 내 찻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일행들과 적멸보궁을 향했다. 평일이어서 인적이
▲50·덕성화 어머니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갑갑한 마음이 들던 차에 딱 적절한 곳이 문수선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풍습은 하나도 모르는데 가지 않으련다’는 어머니를 막무가내로 모셔왔다. 처음 왔을 때 감정이 위축되고 세상사 당신 탓만 했는데 무비 스님을 뵌 순간 신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구절과 이 세상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 그리고 사람이 부처님이란 법문을 듣고 어머니는 지금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또 사경반 여러 보살들도 친절하게 잘 안내 해주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람 사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고 바로 그날부터 사경반에 입학을 했다. 어머니가 처음 사경할 때는 너무
▲50·덕성화 35년 전 쯤에 부모님께서 사기를 당해 숙식이 어려운 상황일 때 일이다. 방세와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재학 중인 학교 뒷산에 천막을 쳤다. 재학생을 비정하게 쫓아내진 않을 거란 생각에서 오빠와 둘이 의논해 부산대 뒷산에 천막을 치게 됐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모셔와 부모님과 함께 살며 산 속에 구덩이를 파서 콩나물을 키워 팔았다. 또 산에 병아리를 풀어 놓고 산닭을 키우며 생활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해서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나마 있던 천막을 철거당했다. 하지만 산에서 모은 조그만 돈으로 집식구들과 내려와 3평 남짓한 단칸셋방에서 8명이 생활했다. 다행스럽게도 졸업 전 오빠와 나는 취직을 했고, 가족들 모두 푼돈을 열심히 모았다. 그 무
▲58·진여화 집에 와선 시간이 날 적마다 인터넷으로 염화실 카페에 들어가 계속 듣습니다. 복습을 하면서 한문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초등학생용 한문노트를 사다가 그려나갔지요. 그야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었어요. 큰스님께서 번역하신 한글법화경(이것이 불교다)도 비교해 가면서 썼습니다. 영어법화경책도 구입해서 같이 써내려갔습니다. 한문노트에 한문으로 쓰고 그 밑의 칸에 비교해 가면서 영어로 써내려 갑니다. 금강경보다 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있습니다. 한문학자인 Burton Watson씨가 한문법화경을 영어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는 한문법화경과 순서랑 내용이 같습니다. 모르는 단어 나오면 영어사전 찿고 모
▲58·진여화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금요일!! 무비 큰스님께서 법화경을 강의하시는 문수선원을 가는 날입니다. 물론 끝나고 보살님들과 남아서 사경도 하지요. 무비 큰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 강백으로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내셨고 범어사에서 수행하시면서 전국각지의 법회에서 불자들의 눈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너무 근엄하시어 처음에는 다가가기 조심스러웠지만 가까이 갈수록 인자하시고 자상하시어 자애로운 아버지 같으십니다. 경전도 이치와 시대에 맡게끔 정확히 설명해 주시며 법화경 사경시간에는 처음부터 한자 한자 뜻을 풀어주셔서 어려운 경전이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런 분 곁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큰 행복입니다.
대대로 유교적 가풍이 뿌리 깊은 야성 송씨 가문으로 출가해 농사지으며 1남4녀 기르고 교육시켰습니다. 40대에 접어들어서야 지역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절에 다녔습니다. 나름대로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때인가 마음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법회나 법문 같은 것은 몰랐습니다. 공양미를 이고 가서 부처님 전에 치성을 드리는 것이 신행생활 전부였습니다. 불교가 복 빌고 재수 빌고 하는 이런 것만은 아닐 텐데, 무엇인가 가르침이 있고 실천 덕목이 있을 텐데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침 풍기장에 갔다가 불자 친구로부터 풍기불교법우회라는 신행단체에서 매주 금요일 법회를 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불교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