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마음-인간 중심 아니다마음은 정신이 아니라 사고방식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는 것을 이미 다 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음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해석함에 인간의 마음이 삼라만상을 짓는다고 말하는 불교인이 적잖은 것을 보았다. 이것은 마음을 철두철미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겠다. 내가 대학생시절에 불교학개론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도 불교는 기독교의 신중심과 달라서 인간중심의 종교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점차로 그 서술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신중심이나 인간중심이나 다 같은 인격중심주의 사상에 불과하다. 불교는 어떤 중심주의도 설파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중심주의나 마음중심주의가 아니다. 삼라만상은 인간의 마음이 지은 것
불의를 상정하는 순간 투쟁은 필연구원은 심판 아닌 근심 잊게 하는 것 나는 서양의 기독교 신학사상이 역사적 구원을 강조한 종교로 그 동안 해석되어 왔다고 본다. 역사에서 선의 종국적 승리를 기약하는 의미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최후의 심판사상으로 집약된다. 기독교는 늘 선의지와 도덕의식을 철저히 강조하는 도덕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 승리를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나 불교는 죄를 처단하면서 선의 역사적 승리를 쟁취하거나 기약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불의와 싸우는 선의지는 또 달리 불의와 역시 다투는 다른 선의지와의 투쟁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쳐 왔다. 나는 불교적 구원관이 예술미학적 본질을 띤다고 여긴다. 불교는 죄악이 극성을 피우는 세상을 정복하여 죄가
투쟁적 인간은 번뇌 치성한 중생일 뿐화려한 명분 앞세운 지도자 선택 안돼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교가 해탈의 종교이므로 현실적 정치와 세속의 실질을 지도하는 사상에는 걸맞지 않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 오해는 주자학의 비판에도 기인하지만, 일부 불교인들의 지나치게 괴이한 탈속적인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겠다. 불교는 이제 세상을 제대로 경영케 하는 수승한 현실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이라는 뜻의 세간해(世間解)라는 이름이 부처님의 별명임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경영하는 지도자는 우선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것은 ‘나는 마음을 비웠다’라고 입으로만 떠벌리는 행각에서가 아니라, 오직 불교적 공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가능하다. 너무 투쟁적인 인간은 마음
기독교는 신의 말 기준으로 선악 구분정의도 외곬 고집하면 병이 될 수 있어 기독교가 최후의 심판을 종장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는 그런 심판의식이 없다. 불교는 해탈하거나 윤회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말하기에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선악의 영원한 양분을 말할 리가 없다. 기독교에서 선과 정의가 동의어인 만큼, 악과 불의도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정의의 종교겠다. 즉 기독교는 도덕주의적 종교다. 그 정의와 도덕의 기준은 신의 말씀으로서 늘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제시된다. 선/악, 정의/불의, 진리/반진리의 이항대립에서 전자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곧 선이고 정의고 진리다. 그래서 기독교는 단정적이고 투쟁적이며 행동적이다. 선과 정의의 종교가 절대주의화하면, 절대적인 것은 하나주의로 표변하면서
불교는 우주일체를 한 몸으로 사유인간-자연 공존하는 상생의 전형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은 단 두 가지로 분류된다. 즉 해체적 사유와 구성적 사유다. 전자를 인간의 자연동형론(physiomorphism), 후자를 자연의 인간동형론(anthropomorp hism)이라 불러도 좋다. 인간의 자연동형론은 인간을 자연으로 산화시키는 사유고, 자연의 인간동형론은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구성하는 사유를 일컫는다. 여기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대적으로 사용된 까닭은 인간의 사유가 대대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차갑고 습한 물과 뜨겁고 메마른 불을 대대적으로 놓아야 물과 불을 생각하기 수월한 이치와 같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자기의 대칭으로 놓지
로댕 ‘생각…’- 신라 ‘미륵반가…’대비투쟁 통한 선의 ‘일방 승리’ 주장은 망상 나는 불교가 우주에 존재하는 근본사실을 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즉 불교는 기독교처럼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기약하는 당위적 도덕의 종교가 아니겠다. 그렇다고 불교가 유치하게 반도덕적 종교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지계(持戒) 바라밀은 세상을 도덕적으로 권선징악하는 심판을 말하지 않고, 바깥으로부터 오는 유혹에 흔들리는 마음을 경계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바깥의 경계에 마음이 끄달리면, 마음이 우주의 여여한 존재의 사실을 보지 못하고, 사실과 다른 망상에 빠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악이 발호하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선의 승리를 위하여 선의지를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외치면서 선의 십자
극단으로 치닫는 편파독선적 기독 선교행위좌우대립 후진작태 속 종교갈등도 부를텐가 나는 가끔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떤 절망을 느낀다. 작금의 정신문화의 현황이 지나간 우리의 역사적 공업(共業)의 여파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가 그 역사의 무거운 업의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추정해 본다. 우리는 지혜롭지 않으면서 너무 잘난 체 하고, 아상이 너무 강해 참회의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도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일반적 행동의 스타일을 예나 이제나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선진제국에서 버린 지 오래된 좌우의 이념투쟁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하고, 민주투쟁을 한 사람들이 의외로 또 북한의 그 가혹한 독제체제에 그토록 호의적인 이상한 행태를 자행하는 짓들이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부처-중생 이중성 모두 갖고 있어환영인줄 알고 초탈하면 화엄세상 마명(馬鳴)대사는 『대승기신론』에서 제8식 아뢰야식을 진망화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체유심의 사유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곧 진여와 번뇌가 혼재해 있는 중간지대라는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아뢰야식에 여래의 종자와 중생의 종자가 혼융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세상도 저 아뢰야식의 이중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뢰야식의 이중성은 그 존재방식이 연기법적이어서, 진여와 번뇌망상이 상호 의타기적이고 따라서 서로 상관적 차이를 지니는 한 쌍의 묶음이라고 봐야 한다. 상관적 차이라는 개념은 원효대사가 묘사했듯이, 같음은 다름에 대한 같음이고, 다름도 같음에 대한 다름이라서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
善 강하면 惡도 강해져 대결구도‘구악’ 일소 혁명 ‘신악’의 씨 뿌려 세상을 악과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인류의 역사와 세상에 희망이 없으리라는 사상이 이른바 구원주의이다. 세상에 악과 죄가 도도히 범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 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역사 속에 넘쳐 나는 악과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실제로 세상의 악과 죄는 사라지지 않고 거듭거듭 태어난다. 과거의 병을 퇴치하면, 새로운 병이 또 생기는 것과 같다. 새로운 질병은 과거의 멸균법에 내성이 생겨서 더 고약해지고 악독해 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의 윤리학도 선을 권장하고 증장시키기 위하여 악을 퇴치하고 제거시킬 의지력을 권장해 왔다. 오직 악과 싸워 이기는 길은 도덕적 선의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길이 있을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독서방법을 지도하는 ‘독서지도사’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이 동방대학원대학교에 개설된다.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원장 정상철)은 10월 30일 ‘어린이 독서교육지도사 양성과정’을 신설하고 첫 수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올바른 독서과정을 통해 효율적인 논술방법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 지도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2007년 2월 26일까지 15주 동안 매주 월요일에 실시되는 독서지도자 양성과정을 이수한 수강생들은 학원강사 및 문화교육센터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방과후 지도교사로도 활동 가능하다. 강의는 충남대 문헌정보학과 한복희 교수가 담당한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사회주의 실패…자본주의도 한계 드러낼 것개인-전체 대립 넘어 자연서 상생 배워야 근현대의 역사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대결이었다. 물론 역사는 전자의 승리로 끝났다. 왜냐하면 후자는 극좌적인 공산주의나 극우적인 파시즘처럼 전제(專制)주의를 초래했고, 그 전제주의는 독재의 권력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참혹한 괴로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부정으로 우리는 개인주의가 옳은 것으로 당연히 여기는 정치적 사고에 젖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전체주의는 물론이지만, 개인주의도 초극되어야 할 이념으로 여긴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불가양도적 권리의 주체로 여겨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여긴다. 개인이 부당하게 전체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반사회적 행위를 자행하지
무심히 비웠을때 자리이타심 생겨 친절-자비심 자연스럽게 충만 有卽是無 無卽是有(존재가 곧 무요, 무가 곧 존재다). 이 구절은 3조 승찬대사가 「신심명」에 남긴 말이다. 이어서 대사는 ‘만약 이같이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若不如此하면 不必須守니라)라고 말하였다. 승찬대사의 저 말은 불교가 존재론이란 말을 멀리 하는 것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불교가 공(空)사상을 본질로 하고 있기에 존재를 배척하고, 욕심의 탐욕을 경계하기에 욕망이라는 용어를 또한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불교는 존재론이고 욕망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론에도 두 가지의 뜻이 있고, 욕망론에도 역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존재를 동사로 보는 진짜 존재론과 존재를 명사로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