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4성(四聲)으로 염불하며 절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십시오. A : 중국의 전통염불법인 5회(回)염불과 최근 관정스님의 2회 염불법에 대해서는 들어보셨겠지만 이 4성 염불법은 처음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염불절수행’이라는 말이나 ‘4성염불’은 문헌적인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고, 제가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절을 하면서 염불을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한 끝에 터득한 새로운 표현이자 방법입니다. 염불이나 절은 혼자 할 때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지만 여럿이 함께 할 때는 염불의 고저와 장단이 맞아야 합니다. 염불소리의 고저와 장단이 틀리게 되면 마음이 산란스럽고 집중이 되지 않아 몹시 힘들게 됩니다. 함께 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음정과 박자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Q :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염불하고 절해야 가장 잘 하는 것이 됩니까? A :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곧 부처라는 생각에 철저해야 하고 오로지 부처님 밖에 없다는 생각 뿐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중생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는 한 부처님과 나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된 존재, 성불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면 자꾸만 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구하는 마음은 그대로 탐심이 되어 욕구불만이 되거나 자만심이 들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며 절해야 제대로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염불이 최상승 염불이고
Q : 절수행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A : 절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깨달음이라는 본질이 따로 있고, 절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보조적인 수행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절은 결코 방편에 지나지 않거나 보조적인 수행법이 아닙니다. 절은 그대로가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고 본질 그 자체입니다. 더구나 염불과 어우러진 염불절수행은 수승하기 이를데 없는 수행법입니다. 절수행을 방편이나 보조적인 수행으로 보는 그 자체가 절수행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절수행을 해서 깨닫는다면 다들 코웃음치겠지만 절수행을 통해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참선을 해서 깨달을 수 있다면 절을 해서도 깨달을 수 있고, 절을 해서 깨달을 수
Q : 절수행으로 성불하는 원리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십시오. A : 성불이란 중생기운은 하나도 없고 부처기운 100%인 것을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지혜와 자비심으로 충만한 상태를 성불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살아 숨쉬는 참 부처님의 모습을 대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100% 짜리 부처님, 즉 성불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진짜 부처님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흐려진 중생심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알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불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이러이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 이치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하는데 있습
Q : 절해서 성불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A : 극단적으로 말해 절해서 성불할 수 없다면 절수행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불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에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성불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옳은 수행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교 수행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간화선이라 해서 수승하고 진언수행이라 해서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수행에 우열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불교의 바른 믿음을 바탕으로 생겨난 수행에는 우열이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습니다. 불교인 중에서 만약 ‘이것만이 진리다. 이 길이 최상의 길이다. 이 수행이 최고로 수승하다’ 라고 국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Q : 염불하고 절하면 성불한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런지요? A : 그런 믿음이 쉽게 생긴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요. 불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가르침이 불교이고, 온통 믿음 하나 밖에 없는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선종 제3대 조사인 승찬대사는 신심명(信心銘)에서 “신심은 둘이 아닌 마음이고, 둘 아닌 마음이 신심”이라고 했습니다. 둘이 아닌 마음, 즉 모든 분별심이 끊어져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 마음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음이라야 참 마음이라 할 수 있고, 그런 믿음이라야 참된 믿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참된 믿음이기에 믿음이 쉽게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고,
Q : 염불하고 절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됩니까? A : 당연히 됩니다. 염불하고 절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되는 정도를 넘어 한량없는 지혜와 복덕이 갖추어 집니다. 염불절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가치와 공덕을 입으로는 다 설명 불가능 합니다. 염불절수행은 가히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아가다(阿伽陀, agada)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약은 어떤 병이든 다 치료가 되고, 어떤 독이든 다 해독이 되며, 먹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약입니다. 모든 나쁜 것을 다 거두어 가버리며, 그 가치가 한량없어 값으로는 도저히 매길 수가 없다고 해서 불사(不死)약, 무가(無價)약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저 감기 몸살 소화불량 정도를 다스리는 약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암이
Q : 불력(佛力)이 곧 타력이 아닌지요? A : 그렇습니다. 자타를 넘어선 힘이 불력이지만 굳이 하나로 말해야 한다면 타력이 맞습니다. 본질적으로야 나와 남이 둘이 아니지만 내가 있는 한 남이 있을 수밖에 없고, 내가 아닌 사람을 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닐 진데 나와 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력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내 힘이 아니니 하는 수 없이 남의 힘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기도는 내가 힘이 없을 때, 내 힘으로는 안 된다고 느낄 때, 나보다 위대한 어떤 힘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날 때 하게 되지 않습니까? 기도는 나를 부정하고 나를 버리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도는 가짜 나인 내 몸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가짜
Q : 염불절수행은 자력수행인가요, 타력수행인가요? A : 자력이니 타력이니를 구분하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흔히 유일신교를 타력신앙이라 하는데 비해 불교를 자력신앙이라고 말하거나, 또 참선은 자력수행이고, 염불은 타력수행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 역시 옳지 못한 말입니다. 불교는 자력신앙이라 할 수도 있고 타력신앙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자력신앙도 타력신앙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자력 타력을 넘어선 불력(佛力)신앙이라는 말이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無我] 어찌 내힘[自力]이 있을 것이며, 내가 없는데 어찌 남이 있어 남의 힘[他力]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고 고집할만한 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와 무관한 남이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나와 남이라는 구
Q : 절수행은 하지 않아도 될 고행(苦行)이 아닙니까? A : 절수행은 힘든 수행입니다. 더구나 고성으로 염불하며 절하면 힘이 많이 들게 됩니다. 힘들기 때문에 고행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행을 위한 고행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기꺼이 해야 하고 하면 할수록 좋은 수행이 염불절수행입니다. 다만 몸이 수고롭고 힘이 드는 것뿐입니다. 요즘은 쉽고 편하게 살려는 세상이다 보니 수행마저도 몸의 수고로움이 따르는 절수행을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참 잘못된 풍토입니다. 모든 수행과 수행자에게는 고행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고행이 없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흔히 석가모니부처님도 마지막에는 고행을 버렸다 라는 말을 하면서 고행은 깨달음과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데 크
Q :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며 절하면 왜 좋은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A :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은 나의 참생명을 노래한 말이기 때문에 많이 염송하면 할수록 마음이 밝아지게 됩니다. 나의 참생명은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입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을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인 줄 알 때 살맛이 나는 법입니다. 나의 참모습은 한량없이 큰 지혜로 완성된 존재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갖추어진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고, 그 부처님의 형상화된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자각하는 염송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좥반야심경좦의 표현대로 ‘크게 신령스런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없고 비할 바가 없는
Q : 염불 대신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한다고도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요? A : 마하반야바라밀이란 나의 참모습을 일곱 자로 표현한 말입니다. 마하는 ‘크다[大]’는 뜻이고, 반야는 ‘지혜’를 가리키며, 바라밀은 ‘완성됨’ 또는 ‘저 언덕에 이름’을 뜻합니다. 요약하면 ‘큰 지혜로 완전함에 도달한 상태’라고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참모습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이며, 큰 지혜로 완성된 위대한 존재가 참나인 것입니다. 가장 높고 으뜸가며 가장 존귀한 존재가 바로 참나 라는 말이 됩니다. 이 참나는 가짜나처럼 나거나 죽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바르게 깨치신 분이 부처님이고, 부처님은 우리가 본래부터 마하반야바라밀의 존재 즉,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중생인 것처럼
Q : 많은 염불 중 왜 ‘나무아미타불’만 하는 것입니까? A : 다른 염불을 해서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아미타불이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이름이기 때문에 이 염불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염불의 대명사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의 여러 명호는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세부적으로 나눠 표현한 이름들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모아서 표현하면 아미타불이 됩니다. 부처님의 육신은 소멸되고 없지만 그 가르침인 법신(法身)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법신이고, 이 법신을 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 아미타(阿彌陀)는 범어(梵語)의 음을 따온 말이고,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 되고, 우리말로는 시간과
Q : 염불절수행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A : 아상(我相)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참다운 염불절수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절과 염불은 나없음을 몸과 말로 표현하는 수행입니다. 지금 절하고 있는 이 몸이 내가 아니며, 지금 염불하고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고 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라고 할 때의 내가 바로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상대(相對)적이고 유한(有限)한 존재를 말합니다. 이런 중생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변할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나가 아닌 참나, 곧 부처님을 생각하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께 절하는 것이 염불절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아상을 반
Q : 절은 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지요? A : 지금 절하는 나는 ‘참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절을 하는 나를 나라고 하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참생명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절대로 죽을 수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인 것입니다. 이 몸을 나로 여기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오래기 때문에 이 몸을 떠나 달리 참생명의 존재인 내가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이 몸을 나라고 고집하게 되고, 따라서 이 몸을 통해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그릇된 생각을 멀리 떠나고자 나의 참생명의 형상화된 모습인 부처님 상 앞에서 가짜나를 굴복시키는 몸동작이 절입니다. 절은 어디까지나 가짜나
Q : 절을 하기 어려운 사람은 염불만 해도 되나요? A : 물론입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연로하신 분들은 절을 하지 않고 염불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염불과 절이 둘이 아닌 줄을 굳게 믿고 염불해야 합니다. 절은 도저히 할 수 없고 부득이 염불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절을 병행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점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절을 하지 않기 위한 변명이나 게으름 때문이라면 염불만 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절은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 위한 수행인데 절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그릇된 생각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염불은 입으로 하고 절은 몸으로 하는 외형적 차이만 있을 뿐 마음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염불과 절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입이든 몸이
Q : 염불절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A :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입으로 염불하고 몸으로 절하면 됩니다. 다만 염불하며 절을 하되 염불하는데 온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염불절수행의 핵심은 염불에 있습니다. 절은 어디까지나 염불을 더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절을 하기 위한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염불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절도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염불하되 입을 통해 소리를 내는 것뿐이고, 마음으로 절을 하지만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고 마음의 소산물이듯이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염불이든 절이든 본질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입과 몸으로 드러내는 것이 절이고
Q : 염불절수행을 하면 왜 좋습니까? A :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지은 세 가지 업[三業]을 한꺼번에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짓는 모든 업은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몸으로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하고, 입으로는 거짓된 말, 이간질 하는 말, 험한 욕지거리, 교묘하게 꾸미는 말을 하며, 마음으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업을 짓게 됩니다. 이른바 열 가지 나쁜 일[十惡業]이라고 하는 것이 다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악업을 제거 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본디 부처인 우리가 중생으로 전락해버린 것도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악업 때문입니다. 이 악업을
Q : 염불절수행이란 무엇인가요? A : 말 그대로 염불하며 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염불 중에서도 아미타염불 즉,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칭명(稱名)하면서 정해진 리듬과 박자에 맞게 절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위신력을 믿고 그 거룩한 명호를 마음에 새기며 입으로 부르는 것이고, 절은 가짜 나[假我]인 내가 참나[眞我]인 부처님 전에 엎디어 나 없음[無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절을 하고 입으로 부처님을 불러 일념을 이룸으로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다생 겁의 업장(業障)을 녹이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으로 얼룩진 묵은 업장이 녹아내림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자성이 드러나게 되고, 자성의 회복을 통해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喫甘愛養 此身定壞 着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岩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歎心友 아무리 맛난 것으로 사랑해 돌봐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지는 것. 부드러운 옷으로 감싸고 보호해도 이 목숨은 필히 끝나고 마는 것. 메아리치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애 닳게 우는 기러기를 친구로 삼으라. 인신(人身)의 덧없음을 숱한 경전은 노래하고 있다. 『유마경』은 “이 몸은 감각이 없으니(원문은 무지:無知) 초목, 와력(기와)과 같다. 이 몸은 작용함이 없으니 바람에 의해 움직여 질 뿐이다. 이 몸은 부정(不淨)하니 더러움이 가득 차 있으며, 또한 이 몸은 공허(空虛)하니, 목욕, 의식(衣食)의 힘을 빌린대도 반드시 닳아 없어질 것이며, 이 몸은 재앙 그것이니, 404병에 의해 침식당한다. 신체구성의 사대(四大)에 각기 101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