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멸 없는 자신의 성품을 보게 되면부처님과 다름없고 만법근원과 같아 선과 악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면자연스레 마음 본질 들어갈 수 있어 37. 한 생각에 온갖 법이 수행터 심사정 作. 절노도해도. 개인소장. 如悟入宗鏡中 成佛不離一念. 若前念是凡 後念是聖 此猶別敎所收. 今不動無明 全成正覺故 華嚴論云 如將寶位 直授凡庸 如夜夢千秋 覺已隨滅. 傅大士 白梁武帝云 今欲將如意寶珠 淸淨解脫 照徹十方 光色微妙 難可思議 意欲施於人主 若受者 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若一念決定信受者 不隔刹那 便登覺位. 如維摩經云 維摩詰言 然汝等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是卽出家 是卽具足. 종경 속에서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는 것도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중생의 부처요중생은 또한 부처님 중생 마음바탕 하나로 같아도중생에겐 어리석음 되고부처에겐 깨달음이 된다 36. 온갖 법이 부처님의 도 전남보성대원사 극락전의 벽화. 百門義海 云. 發菩提者 今了達 一切衆生 及塵毛等 無性之理. 以成佛菩提智故 所以 於佛菩提身中 見 一切衆生 成等正覺. 又 衆生及塵毛等 全以佛菩提之理成衆生故 所以 於衆生菩提中 見佛修菩提行. 是故 佛是衆生之佛 衆生卽佛之衆生. 縱有開合 終無差別. 如是見者 名菩提 心起同體大悲 敎化衆生也. 『백문의해』에서 말하였다.“깨달음이란 지금 모든 중생의 번뇌 속에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의 이치를 환히 아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가진 깨달음의 지혜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서 모든 중생이
34. 성불의 이치는 무엇인가 問 夫釋迦文佛 開衆生心 成佛知見 達磨初祖 直指人心 見性成佛 若體此一心 云何是成佛之理. 문 :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을 밝혀 부처님의 지견을 이루었고, 달마 대사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아 성불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이 한마음을 체득하는 것이라면 성불의 이치는 무엇입니까? 答 一心不動 諸法無性 以無性故 悉皆成佛. 華嚴經 云. 답 : 한마음은 움직이지 않으니 온갖 법에 결정된 성품이 없어 ‘무성(無性)’이고, 온갖 법에 결정된 성품이 없어 ‘무성’이므로 모든 것이 다 성불한다. 이 내용을 『화엄경』에서 보현과 묘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佛子 如來 成正覺時 於其身中 普見一切衆生成正覺 乃至 普見一切衆生入涅槃. 皆同一性 所謂無性. 無何等性.
열반송. 일지 이홍기 作. 30. 하나의 마음으로 원융하기 때문 以理在一爲內 在多爲外 事亦以一爲內 以多爲外. 何故 如是 一多內外 相遍相在 而無障礙. 唯是一心圓融故. 寄理事以彰之 以體寂邊 目之爲理 以用動邊 目之爲事. 以理是心之性 以事是心之相 性相俱心 所以 一切無礙. 이법(理法)이 하나로 모아질 때는 마음 안쪽 작용이 되고 여러 갈래로 나타날 때는 마음 바깥쪽 현상이 되며, 사법(事法)도 하나로 모아질 때는 마음 안쪽 작용이 되고 여러 갈래로 나타날 때는 마음 바깥쪽 현상이 된다. 어째서 이와 같이 일(一)과 다(多), 내(內)와 외(外)로 서로 두루 존재하면서도 장애가 없는 것인가?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원융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음이 이법과 사법에
중생은 ‘나’라는 모습에 집착해자신만의 중생계를 만들어낸다 수행 통해 무명 실체 알게 되면이것이 깨달음이며 부처님 세상 不立文字. 일지 이홍기 作. 27. 방편은 다르나 본질은 같아 問 一心平等 理絶偏圓 云何敎中 又說諸法異. 문 : 한마음은 평등하여 이치로는 ‘치우쳤다거나 원만하다는 온갖 상대적 개념’이 끊어진 자리인데, ‘모든 법이 다르다’고 하는 가르침은 또 어떤 뜻입니까? 答 隨情說異 雖異而同 對執說同 雖同而異. 將同破異 將異破同. 雖同雖異 非異非同. 如云 捉子之矛 刺子之楯 亦如騎賊馬逐賊 以聲止聲. 所以 云 朝四暮三 令衆狙而喜悅. 苦塗水洗養嬰兒 以適時 皆是俯順機宜 善權方便. 如莊子云 勞
한산장대구(寒山長大口).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24. 한마음으로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을 뿐 問 此宗鏡中 如何信入. 答 但不動一心 不住諸法 無能所之證 亡智解之心 則是無信之信 不入之入. 문 : 이 종경속으로 어떻게 믿고 들어가야 합니까? 답 : 다만 ‘움직이지 않는 한마음’으로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나와 경계의 분별이 없는 증득’이요 ‘알음알이 지혜가 사라진 마음’이니, 이는 곧 믿을 대상이 없기에 ‘완성된 믿음’이요 들어갈 대상이 없기에 ‘들어가지 않고도 종경에 들어간 것’이니라. 강설) ‘종경(宗鏡)’의 ‘종(宗)’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경(鏡)’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비추어 주는 부처님의 마음을 거울에 비
하늘가는 길. 일지 이홍기 作. 작가 소장. 20. 보적삼매란 무엇인가 入法界體性經 云 文殊師利 復白佛言 以何因緣 名以三昧 爲寶積耶. 佛告 文殊師利 譬如大摩尼寶 善磨瑩已 安置淨處 隨彼地方 出諸珍寶 不可窮盡. 如是 文殊師利 我住此三昧 觀於東方 見無量阿僧祇世界現在諸佛 如來阿羅訶三藐三佛陀. 如是南西北方 四維上下 如是十方無量阿僧祇世界 我皆現見 是諸如來 住此三昧 爲衆說法. 文殊師利 我住此三昧 不見一法 然非法界. 『입법계체성경』에서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삼매를 ‘보적(寶積)’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묻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비유하면 마치 티 하나 없는 마니주 큰 보배구슬을 깨끗한 곳에 두면 그것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온갖 보물이 끝없이 나오는 것과 같기 때
일곱 발자국.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도를 닦아서 얻게 된다면조작이니 참다운 도 아니요만약 본디 있는 것이라면온갖 수행이 쓸데없는 짓” “본인 눈 뜨면 그 자리에부처님의 세상이 드러나” 18. 오늘부터 부처님 세상에 있기에 經云. 舍利弗問 何故 諸賢復發此言 從今日始 不以佛爲聖師. 諸比丘報曰 從今日始 自在其地 不在他鄕 自歸於己 不歸他人 以爲師主 不用他師 是以 故往 不以佛爲聖師. 乃至於是 世尊 讚諸比丘 善哉善哉 其於諸法 無所得者 乃爲眞得. 此乃但可自知 方見眞實. 所以 千聖拱手 作計校不成. 경에서 말하였다. 사리불이 “오늘부터 여러분은 왜 ‘부처님을 성스런 스승으로 삼지 않겠다.’ 말합니까?” 묻자, 모든 비구들이 “저희들은 오늘부터 부처님 세상에 있기에 다른 곳에
움직이지 않는 본 마음자리는 진공이요온갖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묘유이다 진공이 묘유이고 또한 묘유가 진공이니‘반야심경’ 공즉시색·색즉시공과 같아 趙州의 無. 일지 이홍기 作. 법련사 소장. 16. 생각하기 어려운 것 居見聞之地 卽見聞之不及 處思議之際 卽思議之不測 皆由不思議體 自不可得故 卽思不可思. 經云 所思不可思 是名爲難思. ‘보고 듣는 곳’에서 보고 들을 수 없고 ‘생각하는 곳’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두 ‘생각할 수 없는 바탕’으로 말미암아 본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는 곳’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 “생각하는 곳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 이를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 강설)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나와 열반 있다고 집착하면 상견나와 열반 없다고 집착하면 단견 인연 모여 결정된 실체 없음이 공성공성,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인연법 실제 없는 것 오묘하게 있게 되니이것을 묘유 또는 환유라 부른다 히말라야 명상곡 I. 일지 이홍기 作. 13. 모든 것 空이고 결정된 성품 없어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 則妄心分別 情計謂有. 然有卽不有 故云 一切空無性 常有常空. 是卽萬物之自虛 豈待宰割 以求通哉. 因緣無性論 云. 阿難調達 並爲世尊之弟 羅睺善星 同是如來之胤 而阿難常親給侍 調達每興害逆 羅睺則護珠莫犯 善星則破器難收. 以此而觀 諒可知矣 若云 各有自性 不可遷貿者 此殊不然 至如鷹化爲鳩 本心頓盡 橘變成枳 前味永消. 故知 有情無情 各無定性. 但隨心變 唯逐業
天地人三合.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12.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물 곳 夫無常有二 一者 敗壞無常 二者 念念無常. 人只知壞滅無常 而不覺念念無常. 論云 若動而靜 似去而留 經說 無常速疾 猶似流動. 據理 雖則無常 前後不相往來 故如靜也. 雖則念念謝往 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故如留也. 又 雖說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而宛然念念不住 前後相續也. 則非常非斷 非動非靜 見物性之原也. 무상(無常)에 두 종류가 있으니 눈에 보이는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는 무상[敗壞無常]과 생각이 순간순간 변해 가는 무상[念念無常]이다. 사람들은 다만 눈에 보이는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허물어져 가는 무상만 알고, 생각이 순간순간 변해 가는 무상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논에서는 무상을 “움직이고 있으
春茶.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9. 참된 깨달음 자체의 모습도 問 不覺妄心 元無自體 今已覺悟 妄心起時 無有初相 則全成眞覺 此眞覺相 爲復隨妄俱遣 爲當始終建立. 答 因妄說眞 眞無自相. 從眞起妄 妄體本虛. 妄旣歸空 眞亦不立. 문 : 허망한 마음이 본래 그 바탕이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 지금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애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곧 참된 깨달음을 온전히 성취한 것입니다. 이 참된 깨달음을 다시 허망한 마음과 함께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까? 답 : 허망한 마음이 있음으로 참된 깨달음을 설하지만 참된 깨달음 자체의 모습도 없다. 참된 깨달음에서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나 허망한 마음의 바탕은 본디 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