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11월 3일 입적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에 있어 지암 스님만큼 지대한 공헌을 한 스님도 별로 없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지암 스님은 현 조계종의 모체가 되는 조선불교 조계종 창립을 주도하는 등 종단의 중대사를 이끌었음에도 친일행적으로 역사적 평가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884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지암 스님은 13세 되던 1896년 양양군 명주사에서 출가해 곧이어 월정사의 해천월운 스님을 시봉하며 월정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약탈을 강행하던 중 월정사 또한 수십만 정보의 땅을 모두 잃게 될 위기에 빠지자 당시 30세의 젊은
91년 11월 6일 입적 1991년 11월 6일, 법운 이종익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불교계에서는 수행과 포교의 모범이었던 선지식이 입적했다며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이 박사는 근대 한국불교학 제1세대로 보조지눌, 보우 스님 등을 비롯해 불교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한국천태종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올렸으며, 종단개혁과 발전에도 헌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50~60년대 이 박사와 함께 정화에 참여했던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훗날까지도 “법운 거사님은 실로 현대 한국불교사를 위해 큰일을 하셨고, 현대 한국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다”며 “고인께선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정력으로 학문과 저술, 불교혁신운동과 포교, 대중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이 땅에 나툰 구마라집 화신 80년 11월 17일 입적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향훈처럼 깊고 은은한 게 또 있을까. 특히 한평생 자신을 돌보기보다 다른 이를 위해 살았던 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불천 운허(佛泉 耘虛) 스님은 상좌 월운 스님이 일컫듯이 ‘나라를 위해선 애국인, 후배를 위해선 교육인, 자신을 위해선 수행인, 고금을 통한 지식인으로 실로 우러르면 더욱 높고, 두드리면 더욱 깊으신 분’이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조국이 일제에 의해 스러져감에 따라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신혼의 단꿈을 뿌리치고 홀로 이역만리 만주벌판에서 대동청년단, 서로군정서, 광한당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 투쟁을 벌였다. 또 역사를 바라보는 긴 안목으로
1946년 11월 13일 입적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선맥의 기운이 스러져가던 한국불교를 일으킨 사람이 경허 스님이라면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은 스승의 선지를 계승해 선풍을 진작시키고 선종의 골격을 형성시킨 선지식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계율을 강조하고 선 수행을 진작시켜 한국불교 선종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일제에 맞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스님이기 때문이다. 1871년 전북 태안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난 만공 스님은 83년 김제 금산사에 있는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하면서 불법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스님은 이듬해 공주 동학사를 찾은 경허 스님을 만나면서 서산 천강사에서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게 된다. 이후 스님은 ‘우주
99년 11월 29일 입적 동곡당 일타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시작이며 출가의 궁극적 목적인 완벽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덕목임을 스스로 실천하면서 강조했던 스님이기 때문이다. 일타 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양산 통도사의 고경 스님 밑으로 출가해 송광사 삼일선원과 속리산 복천암 선원 등지에서 참선을 하며 깨달음에 대한 수행을 시작했다. 오른손 열두마디 단지 1949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고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듬해부터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운수 납자의 길에 들어섰다. 스님은 응석사 선방, 범어사,
1983년 12월 16일 입적 “스님은 오늘도 진흙 속에 허덕이는 우리를 놓아두고 마침내 가셨습니다. 스님!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1983년 12월 22일 구산 스님의 영결식에서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박완일 신도회장은 이 같은 조사를 통해 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그 만큼 스님은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29세의 늦깎이로 출가한 구산 스님은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수행에 전념했다. 출가 이후 송광사와 백양사, 통도사, 해인사, 금강산 등을 돌며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이뭣꼬’를 의심했다. 생사를 건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대사를 해결하게 된 스님은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회
63년 12월 1일 입적 회당 손규상 종사는 진각종을 개종한 한국 밀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근대불교가 산중, 기복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재가 중심의 실천 불교를 강조함으로써 민중불교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그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흥행했던 밀교의 전통과 재가중심의 실천 불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진각종을 개종함으로써 한국불교에 있어 처음으로 재가자 중심의 불교를 만들었다. 1902년 울릉도에서 태어난 회당 종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출중해 이미 7세 때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섭렵했다. 특히 10세 되던 해 ‘마음 하나 천만을 당적하고 흰 바탕에 단청을 그린다(心一當千萬 質白畵丹靑)’는 시구를 지어 그의 학문 세계가 무르익었음을 과시하기도
69년 12월 20일 입적 현공 윤주일 법사는 만해 스님 뜻을 받들어 항일운동, 불교청년운동, 교육가, 사회사업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학계나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중불교의 기치를 걸고 저술-교육 활동을 통해 포교활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항일운동과 사회사업 등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친 점에서 현대 한국 불교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특히 만해 사상을 계승해 불교유신론 사상을 실천하려 했으며 좬불교성전좭을 확장한 좬불교대성전좭편집 등 만해사상 선양에 주력했을 뿐 아니라 용성 스님의 뜻을 따라 역경 작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5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난 현공은 20세가 되던 해 만해, 용성 스님을 뵙고 구국의 뜻을 굳
2001년 12월 31일 입적 조계종 10대 종정 혜암당 성관 스님은 치열한 수행자의 삶으로 일관했던 이 시대 대표적인 선승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특히 1일 1식과 50여 년 간 계속된 장좌불와 등 한 순간도 수행자의 삶을 놓지 않은 채 종단이 흔들릴 때마다 위기에서 구해 내 종도들의 존경을 한 몸으로 받은 이 시대 대표적인 선지식이었다. 1920년 전남 장성군 덕진리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16세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불교·기독교·유교 등 다양한 종류의 종교 서적을 탐독했다. 일본에서 10년 간 동서양 종교와 동양 철학을 공부하던 스님은 26세 되던 해 좬선관책진좭이라는 책을 탐독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와 백
1983년 8월 6일 입적 49년 첫 주지 소임 조계총림 설립 주도 취봉 스님은 조계총림 송광사가 오늘날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송광사를 복원하겠다는 발원으로 몸소 탁발을 하며 정재를 모아 새롭게 도량을 중창하는가 하면 도제양성 기관인 조계총림 설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취봉 스님은 15세 되던 해 출가해 19세에 송광사 남호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이듬해 호은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 했다. 1923년 송광사 강원에서 중등과를 수료한 취봉 스님은 송광사에서 세운 벌교 송명학교에서 교원으로 봉직하면서 ‘교육불사’에 전념했다. 이후 불교 교학을 모두 익히겠다는 포부를 세운 취봉 스님은
67년 7월 25일 종정에 장좌불와로 개안 조-태분규 해결 견인 1967년 7월 25일. 세칭 비구·대처간의 사찰 점유권 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던 조계종은 해인사에서 임시 중앙종회를 개최하고 종단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특히 이 자리에 모인 중앙종회 스님들은 우선 실추된 종단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2대 종정 효봉 스님의 입적으로 공석중인 조계종 종정에 고암 스님을 추대할 것으로 결의한다. 평생을 인욕과 자비로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정진을 거듭해 온 고암 스님이야말로 이 난국을 타개할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고암 스님은 ‘이는 필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며 종단의 최고의 지위를 거부한다. 이에 종단 원로 춘성 스님등 종단 안팎에서
82년 7월 17일 입적 통도사 법회 중 개오 하화중생 몸소 실천 경봉 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몸소 실천한 대승보살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90세의 노구에도 법을 구하는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는가 하면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정진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봉 스님은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07년 양산 통도사 성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듬해 9월 청호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다시 1912년 해담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입학해 경전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경전의 한 구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스님은 이 때부터 ‘
61년 7월 17일 입적 용성 화상에게 인가 평생 무소유 삶 실천 인곡 스님은 평생 두타의 행각을 몸소 실천해 보인 수행자로 추앙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 그 회상에서 정진 수행하며 두각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일생동안 후학양성에 힘쓰며 수행정진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1895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난 인곡 스님은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불문에 들어 “열심히 수행해서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결의할 정도로 비상한 인물이었다. 스님은 워낙 신심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서인지 ‘창수’라는 속명 그대로 법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출가한 뒤 문수사에서 만난 금성 화상을 은사로 머리를 깎은 스님은 19세가 되던 해 백양사에서 1년 동안 교육과정을 마친 뒤 20살이 되던 해 금해 율
친일승 출송 앞장 100세 노구에도 운력 97년 7월 10일 입적 문성 스님은 평생을 보현행자로서의 삶을 실천한 수행자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좌선과 울력, 포행, 오후불식 등 젊은 수행자도 쉽게 따르지 못하는 정진력을 보여주는가 하면 중생들을 위한 이타행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문성 스님은 어려서부터 집 근방에 위치한 통도사를 자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불법에 인연을 맺게 된다. 14세 되던 해 고성 옥천사에서 설운 스님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은 문성 스님은 이후 통도사 강주였던 서응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 받으면서 출가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제시대라는 암흑기에 출가한 문성 스님은 이후
불교 현실참여 강조 인도 간디에 비견 44년 6월 29일 입적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만해 한용운(1979~1944) 스님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의 기도로 인한 과로, 갑자기 발병한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극찬하던 위당 정인보(1892~?). 그가 스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조에서 묘사하듯 만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과 같았다.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15세발심, 입산수행 66년 천태종 창종 74년 4월 27일 입적 천태종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는 한국불교 천태종을 중창해 현 천태종 중흥의 기반을 닦은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다. 상월 스님은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에서 부친 박영진 씨와 모친 삼척 김씨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본명은 준동이며 법휘가 상월, 의호가 원각이다. 상월 스님은 5세 때에 서당에 입학해 13세가 되던 23년 가을까지 한학을 배우며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한시와 습자에도 능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4세에 삼척유지공장에 취직해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상월 스님은 이 때에 ‘인간이 동일한데 빈부의 차와 상하의 계급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탄허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 역경에 주력했다. 한암 스님 은사로 득도 불교 내전-선학 수학 83년 6월 5일 입적 탄허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 특히 『화엄경』과 『주역』의 으뜸 권위자로 평가받은 당대의 학승으로 손꼽힌다. 번역 작업에만 8년이 걸리고 약 17년의 노고 끝에 이루어 낸 총 47권의『신화엄경합론』이 스님에 의해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암 스님의 유촉을 받아 시작한 역경 작업은 유·불·도에 통달해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대 작업이었다. 작업하는 20여 년 동안 스님은 밤 9시에 자고 자정에 일어나 다시 원고를 작성하는 눈물겨운 고행을 계속했다.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스님는 15년 동안 한암
한국불교연구 틀 마련 역경원 설립-후학 양성 대장경 영인본 발간 88년 5월 25일 입적 효성(曉城) 조명기 박사는 근대 한국불교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한국불교학이 자리 매김 하지 못했던 일제시대 일본에 흩어져 있는 원효 스님의 관련자료를 수집해 한국불교를 연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는가 하면 동국대에 불교문화연구소와 역경원 등을 설립해 체계적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1905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조명기 박사는 통도사 주지였던 경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는 등 불연(佛緣)을 맺으면서 불교학에 전념하게 된다. 조 박사는 24세 되던 해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전수학교에 입학해 만암, 한영, 포광, 능화 스님 등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들의 지도아
1968년 5월 17일 사망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레라” ‘승무’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은 한국적인 정서, 선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유교가문에서 태어난 조지훈이 불교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조지훈은 혜화전문학교를 마치고 1941년 월정사 강원의 외전강사를 맡게 된다. 당시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적송 추엽의 추천으로 만몽민속품참고관에 취직됐으나 그 자리를 사양하고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직을 택한다. 조지훈은 후일 이 선택을 “가르친다는 보람보다 쓰러지려는 나를 가누려는 불가피한 몸짓이었다”고 술회했다. 월정사 강원 생활을 통해 그는 불교적 우주관과 선적 자연관을 흡수한 시기
1912년 4월 26일 입적 한국 근대선의 새벽을 밝힌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없이 답하는 인물이 바로 경허 선사이다. 한국 근대선의 중흥조 경허 선사는 1846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나 9세 때 의왕 청계사에서 계허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이후 동학사에서 강사로 활동하던 경허 선사는 위없는 깨침을 얻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턱 아래에 송곳을 두고 생사를 건 화두참선에 들어갔다. 어느날 “소가 코뚜레를 꿸 콧구멍이 없다”는 한 처사의 말에 활연대오한다. 경허 선사가 이를 게송으로 지었으니 “홀연히 코뚜레를 꿸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몰록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라는 유명한 게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