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선망부모·자손도동시대를 함께 사는 이웃 자성자리 바르게 본다면바로 그 순간 천도된 것 ▲무비 스님 백중을 앞두고 많은 불자들이 선망부모천도재를 봉행하고 계십니다. 백중기도는 돌아가신 선망부모를 위해 부처님법에 의지해 천도해드리는 의식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49재를 잘 지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찰에서 왜 거듭 천도재를 지내는지 질문들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는 이전 생에 수없이 죽고 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어느 생에선가 여러분의 자손이었던 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늘 이 순간 법왕루에서 천도재를 봉행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선 스님 오늘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의 개금불사 회향을 맞아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사부대중 여러분, 참으로 장하십니다.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에 계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다른 이름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합니다. 서방 극락정토에 계시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서 그 자비광명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량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을 모신 전각엔 행복이 흘러 넘치기에 극락전이라 합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성불하기 전 법장이라는 이름의 비구로 수행하며 48가지의 큰 원력[四十八大願]을 세웠는데, 그 중 한 가지 서원으로 ‘부처가
▲혜담 스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비롯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큰 일이 많았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스님들까지 무기를 잡고 민족을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국난은 단순한 나라의 위기가 아닌 민중들의 고통과 역경이었습니다. 이런 역경과 시련이 가득한 상황을 당해 우리 조상들은 과연 어떻게 했던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고려시대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우리 민족은 팔만대장경을 조성했습니다. 3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불사를 했습니다. 혹자는 외세가 밀려와서 어려울 때 칼을 만들고 화살을 만들어야지 왜 대장경을 만들었냐고
▲현응 스님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배우는 행복입니다. 올해의 봉축 표어가 ‘마음의 평화, 세상의 행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표어입니다. 마음의 평화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세상의 행복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가장 누리고 싶은 덕목이며 가치 아니겠습니까. 평화와 행복이라는 말은 불교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종교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일상에서도 늘 추구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덕목은 평화와 행복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에 다다르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설정 스님 인생을 흔히 예술작품에 비유합니다. 누구나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열정과 의지, 지혜를 모두 쏟아 부어 예술품을 만들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걸작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희망,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졸작을 만들어서 자신도 불행해지고, 남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걸작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졸작을 만들 것인지는 누가 결정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를 고의 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삼재와 팔난이 계속되는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늘
▲지홍 스님 법우 형제 여러분 반갑습니다. 올해도 벌써 사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중생의 아픔 따라 오신 부처님’이라는 주제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화엄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생은 죄악이 깊고 두려움에 싸여있다. 백 천겁 동안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해서 생사에 표류하며 온갖 고통 받을 때, 이들을 구하려고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네.’ 이 세상 중생들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건지기 위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금강 스님 4개월 전쯤 이 법회의 법문을 요청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지난해 이 법회가 시작된 후 매달 마음을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과 제가 오늘 한 마음을 냈기 때문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함께 만나려고 한다면 둘이 마음이 깊어져야 하지만 마음은 늘 변할 수 있어요. 그 마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첫 마음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한 번 마음 냈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라 오늘 아침에 또 다시 그 마음을 일으켜야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초심(初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처음마음. 선심초심. 선심은 바로 첫 마음에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17살에 출가했습
▲지환 스님 인간은 누구나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고자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다.’이것은 깨달은 사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는 서양의 사상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행복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행복은 절대적인 참 행복과 상대적인 거짓행복, 이렇게 두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먼저 참다운 행복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참다운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참마음의 속성이 참다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표층의식인 겉마음이 참마음 그 자체와 완전히 하나로 통할 때만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말
▲우진 스님 오늘의 주제는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화엄경’을 펼쳐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모습의 첫 번 째는 ‘이행(二行)이 영원히 멈추었다’입니다. 이행이라는 것은 이분법적 행동입니다. 좋다-나쁘다, 한다-안한다, 좋다-싫다, 예쁘다-추하다 등 모든 두 가지 생각의 패턴, 행동의 패턴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나누어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습들이 없어졌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 째는 ‘달무상법(達無相法)’입니다. 형상이 없는 법을 통달했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상을 따라 움직입니다. 유형의 존재 를 내가 얻었다, 있다
▲도일 스님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신앙이 아닌 신행(信行)이 중심입니다. 맹목적으로 믿을 수도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그렇다고 인정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어 자기 인생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이죠. 그런데 신행은 믿음의 바탕 위에 우리가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이해하고 난 뒤에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신행은 보다 냉철하다고 할까, 이성적이라고 할까. 신행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맹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것이 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이 한 말 중에 ‘불법문중에 인정이라고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각 스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봄이 시작된다는 절기입니다. 동양에서는 1년을 24절기로 나눕니다. 그 24절기의 첫 시작이 입춘입니다. 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입춘이 지나면 우수, 경칩, 춘분, 청명이 지나고 봄기운, 생명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봄이라고 하면 불자님들은 어떤 것이 떠오르십니까. 봄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특히 입춘은 혹독한 겨울의 기억, 음울하고 어두운 기운을 흘려보내고 다가오는 따뜻한 기운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봄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봄은 반드시 겨울을 거쳐야만 옵니다. 겨울을 지나서 오기에 봄은 더 따
▲ 김지하 교수 5년 전 라인 강가에서 만난 독일 녹색당 간부인 생태학자 ‘미카엘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럽과 독일의 녹색당과 생태학은 끝났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녹색당이 일어나야 한다. 불교, 화엄불교와 선(禪)에 토대를 둔 변혁적 생명학으로부터!.’ 그때 자기들은 그것을 계기로 큰 자기비판을 통해 거듭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끝났다’는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결론일까요.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일어나야한다는 녹색당의 그 변혁적 생명학은 불교, 화엄불교와 선의 그 무엇에 중심근거를 둔 새 학문이란 말인가요.오늘 강의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생태학이란 무엇인가? 1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