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갖가지 식료품과 배달음식에 ‘엄마표’가 붙는다. 이름 앞에 ‘맘스’를 붙여 믿을 수 있는 식료품이나 음식이라고 알리는 모양이다. 전법도 마찬가지다. ‘맘스 전법’ ‘엄마표 전법’이 필요하다.엄마 손맛 담아 간식 준비법회 오는 장병들에 ‘인기’“포교는 불국토 씨앗 파종”군포교 화랑선원팀은 매주 일요일 법회를 봉행한다. 선배 포교사들과 함께 활동 중인 화랑선원팀 인원은 18명 정도다. 하지만 실제 활동인원은 그보다 적다. 매주 당번을 정하지만 변수가 적지 않다. 포교사들이 불참할 경우 서로서로 일정과 안부를 물어가며 돌아가면서 진
애끓는 모정과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부처님 마음은 같다. 막내 간호하는 어머니 정성공양주 살던 언니 등 불연어린이·군장병 포교 이어져막내 동생이 많이 아팠다. 7남매 중 막내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던가? 어머니는 좋다는 병원, 효과 있다는 용한 점쟁이 다 찾아갔지만 이름 모를 병은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는 매월 초하루, 보름, 약사재일마다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버스에 올랐다. 공양미였다. 어머니는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도 공양미를 바닥에 놓지 않았다. 무릎에 얹어 고이고이 이고지고 절에 가서 부처님 앞
“미쳤다.”미쳤다는 얘기 들으면서도가족 모두 불자로 이끌어전법, 부처님 은혜 갚는 일처음 절에 다니기 시작할 때 “사이비종교에 빠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랬던 집안 식구들 모두 나를 통해 부처님 제자가 됐다. 5~6년 전, 내게 “절에 미쳤다”고 했던 친정 삼촌도 “나도 그 절에 한 번 가볼까”하시더니 3년째 절에 걸음 하신다. 이모, 고모, 동생들, 남편, 아들까지 불자로 거듭났다. 4년 전 친정아버지가 운명하셨을 때는 함께 공부하고 봉사했던 많은 도반들이 문상을 왔다. 포교사 40여명이 단복을 입고 찾아와 ‘금강경’을
찬송가 부르기를 즐겼다. 기도가 뭔지 몰랐지만 찬송가가 좋았다. 교회 행사마다 참가해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절은 너무 무서웠다. 사천왕과 탱화 속 신장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결혼할 때까지 그 각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부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늘 두려움 대상이던 사천왕대관음사와 인연으로 극복신행 이끌면서 전법에 매진이웃집 언니가 대구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로 이끌었다. 그때 나이가 36살이었다. 어느 정도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굳어 있었다. 대관음사는 두려움의 각인을, 절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윤회와 인과와 인연법은 분명 존재했다. 불제자를 서원한 뒤 뼈저리게 느껴온 진리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인과, 뼈저리게 느낀 진리신행단체 선우회서 108배새벽마다 ‘참나’에 채찍질딸이 결혼한 뒤 손녀와 손자를 차례로 낳았다. 손자는 뭔가 느낌이 좀 달랐다. 나뿐 아니라 아내도 아이 엄마까지도 그렇게 느꼈단다. 외모도 마음 씀씀이도 먼저 간 아들과 닮았던 것이다. 착각할 정도로 너무 흡사하게 행동했다. 생전에 자기 방이 있는 큰집을 원했던 아들이었건만…. 사별한 후 뒤늦게 큰 집을 얻었다. 내가 이사 후에 지금까지 매일
김밥을 먹지 않는다. 자식과 사별로 고통 극심성철 스님 법문으로 감화우여곡절 끝 포교사 입문아들과 마주 앉아서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 아들과 나눈 마지막 기억이다. 대구 상인동 지하철 도시가스 폭발사고. 1995년 4월28일은 잊을 수 없다. 아파트 전체가 들썩였고, 인생도 송두리째 흔들렸다. ‘우리 아들!’ TV에서나 나옴직한 뉴스가 내게도 들이닥쳤다. 아들과 이 세상 인연이 그날까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금쪽같은 분신을 저 세상으로 보낸 허망함이 엄습했다.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뼈를 갈고 살을 녹인들 이보다 큰 고통이 없었다.
“진여행, 포교사 시험을 보는 공부가 있는데 같이 하면 어때?”지역봉사팀 총무로 첫 발불교대학·템플스테이 지원학교부적응 학생 돕고 싶어2004년 여름이었다. 관음사 불교합창 연습을 하러 갔던 보현사 교육관에서 도반언니의 권유였다. 부처님 공부라는 말에 100일 기도할 때 부처님 일 열심히 하겠다는 원이 떠올랐다. 망설이지 않았다. ‘부처님 생애’를 읽고 또 읽었다. 여러 번 읽을수록 중생을 향한 부처님의 자비가 얼마가 깊고 넓은지 알게 됐다. 알면 알수록 눈물 흘리는 횟수도 늘어갔다.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2005년 2월, 김천
“깊고 오묘한 말씀. 백천만겁이 지나도 만나기 힘든데 나 이제 보고 듣고 받았으니 부처의 진실한 뜻 알겠습니다.”목탁·염불소리에 마음 편안제주불교문화대학 과정 수료1080배·3000배하며 정진1998년 따뜻한 봄날이었다. 친정어머니 권유로 맺어진 부처님과의 인연이 어느덧 올해로 20년이다. 부처님 말씀처럼 아득히 먼 옛날부터 맺어져 있던 부처님과의 선근이 이제야 그 인연을 만났다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번진다. 절에 발을 디딘 인연은 내 나이 20살, 할머니와의 사별이었다. 수학여행 때 불국사를 가본 뒤 처음이었다. 49재를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랐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화엄불교대학 졸업한 뒤동문회 임원·포교사 활동전문포교사로 새로운 출발유서 깊은 천년고찰을 만났다. 잊고 있었던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우연하게 돌아온 계기였다. 다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여느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래보다는 나이 지긋하신 노보살님들이 대다수였다. 지극하게 기도하시며 정진하시는 모습에 감동했다. 하지만 내겐 다른 게 급했다. 메마른 내 마음에 단비를 내려 적셔줄 법비가 필요했다. 나만 살피는 게 아니었다. 베풂이라는 자비와 보시행의 방법론
돌이켜보면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스님들과 인연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러웠다. 어머니께서 살던 곳 인근에 있는 사찰을 다니셨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부처님 도량에 들어가서 부처님 뵙고 삼배를 올리고, 점심공양을 먹고, 경내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 게 다반사였다. 노는 게 좋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 활동군목사만 있던 부대 내서도반과 법회 만들어 진행부처님과 가르침, 스님들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본격적인 불연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어머니께서 심어 놓
불자가 되고 나서 만난 인연들이 감사하다. 품수 뒤 10여년 봉사 활동요양원 어르신과 법회 봉행불교 인연에 감사하며 활동훌륭한 스님과 선지식들 그리고 항상 정진의 끈을 놓지 않고 수행하는 포교사, 도반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포교사 품수를 받고나서부터 지금까지 약 10여년이 넘도록 자원봉사팀에서 포교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부터 어설펐던 나는 지금도 매우 어설픈 포교사 가운데 하나다. 자비심팀을 거쳐 2년 동안 자원봉사 선우팀 팀장을 맡아 우리팀과 팀원들에게 많은 곤혹스러움을 안겼다. 이제 팀장의 짐을
포교사로서 또한 불자로서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지계와 청정을 구현하는 공명정대한 ‘법보신문’의 지면에 뱀의 다리를 그려 넣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게 아닌지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웃종교 설교에 갈증만정토사 불교대학서 공부하루 시작은 새벽기도로이제껏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많은 잘못된 선택으로 수미산보다 더 높은 업장을 켜켜이 쌓아왔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름 괜찮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수없이 실패를 한 뒤에 어렵게 금연에 성공한 일과 바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불교에 입문한 선택이
내게 2005년 겨울은 아찔했다. 2005년 겨울 교통사고염불 공덕에 가피 입어세수 다할 때까지 염불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염불봉사를 나가던 찰나였다. 겨울이었고, 새벽이었고, 순식간이었다. 새벽길 나서다 봉고차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내 몸은 저 멀리 튕겨져 나갔고, 차는 그대로 도망쳤다. 멀어져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번호판을 외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발목이 골절되고 머리는 여섯 바늘을 꿰맸다. 성난 들소처럼 달려온 차와 부딪쳤는데, 죽지 않고 그만하니 다행이었다. 가피였다. 신장님이 지켜주신 덕분이다. 하지만 그
스님 2명씩 5일 동안 집에 와서 염불을 해줬다. 불교어산작법학교 등서원왕생 염불 교육 수료안치실 시신 옆서 봉사할머니가 운명하고 5일장을 치를 때였다. 부모님이 생전에 다녔던 서울 도선사 스님들이었다. 49재도 도선사에서 지냈다. 저녁참으로 나온 비빔밥이 이제까지 먹은 비빔밥 중 제일 맛있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그만큼 부처님과 난 어렸을 때부터 깊은 연결고리로 묶여 있었다. 서울 화계사로 재적사찰을 옮긴 이유는 단순했다. 어디든 부처님 도량이었지만, ‘도선사 가는 길이 멀고 힘드니 화계사를 다니거라’는 아버지 유언 때문이었다. 당
대개 군법회는 도심에서 떨어진 부대 안 군법당에서 봉행된다. 부대 밖에서 먹던 음식이나 간식을 잊지 못하는 장병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군법회는 간식에 따라 인원수가 크게 좌우되는 측면이 있다. 간식 경비 걱정이 되는 이유다.간식 등 각종 비용 걱정주위 불자 도움으로 해결부처님 제자 인연에 감사처음 1년 동안은 포교사와 법우들의 십시일반으로 유지했다. 서로 조금씩이라도 보태니 간식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마저 어렵게 되곤 했는데, 간식비가 떨어질 무렵이면 어디선가 지인이나 법우들이 등장했다.
절에 지극정성으로 다니셨던 할머니 영향이었다. 절에 다녔어도 예수재 몰라뒤늦게 공부해 포교사 품수부부포교사로 군법회 운영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사찰 법당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에 ‘반야심경’과 예불문을 달달 외웠다. 그랬으니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지내온 세월이 40년이 넘은 것 같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럽다는 뜻의 법(法)자처럼, 부처님 가르침[佛法]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할머니 손잡고 법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처님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왔다.
봄가을 유난히 등산객이나 내방객 발길이 잦다. 아무래도 오랜 역사 속 풍파를 견뎌온 강화 전등사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이리라. 전각·불화·설화 소개에 친절차수·합장·삼배 예절도 알려초심 잊지 않고 쉼없이 정진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돼, 여러 차례 큰불이 나고 증축을 거쳐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지어진 모습이 오늘의 강화 전등사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불, 약사전의 약사여래불, 명부전의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님 그리고 시왕, 31존상, 삼성각, 불화와 탱화, 설화, 문화, 건축물 등이 고스란히 남은 도량이 전등사다.
유년시절이 아련하다. 1996년 초파일에 불교 인연포교사 의무 되새기며 기도천년고찰 전등사 해설 매진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이른 새벽에 길은 정화수 떠놓고 매일 기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 처음 부처님을 모신 작은 암자를 가본 것 같다. 불연을 더듬어 올라가다보니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곧 부처님오신날의 환희가 전국 각지 도량을 물들일 텐데, 운명처럼 내 불연의 싹이 튼 시점도 1996년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이었다. 친구 따라 절에 갔던 게 인연이 됐다. 서울 조계사 불교대학을 졸업한 지인이 삼보에 귀의해서
수용자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1999년 포교사고시에 합격한 뒤부터 광주교도소에서 교정교화활동을 하고 있다. 삼중 스님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스님처럼 다른 사람이 돌보지 않고 꺼려하는 곳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이라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다는 나름 이유도 있었다. 상을 내지 않는 부처님 제자로 살고 싶었다. 나누고 베풀면서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 돌려받겠지’ 하는 마음이 일어날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전법현장이 교도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은 종교와 스승은 혼자만 갖지 말고 같이 만납시다.”야간 불교대학 다니며 공부포교사로서 가족 전법 발원소년원·군부대서 법회 지원이 말 한마디가 지금 나를 있게 했다. 아내는 보살이었다. 내가 불자이자 포교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아내였다. 아내는 큰아들 돌 전부터 절에 다녔다. 신심이 깊었다. 아들을 업은 채로 절을 했다. 왜 저렇게 부처님을 찾아가는지 그땐 몰랐다. 그때 꺼낸 말 한 마디가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만나자” 였다. 절과 부처님에게 성큼 다가갔던 계기는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였다. 원효사나 증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