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유를 얻겠다고 길을 떠난 구도자들이 스승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분별을 내려놓아라”일 것이다. 분별만 멈추면 구도자가 그리던 우리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자주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도대체 분별이 무엇이길래 그렇게도 구도자는 분별을 하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나눠 볼까 한다.우선 분별이라고 하면 나눌 분(分), 다를 별(別)을 써서 무언가를 달리 나눈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 분별한다. 더불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 하
초기 개신교는 학교, 병원, 교회라는 근대 시설을 기반으로 선교하며 성장을 가속화했다. 나는 1919년 통계를 기준으로 초기 개신교에서 학교, 병원, 헌금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이 통계는 초기 개신교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조선총독부 잡지인 1920년 5월호 ‘조선휘보’와 1920년 7월호 ‘조선’에 실린 학무국 종교과 소속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의 “조선의 기독교 각파”라는 글을 참고했다.당시
귀촌한 뜻을 묻는 오랜 친구에게퉁명스레 한 말씀을 나는 던졌다.여기 죽으러 들어왔지 달리 무슨 뜻을 두겠나선산 자드락에유류품처럼 흙 한줌 더 얹어놓고휘적휘적 가는 홀가분함이지.내 가고 난 뒷날에도이 전가(田家)의 뜨락에서누군가는 여전 지켜보겠지,꽃망울이 뭉글뭉글 부푸는 저 소릴배곯고 잉잉거리는 벌이나 나빌 제 젖먹이처럼 데리고 빨릴하루하루 불어터지는 꽃망울들이신열에 뜬 벚나무를.(‘시로 여는 세상’ 82, 2022년 여름호)도연명(陶淵明, 365~427)은 41세에 귀향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명시를 남겼다. 지금이야 41
마조선이 전개되는 시기는 선종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시대와 맞물려 있다. 마조선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불교의 최성기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 때이다. 당시 불교는 정치적·사회적 보호정책 등으로 국가불교적인 성격을 띠면서 천태종·법상종·화엄종·선종 등 8종이 형성되었다. 교학불교의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최대의 전성기를 누릴 무렵, 당나라는 2건의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던 무종[在位 840∼846] 때 일어난 회창파불(845∼847)이고, 또 하나는 회창파불보다 80여 년 앞서서 일어난 안록산의 난(755∼76
① 가난한 노파, 한 개의 등만사위성 바사닉 왕이 부처님을 모시고 궁중 법회를 열었지. 불제자들이 궁 안에 가득.이름난 부자 한 사람이 많은 인부를 시켜,부처님과 제자들이 돌아가실 길에 등을 달았지.대궐 대문에서 기원정사 소원의 탑까지 등줄 잇기, 꽃등 달기. 고운 꽃등이 1만 개. 성문 밖에 사는 착한 노파가 이 소식을 들었지. “나도 부처님 다니시는 길에 등을 밝히자.”그러나 노파는 끼니를 걸식하는 가난뱅이.여러 집을 다니며 한 푼씩 얻어 모아 겨우겨우, 꽃등 하나를 사서 달았지. 날이 어둡자 꽃등마다 불이 켜졌지. 만 개의 등
지난 글에서는 부처님 재세 시절 무렵, 스님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며, 다만 그 돈의 관리와 지출을 재가자에게 맡겼다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은 재가자는 스님들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이것을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율장에 보인다.우리말 경전에서 주로 녹자모(鹿子母)로 등장하는 므리가라마따(Mrgaramata)의 원래 이름은 위사카(Visakha)이다. 마가다국 사람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예류과를 얻을 정도로 현명한 여인이었으며, 이후에 ‘녹자모강당’이라고 불린 정사를 교단에 기증한 부자이기도 했다. 그녀
“중생이 생사의 바다를 오래도록 떠도는 이유는 실로 계율이라는 공덕의 나룻배가 없기 때문이다. 계율의 나룻배를 타고 자비의 노를 젓는다면, 반드시 풍랑을 헤치고 멀리 피안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가르침이 많더라도, 한결같이 계율을 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나갈 때는 반드시 문을 통해 나가는 줄 알면서, 어찌 이 계율을 통해 나가지 않는가?” (‘광홍명집’ 계공편 서문)종남산 줄기의 중앙에 자리한 용담희수풍경구(龍潭戱水風景區)의 차도를 따라 구비구비 오르다 보면 길 바로 옆에 산문(山門)이 보인다. 사찰도 보이지 않는 곳에
하동 쌍계사에 세워진 ‘대공탑비문’에는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한 내용, 부친의 수행 성품, 어머니의 태몽, 어려웠던 가정형편, 삭발 후의 수행과정, 선사의 생김새와 용모, 당시 왕들과 진감선사의 일화, 홍법 활동과 의미, 법력과 성품 등 진감선사에 관한 내용이 한 권의 책이라 할 정도로 빽빽하다. 비문에 표시된 ②부분을 보면 진감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에서 벼슬하던 사람이었으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다 신라로 이주하여 금마(현 익산)에 살았고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原) 어머니는 고(顧)씨였다. 30세 되던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왜냐하면 만약 어떤 이가 ‘여래께서 설한 바 법이 있다’ 라고 한다면, 곧 부처님 법을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니라.만약 어떤 사람이 무념(無念), 무법(無法), 무설(無說)을 알지 못하고 ‘여래가 설하신 법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불법과 불설을 통달하지 못한 까닭이니,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가 있느니 없느니 분별하는 것이니, 부처님 법을 훼방하는 것과
어느날 밤늦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방 안의 전등이 깜빡깜빡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론 멀쩡했기에 “어 이거 뭐지”하고 잠을 청하려는 찰나 이상하게도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불안을 떨쳐내려 해도 어두컴컴한 수령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4시간 정도 뒤척이다 번뇌망상에 휩쓸리지 말라는 김태완 무심선원장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오른손으로 허벅지를 “탁” 치면서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어디서 망상에 빠져있는가” 하고 스스로 다그치니 머리가 깔끔하게 맑아졌다.이런 신기한 체험을 여
엊그제 마흔두 번째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생각해보면 10년 세월이 훨씬 넘었다. 그 시간을 함께해 주신 불자님들이 감동이었다. 축원문을 굳이 찾지 않아도 가족의 스토리를 모두 알 수 있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시험을 치를 자녀가 있는 가족, 건강하였던 남편이 갑자기 건강을 잃어 방황했던 가족 그리고 뜬금없이 학교를 그만둔다는 아이들이 있는 가족,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세상을 달리하신 가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상의 고통을 함께해 온 겹겹의 인연들…. 누군가가 행복지수에 대하여 말하였던 기억이 난다. 행복의 기준은
‘구름 가까이에 선 골짜기 돌아/ 스님 한 분 안 보이는 절간 마당,/ 작은 불상 하나 마음 문 열어놓고/ 춥거든 내 몸 안에까지 들어오라네. … …’(마종기 시 ‘개심사’ 중) 절로 들어서는 길은 드세지 않다. 좀 더 깊은 숲으로 난 한적한 오솔길이다.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라 새겨진 작은 돌 두 개가 순례객을 맞는다. ‘마음 씻는 곳, 마음 여는 절’. 사적기에 따르면, 혜감 국사(慧鑑 國師)가 창건(654)하며 개원사(開元寺)라 하던 것을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1350)하며 개심사로 고쳤다고 한다. 작은 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