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곁엔 항상 책이 있었다. 어려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후에 인생문제 해결의 길을 책에서 찾았던 서옹 스님은 점차 동서고금의 사상서에도 관심을 가졌고, 출가 이후 ‘임제록’, ‘벽암록’ 등의 내전과 함께 서양철학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스님은 선(禪)을 설명하면서도 늘 현대문명의 발달사를 언급했고, 현대문명의 발달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양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의 글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평소 서양철학서 독서와 관련해 “그냥 잡히는 대로 읽는다”던 스님은 법문을 하면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서옹 스님의 법문 모습. “‘임제록’은 예로부터 선서(禪書) 중의 왕이라고 존중을 받은 어록이며,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명백히 밝히고 자유자재로 행동하는 차별 없는 참사람을 설파하여 동서고금을 통해 제일 귀중한 진서이다.” 서옹 스님은 당나라 선승 임제의현의 설법을 제자 삼성혜연이 편집한 ‘임제록’을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소중한 책으로 평가했다.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선의 진수를 설파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임제록’은 임제종의 시조가 된 임제의현의 상당법어를 비롯해 대중설법, 스승과 제자간의 문답을 담은 감변(勘辨), 행장 기록, 석탑에 각기한 탑기(塔記) 등의 내용으로
▲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 서옹 스님. 사부대중에게 “가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隨處作主), 서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立處皆眞)”며 ‘참사람운동’을 펼쳤던 서옹 스님은 1912년 충남 논산 연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삼촌 집에서 살게 된 스님은 연산보통학교를 다니던 열 살 무렵 서울로 올라와 죽첨보통학교(지금의 금화학교)를 거쳐, 이 학교 5학년 때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러나 스님은 양정고보 2학년 가을 어머니를 여의고 곧이어 할아버지까지 돌아기시면서 어린 나이에 의지하던 이들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후 천지가 무너진듯한 슬픔과 절망감을 주체할
▲1970년대 중반 명성 스님에게 ‘생명의 실상’ 필독을 권하며 보낸 편지. 관응 스님은 선·교의 일치를 몸으로 실천하면서 후학들의 정진을 독려하는데도 아낌이 없었다. 딸 명성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 1만 번을 읽으라는 말로, 출가수행자의 초발심 유지를 강조했던 스님은 ‘선문염송’, ‘선가귀감’ 등 선서(禪書)와 경전을 가까이 하면서도 외전을 외면하지 않았다. 스님은 특히 동서양의 사상서나 철학서를 섭렵할 정도로 관련 서적 보기를 즐겼고, ‘맹자’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은 법문에 인용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법문을 하면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람다운 짓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되려면 사람의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 인간
▲스님은 후학들에게 ‘선가귀감’ 탐독을 권했다. 관응 스님은 모두가 인정하는 대강백이면서도 선(禪)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현대 한국불교 선승 1세대로 꼽히고 있다. 특히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이어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의 6년 결사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범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직지사 조실로 후학을 제접하던 때는 80의 노구임에도 어린 대중들과 함께 수행하고 공양하기를 즐겼다. 당시 대중들이 노승의 편의(?)를 위해 공양을 별도로 마련하자, 스님은 “저놈들 나쁜 놈들이야. 나를 왕따 시키려고 해”라며 못마땅해 하기도 했다. 또 법당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신도
▲관응 스님은 후학들에게 ‘자경문’ 읽기를 권했다. 사부대중에게 ‘마음의 눈을 뜨면 모두가 부처이니 자신 속의 부처와 하나가 되어 부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볼 것’을 당부했던 관응당 지안 스님은 1910년 6월 경북 상주군 외서면 봉강리에서 태어나, 나이 스무살이 되던 1929년 탄옹 스님을 은사로 삼아 상주 남장사로 출가했다. 그러나 한국불교 최고의 강백으로 손꼽히는 관응 스님이지만, 태어나서 출가하기까지의 성장과정이나 출가동기가 뚜렷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후의 학업 및 수행과정에 비춰볼 때 그 또한 범상치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스님은 출가 후 교학을 익히는데 힘을 다해 1934년에 금강산 유점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마치고, 19
▲광덕 스님의 법문 모습. 광덕 스님은 불교적 삶의 출발을 소천 스님의 불교사회과학적 방법론에서 시작했고, 이러한 입장에서 경전을 이해했으며 대장경 반야부는 바로 신앙적 기반이 됐다. 그리고 ‘선관책진’ 발간에 이어 뜻을 같이하는 도반들과 현대선학연구회를 결성해 ‘벽암록’ 등 어록의 현토를 시작하면서 선어록에도 심취했다. 스님은 잘 알려졌듯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만큼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종로의 한 대형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을 살피고 구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책을 통한 문서포교에도 앞장섰고, 그 시작이 바로 1974년 11월 월간 ‘불광’의 창간
▲경전과 책 등을 발췌한 광덕 스님의 법문노트. 광덕 스님은 1946년 모친에 이어 이듬해 둘째 누이까지 세상을 떠난 후 진로를 모색하던 끝에 한국대학(지금의 서경대학교 전신) 법정학부에 입학했으나 폐에 이상이 생겨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때 강의를 맡았던 서울대 철학교수 박종홍은 인간 정신의 부흥을 위해 원효 스님과 보조 스님의 사상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참선을 체험할 것을 당부하며 범어사에서의 요양을 권했다. 그리고 스님은 이 길이 출세간을 향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3개월 요양을 목적으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신병 요양차 범
▲유소년시절부터 책읽기를 즐겼던 광덕 스님. 부처님의 반야지혜 광명으로 우리 자신과 이 사회를 비추어 밝혀가는 ‘불광운동’을 펼치며 불교의 대중화를 견인했던 광덕 스님은 유소년시절부터 유난스럽게 책을 가까이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3km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서 다니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형이 배웠던 고학년 교과서와 형이 빌려다 주는 다양한 책들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몸에 밴 독서열과 탐구열의 효과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고향인 오산읍 내리 고씨 집성촌을 떠나 읍내로 이사를 하면서 치룬 편입 시험에서 나타났다.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2학년이나 월반하여 5학년으로 편입한 것. 이는 곧
▲스님이 평생 책을 보던 책상.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 이후 제방에서의 안거를 거쳐 1955년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앉아 10년간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스님은 그 10년 동안 김병룡 거사로부터 기증 받은 책을 독파하는 것은 물론, 다른 책과 자료들까지 구해 읽는 학구열을 보였다. 또 본인이 장서를 보던 중에, 혹은 간혹 찾아오는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새로운 주장을 담은 책이나 자료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꼭 구해서 읽고야 말았다. 특히 관심을 많이 갖고 있던 분야가 불교교리와 관련된 것들이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 불교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 물리학적 근거, 전생에 대한 실험을 담은 자료 등에도
▲20세까지 읽은 책목록을 기록한 서적기. 성철 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후 동서고금을 막론한 철학서를 탐독하며 지내던 중 20세를 넘기면서 신병요양을 위해 지리산 대원사를 찾았다. 이때까지 불교와 인연이 없던 스님은 여기서 당시 한용운 스님이 발간하던 잡지, ‘불교’를 접하면서 화두공부를 알게 됐다. 스스로를 ‘다독주의자’라고 했던 스님의 불교인연 역시 책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렇게 책을 통해 선(禪)을 알고 스스로 ‘무’자 화두를 든 스님은 그곳에서 대혜 종고 스님의 ‘서장’을 보았다. 이어 영가 현각 스님의 ‘증도가’를 읽고서는 짙게 드리운 안개가 걷히듯눈앞이 밝아지는 경험을 했다. 스님은 훗날 이
10대에 자치통감 통달출가전 철학서만 70권장서가이자 독서광 ▲성철 스님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던 성철 스님(1912~1993)이 제자들에게 “책을 읽지 말라”고 했던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아무리 선가에서 ‘사교입선(捨敎入禪, 교리적 공부를 버리고 체험에 들어가라)’을 강조했다고 하기로서니 제자들에게 책을 읽지 말라고 가르치다니 이 무슨 말씀이냐는 항변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도인의 경지는 남다른 법이다. 옛 중국의 대혜 종고 스님이 문자 선에 매달리는 승려들을 경책하는 방편으로 ‘벽암록’의 판목을 불사르며 사교입선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장’을 지어 수행자들이 지남으로 삼게 한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