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미래, 또는 현재의 인공지능에 대해서 어떠한 불교적 답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개인적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학계에서 원효 스님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논할 날이 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펼쳐지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뭔가 펼쳐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순간은 제게 있어서 비현실적인 메타버스 같은 상황입니다. 저는 오늘 메타버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좀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는 엔디비아는 그래
유수임아사자좌(有誰任我師子座)자괴금일야간명(自愧今日野干鳴)수연아유변신술(雖然我有變身術)번호화사우일생(飜狐化獅又一生)“누가 있어 나에게 사자좌를 맡겼는데/ 참으로 부끄럽구나, 오늘 여우의 소리를 하고 있으니/ 비록 그러하나 나에게 변신술이 있으니/ 여우의 몸을 바꿔 사자로 일생을 살아보자.”이 시는 조계종의 통합종단 첫 종정을 지내신 효봉 큰스님의 게송입니다. 후학들을 격려하는 이 시는 언제나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유수임아사자좌(有誰任我師子座), ‘누가 있어서 나에게 사자의 자리를 맡겼는데’, 사자의 자리는 말하자면 부처님의 자리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말씀으로 강의를 대신할까 합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영축산에 계실 때 아침마다 탁발을 가시면서 매일 같은 광경을 보게 됐습니다. 젊은 청년이 매일같이 강물에 목욕을 하고 동서남북과 상하 여섯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참 이상하다 생각을 하다가 하루는 청년을 불러서 왜 그렇게 매일 목욕하고 절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왜 절을 하는지 뜻은 모르겠다면서, 다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매일 아침 강물에 목욕하고 여섯 군데에 예경을 드려라’라고 해서 그렇게 하고 있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을 간략하게 정의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몇 가지 본질적인 것을 들어 불자님들은 물론 국민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동안에 우리 인류의 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점도 없지 않고, 또 각 시대를 통해 학자들의 해석이 여러 가지로 있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나라, 그 지역의 민족들이 갖고 있던 사상과 혼합되어 있으므로 오늘 우리가 그 본질의 근원을 밝혀 재조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우리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나와 같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제자라도 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불자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이 화엄법회 역시 사부대중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법회라고 생각합니다.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서부터 하느냐? 공부는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무엇을 위해서 하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 죽비 소리에 맞춰서 삼배하고 입정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사 스님 같으면 이 순간 법문이 끝난 겁니다. 여기서 삼배를 올리는 것은 내가 가진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다 내려놓고 온전하게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삼보란 무엇일까요?이 세상 모든 종교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 종교를 창시한 교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단체가 있어야 합니
오늘 저는 ‘니르바나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장기간 이어지는 코로나로 인해서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있고,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번뇌 망상을 다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또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이 있는 최상의 행복한 상태가 열반일 것입니다. 열반이란 괴로움, 분노, 망상, 분별, 집착, 시기 등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리고 최고 상태에 도달한 경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반갑습니다. 저는 기자로 35년간 생활했습니다. 한국에서 16년, 미국에서 16년, 최근 3년간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뉴욕의 원각사라는 절을 다니고 있습니다. 원각사도 이곳 홍법사와 비슷한 자연 속에 있는 대도량입니다. 대부분의 미주 지역 사찰은 도심의 작은 포교당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원각사는 상당히 넓습니다. 한 30만 평 되니까 미주 최대 규모의 도량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불교가 미국에서 그만큼 넓은 부지를 차지한 도량이 있고 역사도 48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
몇 해 전 어느 잡지사로부터 ‘무소유와 풀소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무소유와 풀소유는 과연 대립 관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반대 개념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해도 얼마든지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다간 인물들도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무소유의 정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법정 스님의 생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부처님 몸이 법계에 가득해서/ 널리 일체중생의 앞에 홀연히 나타나도다./ 인연에 따라 어디나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보리좌에 항상 앉으옵소서.이 게송은 ‘화엄경’의 ‘여래현상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저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이 되면 이 게송을 자주 새깁니다. 오늘처럼 청초하게 맑은 하늘이 드리운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녹음이 우거지는 6월은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어서 어중간한 계절이라고들 합니다. 그렇지
오늘 이 자리에는 제가 가르침을 받아야 될 어른 스님들도 계십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법문이라기보다, 우리 보문사 선원이 멋지게 개원해 한국불교에 새로운 선풍을 드날리기를 바라는 축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오늘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우리 불자, 사부대중 여러분께 오늘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4월 초파일에 부처님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거룩한 모습을 나투셨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어버이날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감사한 부처님과 부모님이 드디어 하루에 만난 날입니다. 그러니 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는 인문학의 문학, 역사, 철학 중에서도 문학 이야기입니다. 인문학이든 불교든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숙제임은 분명합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굉장히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를 쉽게 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방편설’이라고 부릅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통해 진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일,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오래 고민해 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소설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대승경전입니다. 소설은 단순히 옛날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옛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