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 분리-조선불교의 자율 운영권 보장 주장강대련 등 친일 인사 단죄…총무원 탄생 산파회원만 1000명…총독부의 가혹한 탄압 시련 1922년 열린 30본사 주지들의 회의 모습. 1920년대 총독부의 통치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되어 문화계에 대한 통제가 완화됨에 따라 불교계는 여러 가지 현안 사안에 대한 개혁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현안 사안이란 교육사업과 포교사업 등을 활성화하여 분위기를 일신하고 종래 30본사 주지 중심의 불교계 운영을 보다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그 골자이다. 뿐만 아니라 해인사 주지 이회광의 제2차 조일불교 연합책동으로 말미암아 분열된 교계의 의견을 통합하고, 30본사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통일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1920년 중앙학림학생 중심 창립…조선불교의 자주 요구산하조직 불교유심회 발족…총독부 불교정책 정면 비판 조선불교청년회는 체육활동을 장려했다. 사진은 1922년 배재학당 운동장에서 가진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의 우승 기념사진.사진제공=민족사 1920년 불교계는 이회광의 조일불교 연합책동으로 소란스러웠다. 이 사건은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과 당시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이었던 강대련 사이에 교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조일불교 연합책동은 불교계의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혀서 무산되기는 하였지만 불교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표출시켰다. 당시 불교계는 30본사 주지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은 30본사 주지들의 인사
강대련에 30본산 위원장 내준 후 반전카드로 활용동경유학생 반발…조선불교청년회 탄생 계기 마련 이회광이 일본 승복 하오리 하까마를 입은 모습.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였던 거족적인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이 수그러든 1920년에 들어서 불교계는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이 1910년에 이어 또다시 조선불교계를 일본 불교 임제종과 연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불교계는 또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왜 이화광은 이렇게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1920년 초에 수원 용주사 주지였던 강대련이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회광과 강대련 사이의 갈등이 하나의 원인이었다. 이회광은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추앙되고 있었고, 1908년에
1919년 중국 상해에서 12명 승려 이름으로 발표“7000명 승려 피로써 독립투쟁하겠다” 내용 담겨 선언서 작성자 놓고 백초월·신상원 등 의견‘분분’ 1919년 11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의 독립선언서. (사진제공=민족사)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는 1919년 11월 15일자 중국 상해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굴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있었지만 후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임영정은 1970년 3월 15일자 현재 「불교신문」의 전신인「대한불교」 신문에 이 선언서의 입수 경위와 발견의 의의를 소개하였다. 그가 소개한 내용은 이러하다. 이 선언서는 1
만세시위 주도중앙학림 학생임시정부서 활동 독립투쟁 앞장이종욱 스님 변절오점으로 남아 김봉률 출옥 사진. 해인사 스님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진주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왼쪽부터 백성원·김종률·임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의 큰 사찰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1만세 시위는 3월 말 경이 되자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다. 3·1운동의 의의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의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다는데 있다. 3·1운동은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기록 속 사찰시위 16곳 … 중앙학림학생 확산 주도시위 전 발각도 많아… 총독부의 사찰령 위력 발휘 이순재·김성암 등이 부평리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봉선사 전경. (사진제공=민족사) 나라가 망한 이후 사찰령 체제하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불교계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호응하였다. 기록으로 전하는 만세 시위가 전개된 곳으로는 봉선사(경기도 광주)· 해인사(경남 합천)· 통도사(경남 양산)· 범어사(부산 동래)· 표충사(경남 단장)·동화사(대구)· 도리사(경북 선산)· 석왕사(함남 안변) 등 16곳이며, 이 밖에도 만세 시위는 전국에서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컸던 해
범어사 소속 스님·학생 시위 주도… 31명 구속 옥고치러부설 명정- 지방학림 폐교… 금정중 남아 당시 행적기념 1917년 경 범어사 전경. 범어사는 우리나라의 사찰 가운데 비교적 일찍 개화문물을 받아들였다. 개화승 이동인이 범어사에 머물면서 일본을 왕래하였고, 1906년에는 명정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재정적으로도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승려들이 갑계(甲契)·도종계(都宗契)·서청계(書廳契)·판청계(判廳契) 등을 운영하여 그 기금과 수익금을 사찰에 기부하였다. 신도들 사이에서도 미타계·지장계·나한계·칠성계·열반계 등이 운영되어 사찰 경제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재정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1912년에 경성에 임제종 포교당을 운영할 수 있었고 부산과
사찰서 독립선언서 3000여장 등사… 경남 곳곳서 배포 만세운동 후 만주로 흩어져 독립운동… 많은 희생 치뤄 1915년 무렵의 해인서 전경. 불교계의 3·1운동은 전국에 걸쳐 큰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 기간은 대략 3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였고, 장소는 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 장날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불교계의 3·1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아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서술할 만한 자료가 남아있는 해인사·범어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하고 여타 사찰의 만세 시위는 묶어서 그 대략을 서술하기로 한다. 일제시대에도 해인사는 법보사찰로서 30본사 가운데서도 재적 승려 수와 재정적인 면에서도 비교적 형편이
전국 주요 사찰에서 전개… 사찰령 폐지 운동으로 점화30본사주지 의도적 외면… 산중사찰 많아 지리적 한계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윗쪽 중앙에 있는 두사람 중 오른쪽이 만해. 1919년에 발발한 3·1운동은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7,500여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된 일제시대 가장 큰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 발발 원인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동경 유학생들의 2·8선언을 비롯하여 1918년 11월부터 중국 상해에서 활동한 신한청년당의 활동 등 해외 유학생들의 활약이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
1917년 총독부에 의해 일본불교 시찰단 첫 파견 근대문명 선전하며 독립 의지 꺾고 친일파 양성 불교사찰단이 동경에서 동경불교호국단과 불교연합회가 증상사에서 주최한 한영회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제시대 불교계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서 일본으로 여러 차례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시찰단에 참여였던 승려들은 주로 30본사 주지들과 불교학자, 언론사의 기자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서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행동을 하였으며, 무엇을 느꼈을까. 조선총독부는 왜 승려들의 일본 방문을 지원하였을까. 이것은 불교계 일본 시찰단의 파견 목적과 직결되어있다. 총독부가 불교계의 인사들을 일본 시찰단으로 파견하는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이들로 하여금 일본의 발전상을
1920년 불교 인재양성 위해 총독부 권유로 설립신상완·백성욱·김법린 등 걸출한 인재들 배출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불교계 항일지사 배출구 당시 숭일동 지금의 명륜동 북묘 터에 있었던 중앙학림. 근대 불교계의 당면 과제는 포교·교육·역경사업이었다. 지금도 이 세 가지 사업은 다른 사업에 비해서 종단에서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업은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업은 포교 사업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통하여 해탈을 얻는데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교리를 전파하는 포교 사업이 우선이다. 불교계의 교육 사업은 유능한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역경사업은 어떤 방법으로
이회광-강대련-이능화 등이 친일 단체 결성 주도불교진흥회 최초 친일잡지 ‘불교진흥회월보’ 발간불교도 자발적 참여 부재로 별다른 활동 없이 해산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불교진흥회 제1회 정기총회 모습. 친일파 문제는 많은 시비와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민감한 사안이다. 친일파란 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부터 개인의 행적을 판단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친일 단체는 설립 취지와 목적 그리고 구체적인 행위 나아가서 구성원의 성향까지 고려해서 판단할 문제이다. 먼저 친일파의 개념은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치노선에 동조하여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동족을 압박하여 침략전쟁에 참여할 것을 부추긴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