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전에 꽃을 공양한지가 어느 덧 9년째가 되었다.내가 다니는 반야사엔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봄날 긴 빨랫줄에 희다못해 옥빛도는 옥양목 호청에 풀먹인 내음이 있는 듯한 청아한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도량이다. 나의간절한 작고, 큰 소망의 발원들이 고통과 피, 땀의 능선을 넘으며 희열의세계가 열림을 기도를 통하여 느끼게 되었다. 나의 생일날 `초연실'이라는 `세속을 초월한 모양, 성품을 뛰어넘는' 곧 해탈을 의미하는 빛나고 벅찬 법명을 지어주시며 영원히 어둠을 밝히는 불멸의 마니주가 되라고 하셨다. 나는 소중한 법명을 지니면서 우리들의 산란함을 쉬게하는, 영리한 사랑보다는 지혜로운 사람되기를 발원하며 머물수있는 청정도량을 위해 환희심을 회향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꽃공양이었다. 멀리 있으나
나병숙(서울 봉은사 불자)이제 곧 겨울이다. 벌써 내가 야간불교대학에 다닌지도 한학기가 다 되어간다. 슈퍼마켓을 경영하며 짬짬이 틈을 내 다닌 야간불교대학. 힘든 가운데 배우고 익히지만 불교에 대한 신심하나만은 점점 더 뜨거워만간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봉은사에 매주 나가면서 야간불교대학에 다니게 됐다. 항상 허전하고 마음속으로 이를 어떻게 채워볼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다. 늘 바라고 원했던 일이라 생활은 뒷전에 맡기고 우선 등록부터 했다. 절에서신행생활을 하며 잘 몰랐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깨치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었다. 대부분 직장인들로 보이는 같은 불교대학 수강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법사님의 가르침에 진지해지곤 했다. 조금만 늦게가면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먼저와서는
그저 착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막연함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르며 살아왔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의 존재에 대해 깊은 성찰에 잠기곤 했다. 오매불망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야할 진리를 설하시는 스님께 정말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길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불교도 대중속으로 같이 호흡하며 두손모아 기도만 하는 구시대적 불교에서 벗어나 생활 속의 불교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계(戒)˙정(定)˙혜(慧)를 실천할 수 있도록, 8정도를 깊이새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일체의 그릇됨을 막고 악행을 그치게하는 인류공통의 덕목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달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알기 시작한 불교진리는 사찰에 나가면서 구체화됐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부터는
금년도 저물어 가는 지난 일요일, 여느때처럼 아침 설겆이를 대충 끝내고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 일요법회장으로 향했다. 일주일전에 미리 다음주 법사님을 예고해 주지만 까맣게 잊고 `오늘은 어떤 분이법문을 하시려나'하며 법당에 들어섰다. 청법가가 끝나고 단에 오르신 분은여든셋으로는 보이지 않는 꼬장꼬장한 노스님이셨다. "오늘은 내가 `왜 불교를 믿어야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할건데 이 문제에대한 답을 명확히 말하지 않으면 내가 여러분께 빚을 지는 것이고 옳은 답을듣고도 실행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빚을 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건 방금전에 여러분이 독송한 반야심경속에 다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우주관이고 인생관이며 `나'는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니 모든 우주의이치
오늘도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성심사에 가서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다. 벌써 4년째 기도를 올리고 있다. 새벽에 25분을 걸어서 가는 길이 너무 즐겁다. 남들은 여자가 컴컴한 새벽길을 가는 것이 무섭지 않냐고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 올리러 가는 길이어서 즐겁기만 하다. 나는 불교를 몰랐다. 그러나 내 인생에 두번의 큰 사건이 있은 후 불교를 알게 됐다. 세째딸을 임신했을때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기독교인들이 와서 찬송가를 불러주었지만 49재는 절에서 지냈다. 초파일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갔던 기억이 있었고 절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관사를 찾아가 무작정 스님들께 49재를 치러달라고 떼를 썼다. 스님들은 나의 무례한 행동에도
결혼전 무교였던 나는 시댁이 불교집안이라 언젠가는 절에 다녀야 한다고 염두하고 있었다. 4년전 가을 처음으로 대구의 사찰을 찾게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스님과의 친견및 예불봉덕이 생소하였다. 이렇게 사찰을 나가기 시작한지 1년이 조금 지난 어느날이었다. 총무스님의 도움으로 사시예불에 동참하게 됐다. 집안일을 끝내고 사찰에 와서는 촛불과 향을 올리며 다기물도 정성들여 준비하는등 지극정성으로 동참했다. 이렇게 3개월을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오히려 심신은 하루가 달라지게 `기쁨'으로 충만함을 느꼈다. 이런 나에게 하루는 스님이 신도 의식부장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과연 해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처님 법을 알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작정한 나였다. 신도의식부
자장스님은 신라불교의 초석을 다진 큰스님으로 기억되고 있다. 부처님께 간절히 빌어 태어난 그는 전생의 불연이 깊어서 그랬던지 생일이 부처님과 똑같아 어릴 때는 선종랑으로 불려졌다. 이후 생을 살피더라도 여러 점에서 그는 부처님과 닮은 데가 많았다. 속세의 취미에 물들 줄 몰랐으며 결혼한 상태에서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것, 자기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은 것 등에서 깨달음을 위해 세상의 영화와 유혹을 떨치고 고행의 길에 스스로 들어선 부처님을 빼닮았다. 하여간 감당못할 번뇌끝에 산문에 들어섰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출가는 한 개인의 족적을 넘어 훗날 신라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흥법을 굳히는 든든한 디딤돌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선덕여왕 5년(636) 당에 유학갔다가 7년여 만에 귀국한
진각종 총인 각해 대종사-지구촌 곳곳에 밀엄정토 구현을 새해는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아집과 이기주의 경계를 허물고 둥글고 화해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부터 허물을 참회해야 합니다. 상대자의 저 허물은 내 허물의 그리자임을 알 때, 더불어 사는 지혜가 열리고, 사바도 복덕 지혜 구족한 불보살의 세상이 됩니다. 불법의 대해에 큰 파도 일어서니 심인정법 꽃피운 진각(眞覺) 성상 50년! 정축년 새해에 대법기(大法旗)를 더 높이니 지혜광명 상서롭고 자비덕성 가없네. 그 중에 뭇중생, 해탈락(解脫樂)을 얻도다. 부처님의 상서로운 숨결이 이 땅을 위호하니 참회의 진언 소리가 진각종문(眞覺宗門) 열린 지 50성상이 되었습니다. 눈 밝은 선남선녀들 비밀히 몸과마음 쓸고 닦으니 민족의
등장하는 동물: 소 원숭이 표범 무대:아득히지평선이보이는초원의한가운데. 몇 그루의 키작은 나무들만이 외롭다.햇볕은 쨍쨍. 막이 오르면 소는 커다란 몸집으로 햇볕을 가리고 있고, 원숭이는 소가 만드는 그늘에서버젓이 누워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소의 꼬리를 잡고장난질. 그러나 곧 원숭이는 소의 잔등에 올라탄다. 그리고 쏟아지는 햇볕을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참을 깔깔거린다. 원숭이:참으로 좋은 날이야. 히히히! 소:이곳은 위험해. 어서 숲으로 돌아가야지. 원숭이:내가 싫다고 했잖아. 히히히! 소: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왜 내 말을 듣지 않나? 원숭이:이젠 무섭지 않아. 소:벌써 표범이 이리 오고 있을거야. 원숭이:왜 내가 이
나의 고향은 한국의 달마라 불리는 경허스님과 그의 전법 제자인 세 달(삼월)만공, 수월, 혜월스님이 나신 수덕사 근처 예산이다. 어릴적 소풍을 가거나 절에 가면 무엇인지도 모르며 마냥 즐거웠던 기억이 새롭다. 불교집안이었던 가풍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자연스럽게 불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몸이 약했던 나는 집안 어른들이 `저 애가 사람 구실을 할까'하는걱정을 할 정도로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들었을 정도였다. 부처님을 만나고 몸이 좋아졌다면 많은 이들은공감할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포교에 앞장서는 참된 불자가 될 것을 부처님 앞에 맹세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오늘 이글을 쓰게 된 연유는 나는 원불이 된《금강경》을 많은 불자
내가 속한 봉사단체인 천수천안은 매월 두번 교도소를 방문, 재소자에게 도움과 교화를 하는 단체다. 13명이 봉사를 시작했는데 현재는 8명이다. 처음 이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한 스님과 인연이 되어서다. 그 스님은 10여년간 교화화동을 해오신 분인데 옆에서 도와드리고자 시작한 것이 아예 우리일이 되었다. 한번 두번 교도소를 방문하면서 그들과 정도 붙고 특히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들을 보고 사명감 같은 것을 느겼다. 이곳은 정해진 사람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회원 한명은 자기가 와 있을 자리에 저들이 대신 와 있구나 하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때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 복수심
이영자(서울 화계사 불자)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겨울 북한산의 정취를 느끼며 우이동 골짜기에 있는 어느 분위기 좋은 한식집에서 오손도손 집안 사는일과 부처님 얘기를 나누며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불법대로 살면 하루하루가 극락이라는 것, 나는 항상 남편한테 많은 것을 배운다. 군대간 아들과 직장 다니는 딸에게 늘 부처님 곁에 오기를 바라며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곤 한다. 며칠전 군에 있는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는데,군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식사를 하며 부처님께 무척 죄송함을 느꼈다. 우리뿐만 아니라주위 식탁엔 많은 음식이 남아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을 샐각하니까 너무나아까웠다. 지금도 지구촌 여러 곳에서 식량난으로 생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