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9일 입적 덕숭총림 2대 방장 “보고-듣고-행하는 모든 것이 공부”강조 벽초 스님은 수덕사가 오늘날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5대 총림의 하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됐던 인물이다. 1899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벽초 스님은 9살 되던 해 어느 날 탁발을 나온 만공 스님의 청빈한 모습과 수행자로서의 위의에 감복해 그 길로 스님의 아버지와 함께 만공 스님을 따라 수덕사로 출가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스님은 만공 스님으로부터 대자유인의 길은 불법의 진리를 깨닫는 것에 있음을 배웠고 오직 수행을 통해 일대사의 진리를 배워나갈 수 있음을 터득했던 것이다. 출가와 함께 스님은 은사 만공 스님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지리산 등 전국의 제방 선방
1929년 5월 6일 입적 당대 대강백 찾아 수학 황무지 개간, 농작물 재배 “지계 실천하면 삶 여법” “일하지 않는 중은 먹지도 말라.” 일제하에서 불교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승려도 일을 해야한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사상을 주창한 학명 스님은 근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의 한 명으로 꼽힌다. 1867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병든 부친과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등 힘든 청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해 항상 열망을 품어오던 스님은 20세 무렵 부친이 별세한 직후 국내명산을 돌아보겠다며 길을 떠났다. 전국을 돌고 돌아 순암 구암사에 도착한 스님은 그곳에서 학인 40여명이 수학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 종회의장 법등 스님, 교구본사 주지 스님 등 조계종을 대표하는 지도자 30여명이 5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이라크에서 평화적인 재건 활동에 진력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위로하고 이라크에 평화가 정착하기를 발원하는 평화의 등을 점등한다. 법장 스님은 자이툰 부대 장병들과 함께 공양을 들어가며 노고를 위로한 뒤 장병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 조계종 지도자들의 자이툰 부대 방문은 ‘불기 254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이라크의 평화와 치안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장병들을 종교지도자로서 격려하고 위로하자’는 순수한 의미에서 마련됐다. 법장 스님과 자이툰 부대 방문단은 항공편으로 쿠웨이트로 이동한 뒤 군용기를 이용해 자이툰 부대
1930년 4월 유점사 득도 70년 태고종 첫 총무원장 13·16대 종정 역임도 “공부 기본은 지계” 강조 덕암 스님은 선과 교, 염불과 계율 등 어느 한 분야도 빠질게 없는 스님으로 많은 불자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특히 50년대 비구·대처승들간의 분규 와중에서 대처쪽인 태고종의 편에 섰음에도 스님은 태고종도 뿐 아니라 조계종 스님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비록 서로의 정치적 이해는 달랐지만 스님은 수행-포교-교육에 있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이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14년 1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잔병이 많아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원적사를 찾았던 스님의 어머니는 그 곳에 주석 하던 석교 스님으로부터 “성스러운 사
“원장 취임 이후 지난 2년 간 종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사회적으로 종단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최근 발생한 종단과 관련된 문제로 한순간에 그 위상이 추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4월 27일 오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과 4층 집무실에서 부처님오신날(5월 15일)을 앞두고 가진 교계 종단 출입 기자들과 가진 오찬에 앞서 중앙종회의원 영담 스님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불교중앙박물관 불사에 관한 문제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화엄사 국고 보조금 횡령 사건에 이어 중앙박물관 불사 문제 등 최근 잇따라 터지는 종단의 문제로 종단의 위상이 실추되고 있는 데 대해 법장 스님은 “부덕해서 그렇겠지”라는 자책 섞인 말을 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1965년 4월 입적 주시경에 한글교육 받아 성철-광덕 등 제자 육성 철저한 지계정신 강조 “인간의 身病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 조선총독부가 세운 의학전문학교의 졸업을 목전에 둔 청년은 용성 스님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자 말문이 막혔다. 이 ‘마음의 병’을 어찌해야 하나. 결국 청년은 인간의 몸을 고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화두가 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법’을 찾아 출가를 결심한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 불교의 주춧돌을 세운 대선사 동산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이다. 스님은 1890년 2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에서 정경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본명은 동규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기에 소년시절
89년 4월 13일 별세 7세에 출가 22세에 강주 「불교시보」창간 후 친일 내선일치·학도병 강권 등 이회광, 권상로 등과 더불어 일제식민지 치하의 대표적인 친일승으로 손꼽히는 대은 김태흡. 그는 한때 불교계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학승이자,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뜻을 이룬 인물로 주목받던 시절이 있었다. 1899년 강화도에서 출생한 김태흡은 세살되던해부터 할머니와 떨어져 강원도 산골의 한절에서 성장해야했다. 사찰에서 자라던 그는 7세에 심원사 계암을 은사로 출가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던 것과는 달리 김태흡은 대단히 영민했고 학문에도 큰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법주사 강원을 졸업한 그는 전국의 대강백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92
1937년 3월 출가 81년 조계종 종정 추대 철저한 원칙주의 고수 “수행자 본분, 수행”강조 퇴옹당 성철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해방 후 정화 운동 등 종단 안팎에서 발생한 각종 문제로 인해 쇠퇴기를 맞던 한국불교에 선풍을 진작시키면서 한국불교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위없는 깨달음을 위해 평생을 일관된 삶을 추구했던 수행자로서 불교 뿐 아니라 타종교인들 조차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191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 스님은 하이네의 시집을 통독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자주 갖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 20살 되던 해 결혼을 했고 두 딸을 낳을
1981년 3월 19일 입적 日 도쿄대서 ‘보조’ 전공 “조계종조는 보조” 주장 정화운동의 이념 제공도 불화 이재열 거사는 평생을 조계종사 정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조계종 종조(宗祖)를 고려 보조국사로 보아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는가 하면 1950∼60년대 청정 비구 승단 건설을 위한 정화운동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1915년 3월 1일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한 이재열 거사는 1931년 3월 대포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학업을 계속하고자 서울로 유학했다가 이듬해 당시 운허 스님이 주석해 있던 봉선사로 출가해 대허 스님을 은사로 운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3년 간 봉선사 홍법강원에서 운허 스님에게 사미과와 초등과 중등과를 수료한 그는 1935년
한용운과 3·1운동 참가 18세에 용문사 출가 조선의열단-임시정부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운암(雲岩) 김성숙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불교계 대표적 항일 투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한용운, 김법린 등과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이후 조선의열단, 재중조선 총동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등의 항일단체에 참가해 주요 요직을 맡으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성숙은 어릴 때부터 가난과 함께 일본 식민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암울한 시대상황과도 싸움을 해야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16년 김성숙은 집안의 삼촌이
33년 3월 개성박물관장 경성제대서 미술사 전공 10년간 150편 저술 남겨 불교미술사 중요성 일깨워 우현(又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술사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 미술사학을 전공해 한국미술사 연구의 첫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 그의 문하에 많은 학자들을 배출해 해방 후 한국미술사학계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05년 2월 인천에서 태어난 고유섭 선생은 1925년 서울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재능을 보여왔던 그는 경성제대 예과 시절 유진오, 이효석 등과 문우회를 조직해 시작(詩作)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예과를 마친 고 선생은 이후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우에노 나오
1992년 2월 7일 입적 4만8천여권 율서 발간 한국불교 율 중흥에 헌신 81년 전계대화상 추대 자운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일제시대 왜색화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청정계율을 근간으로 수행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는가하면 율장 연구와 한국불교 율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1911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나이 15세 되던 1926년 어머니를 따라 찾았던 오대산 상원사에서 혜운 스님이 들려준 ‘백년삼만육천일 불급승가반일환(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 세속의 100년 3만 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이라는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를 듣고 출가의 발원을 세우고 이듬해 해인사 혜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