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우 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필자는 틱낫한 스님의 불교를 좋아한다. 불교 수업 시간에도 그 분의 책을 종종 사용한다.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불교의 핵심에 아주 맞닿아 있으면서도 접근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불교는 세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민족적 재앙이었던 베트남 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유형의 폭력을 경험했기에, 누구보다도 평화에 대한 희구가 강하다. 하지만 한 개인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와 절대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출발점이나 토대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불교적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신념을 갖든 정치적 삶은 개인적 삶의 반향이라고 여기고 이 양자 사이에는 괴리도 조금도 있을 수 없다고
일 진 스님 운문사 강원 학감 초파일의 큰 잔치를 치룬 한국불교는 곧 여름철 안거(安居)를 맞이한다. 해마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정해진 날에 행해지는 ‘부처님오신날’법회 행사는 그 순간에 임했던 각자의 마음따라 다양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해마다 이렇게 큰 명절을 지낸 후에는 어김없이 여름안거를 맞이하게 되는 일이다. 계절이 변하고 그 때마다 특성이 있고 그에 알맞은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음은 정말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이제 각기 인연있는 도량에 방부라는 형식절차를 마치고 결제에 들어간다는 후배와 헤어지며 새삼스럽게 여름이라는 계절을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 여름 나는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선 여름철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성장, 무성함, 변화 같은 단어들이다. 물론
정 병 조 동국대 교수 사바세계의 일이려니 하면서도 너무도 실망스러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치판은 싸움으로 지새우고, 사회 또한 못살겠다는 아우성뿐이다. 그나마 한줄기 위안이 되는 것은 가끔씩 들리는 미담 소식이다. 엊그제는 한 택시회사 사장이 70억 원을 장학금으로 희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돈의 액수도 엄청나지만, 선뜻 좋은 일에 쓰라고 내놓는 마음씨가 아름답다. 또 교보생명은 상속세로 1250억 원을 납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회사들이 기껏 몇 십억 원, 많아봐야 300억 원 정도를 납부한 것에 비하면 가히 놀랄만한 정직성이다. 재벌회사의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머리를 짜내서 절세를 하고, 또 칭찬을 받았을까 생각해보면 새삼 정직한 사람들의 용기가 가상하다. 언젠가는 김
평등이란 절대 가치를 말한다. 긴 것을 짧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하거나 큰 것을 작게 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무한 행복으로 살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을 경전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이라 말하고 있다. 인간 본래의 존재성, 부처로 깨어 날 수 있는 능력, 누구나 행복으로 노닐 수 있는 근원적 빛살. 권력자에 있어 더하지도 않고 천한 자에 있어 덜하지도 않는 구김살 없는 무한의 가치 그것이 불성이요 신성(神性)이며 절대적 가치 평등인 것이다. 부처님은 태어 나시자 마자 천상과 천하에 독존자 모든 이의 본래적 존재인 평등을 설파하셨다. 그리고 출가하여 끝없는 수행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모든 중생은 그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허 우 성 huh111@hitel.net 경희대 철학과 교수 시론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신문사는 이에 대한 취지나 지침이 있을 것이지만 필자 나름대로 한 번 생각하고 싶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 뭔가를 골라 그것에 대해 평을 붙여 독자와 공유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 듯싶다. 단순한 사건 나열로 논이 될 수 없음은 누구든 금방 알 수 있다. 시간 속에 사건이라고 해도 그 속에 불변의 것을 포착하여 회향하는 일이 시론을 쓰는 사람의 사명이 아닐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도 진리의 면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俗도 보고 眞도 깨달은 자 만이 시론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태도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해보자. 영원을 강조하여 시간
일 진 스님 운문사 강원 학감 또 한바탕의 봄은 갔는가? 길다고 느껴지는 철이 우리나라 4계절 중 대개는 겨울인 것이 보통인데 윤달이 들어있던 올해 갑신년 봄이 유난히 긴 철이라고 느껴진 것은 음력으로 2월을 두 번 이나 지나야 했으니 당연한 것 같다. 더욱이 음력을 중심으로 석 달을 한철로 하여 살아가는 산중대중 생활에서의 한 달이라는 기간은 여간 긴 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건 온통 얼어붙었던 도량이 풀리고 보송보송 죽은 듯 했던 나무에 수물수물 초록의 문이 열리면서 장엄한 생명의 용솟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볼 수 있었던 찬란했던 봄은 이제 서서히 신록으로 물들면서 자리를 떠나고 있다. 떠나고 변하는 것이 어찌 봄뿐이겠는가? 이 봄철에 자리를 떠난 이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많았다.
정 병 조 동국대 교수 불교에서는 인생을 일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없는 나고 죽음의 연속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 꽃에는 벌 나비가 날아들어 꿀을 탐한다. 벌 나비는 그 보다 강한 날짐승들의 먹이가 된다. 아무리 강력한 생명이라도 결국은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간다. 그 흙을 토양으로 하여 또다시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이다. 이 우주와 생명의 거대한 연결고리, 생사의 반복을 윤회라고 부른다. 따라서 윤회를 믿는 이에게 있어서 오계 등 불교의 윤리를 준수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 만나고 있는 객관 세상이 전생에는 바로 내 형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윤회를 생각할 때 비로소
수 진 스님 부산 해인정사 주지 올해도 자연의 거대한 장엄 속에 태초의 신비를 그려보는 가슴 쓰림이 시작 되었다. 맑디맑은 연초록의 그림이 나지막한 산비탈에서 고봉의 정상까지 당신의 춤사위를 한껏 불러 모으고 인간의 욕심나래를 접게 하려 살며시, 살며시 웃어 보인다. 일찍이 그 누구도 연초록 나부끼는 東君(동군: 봄신)을 불러 모은 적이 없다. 그들에게 산야를 푸르게 하고 百花(백화)를 웃음 짓게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는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자리를 양보하는 자연의 섭리, 그 인과의 원리는 분명하다. 크게 한번 눈을 돌려 보자. 하늘은 時雨(시우)를 내려 천하 만물을 생장시켜 주지만 천하 만물을 생장시켜 주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더 나아
허 우 성 경희대 철학과 교수 필자는 최근 용성 선사(1864-1940)를 읽고 있었다. 필자가 읽은 선사는 근대 한국에 등장했던 불교 사상가들 중 여러 면에서 중도를 잘 지켜나간 분이다. 도 닦다가 산 속에 파묻혀 세상을 잊지도 않았고, 세상에 둘러 빠져 출가자의 신분을 망각하지도 않았으며, 전통을 지킨다고 변화를 무시한 것도 아니고, 혁신을 도입한다고 옛것을 팽개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중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었다. 선사가 중도를 지켜간 일은 그의 ‘혁명적 민종교(民宗敎)’라는 용어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 말을 경봉 선사(1892-1982)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대각교(大覺敎)를 지칭하면서 사용했다. 혁명적 민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뇌하는 백성의 모습을 보
말 한마디의 무게는 얼마일까? 일 진 스님 운문사 강원 학감 내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처음 출가한 예비스님들에게 가르치는 생활규범)를 배울 때의 이야기로 기억된다. 「사리불 존자는 어리나 총명한 균제에게 차례차례 법문을 일러주었다. 마음이 열려 아라한을 성취하고 두루 공덕을 갖추게 된 사미 균제는 마침내 자신의 혜안(慧眼)으로! 자나간 세상일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균제는 자신이 전생에 한 마리 개였던 것과 스승의 은혜로 사람의 몸을 받아 도를 얻게 된 사실을 알았다. 그는 깊은 환희심으로 맹세 하였다. ‘나는 스승의 고마운 은혜를 입고 짐승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될 수 있었다.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스승을 잘 모시고 시봉하며 끝까지 사미의 신분으로 있으리라.’
시국이 심상찮다. 사바세계란 원래 그런 곳이려니 하면서도 정도가 지나치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서 대립과 갈등이 있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해결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법리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발상이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은 야당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주장이고, 야당은 대통령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 불교는 내면으로의 회귀(回歸)를 가르친다. 내 안의 삼독심을 제거하지 않는 한 영원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대립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한국인의 ‘과격함’이다. 현대사의 고비 때마다 과잉대응은 언제나 일을 그르쳐왔다. 4·19의 순수성과
정치(政治)란 정치(正致)이고 정취(正趣)여야 한다. 민중을 이롭게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게 해야 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두려울 것이 없다. 천하를 얻었으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고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천하 백성은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존경한다. 국회 의사당의 노란 금 배지를 단 사람도 청와대의 국무를 담당하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생명은 민중에게 있고 나의 생명은 나를 믿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뒷모습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나의 생명을 맡겨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민중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의 정치를 하여야 하고 소승(小乘)을 버리고 대승(大乘)의 정치를 하여야 한다. 대승의 정
크리스찬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 투숙한 호텔객실에서 접하게 되는 성경이 주는 의미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청량감과 마음에 평안함을 준다. 더구나 개방화 · 세계화시대를 반영한 듯 영어로 씌어진 성경을 보면서 1조2석의 효과도 얻는다. 때로는 슬그머니 가방에 품어 집에라도 가져가 성경공부를 영어로 하고 싶다는 충동마저 순간적으로 느끼곤 한다. 얼마 전 제주도 여행 중 들렸던 호텔에 영어로 씌어진 불교성전(The Teaching Buddha)이 영어판 성경과 나란히 비치되어 있음을 보고 반가움이 두배 세배 컸다. 가르침의 내용으로나 종교태생의 역사성으로 보아 꼭 있어야할 자리에 대들보 하나가 빠져있다는 허전함을 항상 느껴왔었는데 아주 귀중한 것을 잃었다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그 동안의 불서들은 거의
간화선 하기가 어려운 요인 가운데 하나가 수행 중에 퇴보심이 생기거나 갖가지 마장이 오기 때문이다. 퇴보심과 마장으로 말미암아 화두 참구가 싫어지고 마구니의 장애가 생기는 이유는 계율에 대한 오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은연중에 계율은 구속이고 계를 파괴하는 게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때 일어나는 첫번째 문제는 발심과 신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은 들끓는 번뇌로 인해 마음이 늘 어지럽고 불안하며 고요한 선정을 이룰 수 없어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 문제는 갖가지 마구니의 장난이 생겨 수행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리심(깨달음의 씨앗)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철야정진을 한들 효과가 없다. 오히려 물러나고자 하는 마음만 일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의 2002년 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에 이르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런 발표 이후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혼으로 인한 가정해체(법적인 이혼 상태는 아니나 실질적으로는 남남인 경우 포함)는 단순히 개인의 불행 차원이 아니라 해체된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적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며, 이혼의 방지를 위한 여러 가지 견해들을 제시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이혼을 고려중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이혼 전 교육프로그램’이나 이혼 합의 후에도 몇 개월간 유예기간을 거친 후 이혼여부를 다시 생각하는 ‘숙려(熟慮) 기간 제도’ 및 심지어 최근에는 수학공식만으로도 이혼여부 예측이 가능해 이를 통한 상담 치료
불기2548년 갑신년에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조계종은 승려양성체계의 쇄신, 전통불교문화산업지원센터 건립, 승려노후복지문제 개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차 공사 완료 및 2차 공사 진행 등을 중점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태고종은 생산불교를 위한 코스닥 등록기업 (주)AMS 인수운영, 종로구 사간동 법륜사에 한국불교전통문화전수회관 신축 등을 발표했다. 진각종은 창종초기에 있었던 출가수행승제도 재도입문제에 대한 결론도출, 경주 산내연수원의 종합개발 시작, 종헌종법 개정을 통한 종단개혁의 제도화, 도제양성체계의 재확립 등을 주요과제로 적시하고 있다. 천태종은 구인사 유물전시관 및 한중조사전 건립, 나누며하나되기운동본부 운영, 군포교활동 강화 등을 거론한 바 있다. 이런 중점사업 발
물질문명이 지나치게 발전하면 종교에 귀의하는 인간의 심의가 얄팍해진다고 한다. 육안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적나라하게 분석·규명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혜안이 열려서일까? 이러다 보니 또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현대로 다가갈수록 종교에 대한 귀의는 인생행로에서 희망의 싹을 이리저리 첨삭하여 버리고 마지막 촛불을 켜는 심경에 있는 노년층의 몫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계의 노령화문제는 비단 불교계의 문제인 것만은 아닌 둣 싶다. 개신교나 천주교의 행사에 참여해보면 이러한 당면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문제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전통적인 불교국가였던 국가들에서 청소년층의 불교신자가 급감하고 있는 현상도 타종교계의 적극적인 교세확장을
남방의 위파사나와 북방 간화선의 위상을 정립하자면 남방 위파사나는 간화선 수행을 하기 위한 하부구조나 기본 수행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 명료하게 말 할 수 있다. 남방 위파사나의 최종은 ‘아라한과’를 증득 하기 위한 것이며 이 경지는 대승불교의 십지 가운데 초지에 해당된다. 간화선은 십지를 넘어선 ‘불지의 경계’를 그러니까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이다. 그런데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의 수행론과 간화선는 다르기 때문에 서로 결부시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부처 되는 과정은 삼아승지겁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행 시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간화선은 ‘일초직입여래지’라고 하여 단번에 불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최근 언론 지상을 통해 ‘아침형인간’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해, 서점에서 관련 책을 한권 구입해 읽어보았다. 물론 ‘저녁형인간’에 비해 아침형인간의 부수적인 장점들을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기술하고 있으나 우려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부 성공한 사람들(어떻게 보면 아침에 너무 철저히 집착한 독종들)의 개인적인 특수한 사례들만을 열거한 점과 성공의 기준을 그저 세속적인 잣대로만 삼았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독자들에게 단지 왜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가 보다는 획일적인 아침형인간을 위한 기술 연마만 강요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재가(在家) 선객(禪客)의 한 사람으로서 주로 아침형 성향인 (그러나 늦은 밤까지의 강의준비나 연구 및 원고정리 등 때로는 저녁
내실(內實)과 외화(外華)는 이론적으로 상응관계를 맺고 있다. 안이 튼실할 때 그 건강미는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이론보다 훨씬 복잡한 현실은 내실과 외화를 모순관계로 변질시키고 있는데, ‘빛좋은 개살구’란 우리 속담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시고 떫기만 한 개살구가 빛은 좋다는 것이다. 모순관계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마이너스적 동학(dynamics)이 역동하고 있다. 내실을 담보하지 않고 광고와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든지, 시간에 쫓겨 ‘빛좋은 개살구’를 데뷔시키는 방송과 신문의 속성이 자리잡고 있다. 부끄럼없이 자기PR에 여념없는 세태와 불러내기를 좋아하는 언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 자랑할 내실이 없어서 나타나지 않겠다는 이를 가만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