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어깨 위에 밤 한 톨 크기의 작은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거의 15년 전부터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 처음에는 여드름 크기만 했는데 조금씩 커지긴 했지만 아프지도 않고 또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깨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덩어리의 크기가 갑자기 커지고 있었다. 피부의 색깔도 마치 벌에 쏘여 퉁퉁 부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며칠을 미루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그냥 째고 고름만 좀 빼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안 된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제일 가까운 대학병원에 갔는데 지방 덩어리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며 제거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 중요한
명상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한 거사님이 찾아와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스님, 제가 그래도 많이는 못하지만 매일 꾸준히 30분 이상은 꼭 명상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년 했는데도 별 성과가 없어요. 저는 삼매라는 것을 꼭 한 번 체험하고 싶은데 어쩌다 잘 되는 날도 있지만 계속해서 잡념이 생기고 수행이 잘 되어간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운동이나 영어공부는 매일 30분씩 꾸준히 해주면 분명 어떤 효과나 변화가 찾아오거든요. 그런데 명상 수행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그 거사님 말이 맞다. 일반 세속적 기준으로 명상 수행을 바라보았을 때 노력과 투자 대비 효과는 다른 것들에 비해 표시도 안 날 만큼 미미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 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법회가 끝나고 참석하신 분들과 차담을 나누는 중에 한 거사님이 물었다.“스님, 절에 오면 ‘지혜’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자주 사용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의미가 헷갈립니다. 도대체 절에서 말하는 지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글쎄요. 절에서 말하는 지혜는 깨달음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하는 것 등을 말하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깨치신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지혜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누가 사실을 사실대로 잘 모릅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대충은 그런대로 알고 살고 있잖아요.” “제가 좀 사족을 붙인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안다고 할 때 사실이란 지금 이 순간에 실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제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화면 오른 쪽 하단에 갑자기 이런 경고메시지가 나타났다. ‘현재 당신의 컴퓨터는 이러이러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치료를 하시겠습니까?’ 평소 컴퓨터에 신경을 잘 쓰지 않는 편이라 이 경고메시지를 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창을 클릭하였다. 그 표시를 클릭하니 또 다른 문구가 나왔다. 바이러스치료 프로그램을 구매하라는 메시지였다. 가격을 보니 천원을 넘지 않아 휴대폰으로 결제 하였다. 결제를 마치고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치료를 해보았다. 결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낚였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평소 신경을 써 두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뽀딸리야라고 불리는 한 장자가 어느 날 숲속을 배회하다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과 인사를 하고 서로 소개를 하였다. 부처님은 “장자여, 여기 자리가 있으니 앉으시지요?”하고 정중히 앉기를 청했다. 뽀딸리야 장자는 스스로 수행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부처님이 장자라고 부른 것에 기분이 나빠 곧 바로 부처님께 따져 물었다. “존자여, 왜 나를 장자라고 부릅니까? 저도 수행자입니다.” “지금 당신의 겉모습 자체가 바로 장자의 모습 그대로 보이니까 나는 장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존자여, 나는 재산과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일체 세속적인 일은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래서 나도 일종의 수행자입니다.” 이 말에 부처님은 세속적인 일을 버린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신
절에 나오는 한 보살님이 있는데 평상시 절 일을 많이 도와주시고 다른 불교 단체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또 스님들에게도 극진히 신경을 잘 써 주시는 분이시다. 하는 일로 봐서는 절에서 분명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그런데 결과는 전혀 딴 판이다. 그 분의 특징은 무언가 좋은 일을 하면 그 다음 여기 저기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쁘고 여유도 없는데 그래도 이러 이러한 일을 하였다고 푸념처럼 쉴 새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다. 들어주는 사람이 처음에는 ‘참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구나!’라고 들어주다가도 끝에 가서는 ‘순 자기 자랑이잖아’하고 기분이 확 잡쳐 버린다고 한다. 말하지 않아도 결국 다 알아 줄 터인데 사람들이 빨리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자신이 한 일로 어떤 좋은 결과가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성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동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왔던 어떤 분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그 분은 자신의 눈을 쳐다보면서 아픈 곳을 손으로 만지면 병이 다 낫을 수 있으며 또 자신의 이름을 외치면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된다고 하였다. 화면의 내용을 보면서 내내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분의 말씀을 진짜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은 포기해야 될 것이다. 얼마 전 다른 사찰에서 법회 요청을 받고 특강을 하게 되었다. 법회가 시작되기 전 의식의 하나로 반야심경을 모두 함께 독송하였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참석한 대중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전 여러분들은 반야심경을 독송하였는데 그 뜻은 다 잘 알고 계시지요?” 몇 몇 분들이 큰 소리로 그렇
『지중해의 성자 다스칼로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책의 주인공인 다스칼로스가 어느 날 영적인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어떤 귀신이 돈을 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귀신에게 다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구경하였다. 그 귀신은 살아있었을 때 부자였지만 지독한 구두쇠였다. 매일 자신의 재산이 잘 있는지, 또 얼마나 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밤마다 돈을 세었다. 돈을 세다가 죽었는지 죽어 귀신이 돼서도 계속해서 돈만 세고 있었다. 돈을 다 세고 나면 계산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또 다시 처음부터 돈을 다시 세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돈만 세는 지옥에 갇혀있었다. 다스칼로스가 그 귀신에게 “당신은 죽었으며 지금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고 말
절 근처 골목을 걷다보면 가끔 명상하고 있는 강아지를 보곤 한다. 누구 집 개인지는 모르겠으나 2층 창문가에 앉아 짓지도 않고 그냥 고고하게 먼 곳 만을 응시하고 앉아있다. 앉아 있는 모습이 범상치 않아 그 녀석을 볼 때마다 ‘그놈 참 사람스럽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며칠 전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그 조그만 개가 쏜살 같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아마 현관문이 열려 있어 그 틈을 타고 잠깐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주인도 없이 혼자 나와 돌아다니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아마 주인을 찾아 저렇게 바쁘게 뛰어가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바쁘게 뛰어가던 그 작은 개는 산책을 나온 또 다른 작은 개의 엉덩이에 부지런히 코를 대고 있었다
어떤 일에 미쳐있는 사람을 흔히 ‘마니아’라고 부른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 있으면 그 순간은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좋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또한 만만치 않다. 주위에 알고 지내는 분 중에 소리마니아가 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너무나 사랑하여 보다 좋은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를 찾아다니고 또 그 스피커를 소유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분이시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냥 좋은 소리를 사랑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그 분 댁에 가서 보면 스피커가 자주 바뀌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궁금해서 물었다. “선생님, 이 스피커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왜 이렇게 자주 바꾸십니까? 저번 것도 끝내주는 소리였는데.”“처음에
“그 누군들 조용한 산에 들어가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혀있기 때문이다.” 원효 스님이 쓴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수행이나 명상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긴 하지만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할 형편이 아직 안되어 안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수행이 좋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 중에서도 정말로 꾸준히 착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은 아주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아직 주변에 수행보다 더 재미있고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 마하나마 왕자도 수행 보다는 일반적 세속의 삶이 더 재미있고 기쁘다고 부처님께 고백하기도 한다. 이 때 부처님은 삼매의 기
횡단보도 앞에 서서 잠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침 바로 옆 리어카에서 풀빵을 구어 파는 곳이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풀빵이 다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풀빵 장수 아저씨의 바쁜 손놀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보고 있었지만 풀빵을 굽는 아저씨의 손놀림은 잠시도 머물러 있는 순간이 없어 보였다. 새로운 풀빵 반죽을 하면서 동시에 구어지고 있는 다른 풀빵들이 골고루 익혀 지도록 아주 바쁘게 손을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손님 중의 어떤 아가씨 한분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저씨, 풀빵 만드는데 어떤 비결이 있나요? 아저씨 풀빵이 특별히 맛이 있는 것 같아요.” 풀빵 장수 아저씨는 계속해서 풀빵을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좀 멋쩍은 듯이 말씀하셨다. “특별한 것 없어요. 풀빵이 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예고가 없다. 분명히 근심거리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 한동안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곤 한다. 여러 많은 것들 중에서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후회라는 것이 있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살 수 밖에 없고 선택의 결과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후회라는 것이 일어나 아주 오래 동안 우리를 괴롭힌다. 선택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 도덕적 선택 즉 ‘참아야 한다’와 ‘하고 싶은 대로 한다’와의 선택이 일상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선택이고 이 선택에서 많은 경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를 선택하여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산다. 어떤 경우는 선택하는 순간 닥쳐올 미래의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 심각성을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누군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열반에 들었다고 말한다. 주로 스님들이 돌아가셨을 경우 이 표현을 쓴다. 열반이라는 말은 인도말로 ‘니르바나’라고 하며 그 뜻은 ‘불이 꺼진 상태, 생겨남이 소멸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적멸(寂滅)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경에서 마하 꼿띠따 스님은 사리불 존자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사리불 존자여, 얼마나 많은 조건이 이 몸을 떠나면 무정한 나무토막처럼 던져져 누워있게 됩니까?” “꼿띠따 존자여, 생명 기능과 온도와 의식, 이 세 가지가 몸을 떠나면 이 몸은 던져진 나무토막처럼 죽어있게 됩니다.” “사리불 존자여, 그렇다면 죽어서 목숨이 다한 사람과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자가 있는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
“명상을 하시는 스님이 왜 이렇게 바쁘게 살고 계십니까? 좀 한가하고 여유롭게 명상적으로 사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항상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바쁘게 살고 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가끔 이런 말들을 한다. 맞는 말씀이다. 명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생각을 쉬고 여유를 가지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여유롭게 쉬면서 산다고 다 명상적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명상 수행은 휴식과 창조적 자기 발전의 과정이다. 명상에서의 휴식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부정적인 마음의 작용들을 쉬게 하는 것이고 창조적 발전은 자기 절제와 자기 이해를 통해 더욱 지혜로워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쉬는 것을 명상 수행이라 한다면 아마 조용한 시골에 가거나 아니면
우리는 평소 수행이라는 말을 쉽게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참으로 꺼내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말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수행이란 지혜를 얻고 마음의 정화를 위해 행하는 일련의 실천 과정이며 구체적 목적과 방법은 천차만별이겠지만 크게 지혜나 행복, 평온 등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 목적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사람을 수행자라 부른다. 수행자는 의복이나 어떤 형식을 갖추었다 해서 수행자라 할 수 없고 수행자로서 해야 될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큰 앗싸뿌라 설법의 경에서 수행자가 수행자답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자세히 역설하셨다. 먼저 수행자는 가장 기본적으로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창피해
어느 날 오후 심리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이 찾아와 주셨다. 아직 몇 번 밖에 만나지 못한 사이라서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저 명상하는 것이 좋고 명상 수행이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것에 인식을 같이한다는 것 뿐이었다. 대부분 그 교수님이 말씀하시고 나는 찻잔을 손에 들고 경청하는 입장이다. 한참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그분은 대뜸 “스님은 왜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가끔 스님을 뵈면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속에 있는 것 보다 산속에서 공부에만 전념하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자 그 교수님은 다시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마치 본인이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고 있는 듯 산속 생활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실패한 개인과 기업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만을 꼽았다. 성공에 도취되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어깨나 목에 힘이 들어가면 영락없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직 성공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나는 성공하면 항상 겸손하고 노력하지 절대로 목에 힘주고 자만에 빠져 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도 성공에 이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본인의 생각과 노력으로 성공에 이르렀기 때문에 믿을 건 자신의 경험과 생각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세속에서 성공이라는 어떤 정점에 이르게 되면 강한 자신감과 만
북쪽으로 나 있는 창문 때문에 저녁이 채 찾아오기도 전에 벌써 방안의 불은 환히 밝혀져 있다. 쌀쌀한 바깥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다시 찾아온 어두움 속에 쓸쓸히 있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방안의 포근함과 밝음에 긴장을 풀고 일찍부터 자리를 잡는다. 자리에 앉으면 습관적으로 앞에 보이는 컴퓨터 화면에 눈이 가고 그러면서 언제인지 모르게 벌써 마우스를 쥔 오른 손은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다는 인터넷 시작 버튼을 클릭한다.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어떤 끌림에 빠져 나의 눈은 부지런히 화면 속 여기저기를 쑤셔 보고, 나의 손가락은 마우스를 바삐 클릭한다. 결국 내가 본 세상은 나에게 실망과 답답함을 전해 줄 뿐이지만 또 다시 다음 날이 되면 어
요즘은 사회적으로 리더십이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업무나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 능력 또한 리더십이라 부르고 있다. 삶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 데에는 또한 여러 능력이 필요할 것이고 어떠한 능력이 필요한지 또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 자기 계발이나 성공에 관한 서적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명확한 목적, 목적 성취를 위한 열정, 자기 절제, 부단한 노력과 실천력 등이다. 이 항목들은 비단 요즘 세상에만 주목 받는 것들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표현이나 적용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 역사를 통해 강조되고 권장되어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