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에 대한 대각국사의 안목 탁월업적 재평가와 스님상 화폐 고려를 오늘은 좀 색다른 이야기를 해 보도로 하자. 요사이 나라 안에 지폐를 교환하여 유통시키는 일이 있었는데 지폐의 도안에 말성의 소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기회에 우리나라에서 화폐의 이론에 소상했던 역사적 인물 한 분이 연상되어 살펴보려 한다. 고려 때의 큰 스님이신 대각국사 의천이 화폐에 대한 이론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이 기회에 또다시 생각하게 한다. 의천의 문집인 『대각국사문집』이 전하고는 있지만, 중간에 결장된 부분이 많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문집 안에 한 편의 글이 화폐의 제정에 대해 논한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오늘 날로 말하면 경제학자도 아닌 승려라는 신분으로 화폐에 대해 그렇듯 해박한 안목을 가졌다는 점이 당시 지식
도선사가 올 1월부터 운영하는 강북청소년수련관 전경. 입적하신 청담 스님과 故 강원룡 목사의 종교 화합을 위한 아름다운 인연이 청소년 포교로 이어졌다. 도선사 산하 사회복지법인 혜명복지원(이사장 혜자)은 1월 23일 강북청소년수련관(관장 김준기)에서 수련관 위탁 기념식을 봉행했다. 이로써 혜명복지원은 강북 지역 청소년 포교의 요람격인 수련관을 3년 동안 강북구청으로부터 위탁운영하게 됐다. 이번 위탁은 걸스카우트연맹, YMCA, YWCA 등 8곳이 위탁운영신청서를 제출 했으나 복지시설 운영, 무의탁 독거노인 무료급식 등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혜명복지원의 공헌도가 인정받아 가능했다. 혜명복지원의 강북청소년수련관 위탁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강원룡 목사가
자연의 순리 역행을 문명으로 착각‘동식물을 내 몸처럼’ 가르침 절실 자연 기후의 변화가 날로 가속되어 가는 것 같다. 온 세계가 기상 이변을 겪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우리의 주변만 해도 겨울 가뭄이 심하다. 겨울에 항용 쓰는 말이 삼한사온이라 하여 사흘은 춥고 나흘은 포근하다 하였던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주기적 기온 변화를 의식할 수가 없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심각한 미래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일러 자연의 변화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류가 만들어가는 자연의 교란인 것이다. 일년 사계절의 기후 변화가 자연인데 사람들의 생활은 이러한 자연을 되도록 거스르려는 것이 삶의 질서로 변해 있다. 겨울 추위를 추위로 놓아두려는 것이 아니라 더위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문명사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백지 한 장 차이정상-비정상 사이서 경계 늦추지 말자 세상만사 모든 것이 손등과 손바닥 사이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게 마련이다. 즐거움이나 괴로움의 차이도 마음먹기에 따라 그야말로 백지 한 장의 차이이니, 손바닥을 뒤집는 사이일 뿐이다. 사람살이의 도덕적 가르침도 따지고 보면 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대한 권장과 경계의 갈림을 제시한 것이다. 동양고전의 전형적 시가집이라 할 수 있는 『시경』은 305수의 시를 모아 놓은 것인데, 전하는 말로는 공자가 수집 편찬했다고 한다. 공자가 305편을 가려 놓고서 한 말이 “이 시 300여 편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간사한 생각이 없다(思無邪)’이다” 하였다. 그러니까
잡생각-바른생각 거리는 과연 얼마중생-부처 나누면 어디서 무엇 얻나 모든 사물 존재는 결국은 이것과 저것의 사이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듯이,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밤이 있어서 낮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으로 가려지면 밝음이 사라져 이 둘의 사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 저쪽의 한쪽은 잊어버린다. 어제는 근년에 보기 드문 눈이 내렸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버려 어제 낮까지 존재했던 자연초목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니 그 속에 있을 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얀 은빛의 세계에만 감탄을 하고 있다. 순간으로 변한 눈 앞의 모습을 이렇듯이 몰라보는 것은 항시 현물존재의 한 면만을 보라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범상한 이들의 밝음이 없는 무명(無明)의 탓이다. 이러한 무명이 어찌보면 여러
정치인 많아도 바른 정치인은 없는 사회자신 이름 걸맞게 실천하는지 성찰해야 사람살이에는 항시 상대가 있어야 하니, 그 상대에 따라 주어지는 이름이 다르고 그 이름에 따라 실행해야 할 몫이 뒤따른다. 이 주어지는 몫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사람살이의 바른 행위이다. 이를 일러 사회생활의 윤리 질서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몫을 충실히 이행할 때의 마음 자세는 항시 내가 이 행위 질서에 중심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니, 그런 마음 자세는 어디에서나 주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실현할 수가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에는 이름은 있으되, 그 이름에 걸맞는 몫을 바르게 실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정치인은 많아도 바른 정치는 보기 힘들다거나, 사회 각층에 지도자는 많으나 지도를
조선 승-유가 사심없는 사귐서세계와 어울리는 지혜를 배워야 어떠한 사물을 살피든지 한 면만을 보다 보면 한 면은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범인들의 안목이다. 마치 양지쪽만 바라보다 보면 추위에 떨고 있는 음지를 잊는 것이나 같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보는 시각도 그렇다. 과거 조선조의 사회는 유교를 국시로 해서 불교의 학대가 심했다 하여 유가의 선비와 불가의 스님들은 마치 양지 음지처럼 전혀 어울릴 수 없었던 사회로 치부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잘 들여다 보면 서로의 어울림이 돈독하여 동도자의 지기보다 더 가까운 사이도 많았다. 오늘은 조선 중기의 학자요 시인이요 고관의 벼슬을 지낸 이안눌(李安訥, 호 동악 東岳)이라는 분과 당시의 스님들이 격의 없는 어울림을 들여다보려 한다. 동악선생은
절망 빠진 사람에 희망 되어준 化成대중-나라 이끄는 도사도 방편 찾아야 사람은 혼자는 못 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울림 속으로 묻어들게 마련이다. 태어나는 순간 어미 자식의 관계가 자연스러이 아비 자식으로 이어지면서 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여 형제자매의 횡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정의 울타리를 삶의 방편을 찾으면서 불가불 벗어나야 하니, 이것이 사회라는 모임이요, 이를 공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면 나라요 세계라는 무한의 공간의 된다. 이러한 모임의 공간이 크든 작든 거기에는 이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어른이 자동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어른을 집에서는 집의 어른이라 하여 ‘가장’이라 하니, 이 가장의 구실을 아버지가 맡게 마련이다. 일정한 인위적 모임에는 모임의 어른이니 ‘회장’이라 하게 되고
남김 없음의 無餘가 곧 열반버리는 수행이 잘살기 수행 며칠 전에 추석 한가위 이야기를 했는데, 벌써 단풍잎을 감상한다 하고, 그 잎이 뜰에 덜어져 아침저녁으로 빗자루를 들게 한다. 이를 두고 늘 세월이 무상하다 하지만 사실은 무상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정상적 질서의 순환이다. 나무들은 이제 한 해의 마무리를 정상적 순환의 질서에 따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가지를 풍성하게 덮고 있던 잎이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있다. 서리가 짙고 나아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잎은 남김 없이 근원의 땅으로 돌아가 다음해의 움트는 숨 고르기를 할 것이다. 이 남김 없음의 무여(無餘)가 바로 열반이다. 사람살이의 주기는 네 계절의 한 해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라는 긴 거리를 놓고 일생의 주기로 삼기에 항시 이 삶과
한가위-섣달그믐 달 달리 보이니일천강에 비친 달은 같아 보일까 삶을 에워싼 주변 여건을 짧은 시간 단위로 잘라 놓고 보면 항상 변화무쌍하지만, 긴 시간으로 확장해 놓으면 항상 변화가 없이 일정하다. 낮의 해를 기준하면 하루의 변화가 여전히 일정하지만, 밤의 달을 기준하면 하루하루의 변화가 있어 보름을 주기로 기울거나 차는 변화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을 한해라는 360일로 보면 변화가 아닌 일정한 반복이다. 사람살이의 낭만이나 풍류로 본다면, 짧은 변화가 없는 해의 대낮보다는 기울고 차는 수시의 변화가 있으면서 밝음과 어둠의 빛의 작용이 있는 달이 사람의 동물적 본능에 더 자극을 주는 것 같다. 낮이라는 밝음의 드러남보다는 밤이라는 가림이 숨어 있는 정서에 촉촉한 윤기를 주어 점감의 싹을 키우는 것 같다.
‘크다·작다’ ‘길다·짧다’는 상대적 개념얽매임 없이 모으고 흩어놓는 지혜 배워야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이해할 수가 없는데, 시간의 흐름은 길다거나 짧다는 말로 거리를 재려 하고, 공간은 크다 작다는 말로 부피를 따지려 한다. 그러나 이 단위의 측량적 언어는 항상 불확실한 것이다. 길다 크다 함이 그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그 말의 정확도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영겁이라거나 3세라 하면 대단히 긴 시간으로 인식되지만, 영겁에다 3세를 견주어 놓으면 3세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대천세계니 수미산이니 하면 매우 큰 부피이지만, 대천세계에다 수미산을 견주면 매우 작은 부피가 된다. 이렇듯 모든 존재의 단위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사물에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으며
12년째 떡볶이로 군포교에 앞장서고 있는 청산회 회원들. “아~매워, 좀 더 주세요.”“아들! 체하니까 천천히 먹어.” 8월 27일 일요일 아침 9시 30분 청산회 회원 8명이 경기도 양주시 9200부대 호국 백호사를 찾았다. 청산회가 매월 넷째주 일요일 호국 백호사를 찾아 장병들에게 자장면, 순대, 쫄면 등 먹을거리 공양을 해온 것도 벌써 12년 째. 당시 상임 군법사 하나 없는 백호사에 청산회가 눈을 돌린 것은 자비의 집에서 만난 한 보살과의 인연에 의해서였다. 처음에는 변변한 방석도 없이 예불을 올리는 장병들에게 방석을 만들어 주다가 이제는 정기적으로 백호사를 찾아 음식을 해주니 군종병은 물론 장병들이 아예 ‘엄마’라고 부른다. 파, 떡볶이 떡, 고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