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1월30일 한국불교 최초로 군법사(軍僧) 5명이 임관된 날을 ‘군승의 날’로 기념하는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에서는 50주년이 되는 2018년에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1968년 군법사 5명 첫 임관이승만 정권, 한국전쟁 당시개신교 이어 가톨릭도 군종17년간 기독교 군종만 유지아시아 불교국가 역사에서는 일제가 청일전쟁·노일전쟁·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 승려들이 장교로 파견되어 “장렬한 전사가 해탈의 길”이라고 역설하며 부처님 법을 어기고 전쟁을 독려하기 이전에는 군종장교 제도가 없었다고 해도 될 것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승군을 일으켜 지휘하며 관군보다 더 큰 활약을 하고 임금 선조의 부탁을 받아 수신사가 되어 일본을 오가며 전후 처리 등 외교를 맡았던 사명대사 동상을 제막하는 행사가 1968년 5월11일 서울 장충공원에서 열렸다. 송영수가 조각하고 이희승의 발문을 서예가 김충현이 써서 새긴 동상 제막식에는 대통령 박정희 부부와 국회의장 이효상, 조계종 종정 고암 스님 등 5000여명이 참석했다. 동상 제막 사진에서 보듯이 군 의장대와 악대가 동원되어 분위기를 돋우고 있어서 동상 건립이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쿠데타 두 달 만에 민정이양 계획을 발표하였지만, 이 약속을 여러 차례 뒤집었다. 게다가 쿠데타 세력이 연루된 비리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궁지로 몰리게 되자 1962년 7월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 ‘개헌 논의’로 난관을 돌파하려고 하였다.독재합리화 위한 꼼수 개헌신문사설 통해 거세게 비판불교학자·시인도 적극 후원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헌법을 개정해서 '합법적 집권'을 꾀하는 것이었지만, 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해 5월부터 동아일보
안진오‧서윤길‧고익진‧김선근‧이민용‧송재운‧오형근‧차용부‧목철우(목정배)‧박선영‧이진두‧문명대‧이무웅(홍파스님)김금태‧박명순‧김규칠‧박세일‧윤제철‧신광수(법타)‧조용길‧송석구‧최동수‧이용부‧김춘송‧박호석…, 승재가를 막론하고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던 이 인물들의
1962년 통합종단으로 출범한 조계종은 교단 정상화를 위한 발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씩 내딛고 있었다. 종립 동국대학교를 정상화하고, 종비생 제도를 두어 승려들에게 현대식 교육을 시키며,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경전 번역을 시작하였다.1967년 종회서 총림법 통과성철 스님 방장 추대로 출범몇 달 뒤 비구계 수계 법회순차적 늘어 현재 8대 총림 그러나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중요한 과제는, 승가의 수행 풍토를 확립하고 비구·비구니 등이 ‘정식으로 부처님 제자가 되었음을 인정해주는 수계(授戒와 受戒)’를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성직자(
1963년 9월 22일 창립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전국 지부장회의·전국대표자대회 등을 통해 조직을 다지는 한편 그해 12월26일부터 1주일 동안 속리산 법주사에서 회원 39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차 수련대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출가 수행자들과 똑같은 일정으로 수련회를 진행하였고 지도교수인 이기영과 서경수는 학생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대승기신론·반야심경 등의 강의를 진행했다. 회향식에 청담 스님과 김법린 동국대 총장 등이 참석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젊은 대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박성배·서경수 지도교수로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은 1962년 4월 통합종단 출범 이래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우리 글로 번역하여 불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역경’을 ‘도제양성·포교’와 함께 종단의 ‘3대 지표’ 중 하나로 설정했다.1964년 7월21일 30년 추진역경은 통합종단의 3대지표예산·인재부족 가장 큰 역경그러나 “고려대장경을 모두 우리 말 ·우리 글로 풀어내겠다”는 원력은 있었지만 막상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재정 능력과 인적 자원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7월 21일 운허
1960년대 초반, 비구·대처 갈등과 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극심한 혼란 상황에 있었지만 당시 종단의 미래를 내다보는 스님들은 “이럴 때 일수록 미래 인재 양성에 힘을 써야 한다”고 자각하고 그 실현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세속에서 훌륭한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전쟁 중에도 장교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생각이었으리라.중앙종회, 1962년 교육법 공포“인재양성 제일 목표로 할 것”월탄·현해·혜성 등 15명 졸업1962년 12월 조계종 중앙종회는 ‘종비생(宗費生) 교육법’을 제정·공포했다. 종단이 돈을 대 스님들이 동국대
1963년 9월 22일 동국대에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창립식이 있었다. 이 일은 조선시대 500여년의 억불(抑佛)과 일제 강점기의 수모, 해방 이후 이어진 비구·대처의 갈등과 분쟁으로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한국불교에 새로운 물결이 흐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큰 사건이었다.1963년 9월, 청담 스님 등승재가 지도자들 대거 동참수행자 버금가는 결사 실천이 사진은 이날 창립식에서 대불련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신호철(서울대 재학)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단상에는 청담 스님 등 대불련 창립을
1961년 5월16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정의 모든 활동이 계엄사의 통제에 따르게 되었고, 이 쿠데타가 가져온 충격은 분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불교계에도 미칠 수밖에 없었다.1961년 박정희 권력 실세 등극“분쟁 계속 되면 묵과 않겠다”장관 참여 아래 양측 대화시도전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이하 박 의장)는 1962년 1월13일 불교계 분쟁과 관련해 세 번째 담화를 발표하여,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인 재건의 기회를 부여하나… 분쟁이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1960년 4·19혁명으로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불교계에서는 이승만의 이른바 ‘정화 유시’로 종권 싸움에서 강제로 밀려났다고 여기고 있던 대처 측의 움직임이 새로운 분규의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이승만 독재정권 무너지자대처측 항소 등 법적 대응비구측 500여명 시위행진여섯 비구 등 할복도 시도혁명 직후인 5월 초부터 이미 본격적인 갈등이 불거져 신문에 “불교계에 소동·대처승들이 [부산] 대각사 점거”(동아일보, 1960.5.1.), “정변계기로 불교계 싸움 재연. 대처승들이 반격·사찰 운영권 내놓으라고 폭행까지”(동
지난 31회와 32회 연재에서 썼듯이, 한국 불교 정화의 불을 점화한 것은 1947년 문경 봉암사 결사이고, 그 불을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한 것은 1954년 8월과 9월에 연이어 개최된 제1차와 2차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였다. 그리고 1955년 8월12일부터 15일까지 조계사에서 열리는 비구 측의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정부가 추인해주면서 비구승들이 조계사에 입주하여 간판을 달고 업무를 하게 된 것이 정화의 전환점이 되어 일단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을 설립한다. 신문에서도 “불교계분쟁 종막. 전국승려대회를 합법으로 인정”이라는 제목의 기사
“세계는 이제 혼란이 극(極)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귀의처(歸依處)를 지향하고…안으로는 우리 교단정화운동으로 민족의 등대가 됨과 동시에 밖으로는 혼란의 극에서 방황하는 세계인류에 목탁이 될 것을 내외에 성명한다. 우리는 선망(先望)의 유훈(遺訓)을 여실봉행(如實奉行)하여 인류의 의심을 타파하고 실증(實證)을 보일 것이며 허위망집(虛僞妄執)한 대중의 표월지(標月指)가 되어 서원을 실현시킬 것을 선서하는 바이다.”1954년 8월 선학원서 개최청담·동산·금오스님 등 동참비구승 주도 불교정화 시발정치권 외부세력 의존 한계195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究竟)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넷째, 소작인의 세조(貰租)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이를 단연히 청산한다. 다섯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백범 김구(1876~1949)는 1948년 8월15일과 9월9일에 남과 북이 각기 서울과 평양에 단독 정부를 세운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이듬해 6월26일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 뒤 공주 태화산 마곡사에서는 8월13일에 백범의 영가 천도를 위해 49재를 봉행한다.마곡사서 출가해 승려생활해방 후 불교계 감사 표현김구 서거 후 불교계 추모“그 위엄스럽고도 자비스럽던 선생의 풍모는 다시금 이 세상에서는 뵈올 길이 바이없게 되었다./ 떠돌아 70년을 비바람도 세옵더니(거세더니)/
근대 불교사에 등장하는 유명 인사 중 지암종욱(智庵鍾郁, 이하 지암)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다. 3·1민족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참여 등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지만, 나중에 서훈이 취소되는 등 살아서 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논란의 중심에 놓였던 것이다.지암 주도로 전투기 5대 헌납범종까지 전쟁물품으로 내놔지암의 ‘위장친일’ 옹호 잘못과오 인정이 곧 올바른 평가‘극과 극’ 사이를 오고갔던 지암의 일생은 불교와 관련한 그의 활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1923년 오대산 월정사의 사채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아니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인 서울 종로 수송동의 조계사 대웅전은, 1937년 5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938년 10월에 준공하였으니 그 역사가 80년에 지나지 않는다.불교계 뜻 모아 총본산 건립집집마다 부처님 받들기 발원본·말사 스님들도 적극 참여전북 정읍 보천교 건물 활용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핍박받으면서 서울 4대문 안에는 절을 세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스님들의 도성 안 출입까지도 금지되었으니, 승가·재가를 막론한 불제자들은 서울 한복판에 번듯한 대웅전을 세워 무너진 불교의 자존심을 일으
현재 국내 최고급의 신라호텔이 있는 자리는 1932년부터 민족해방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일제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겸한 절을 세워 운영하던 곳이다.이토 사망 23년 맞아 낙성식이광수 등 친일 부역자 참석식민지 지배 위한 활동 목적본래 이곳은 1895년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충성심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제단을 쌓고 ‘장충
1941년 3월4일부터 10일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 이하 법회)는, 당시 전국의 승려 6000여명 중 독신 비구승이 300여명에 지나지 않던 시절에 “조선 불교의 전통을 살리겠다”며 비구승 34명이 서울 중심가에서 개최한 대회였다. 총독부 지원을 받는 ‘권력’과 ‘세속 생활’의 맛에 물든 승려들을 상대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우리가 조선 불교의 주인공이다”며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1941년 3월 중앙선원서 열려‘경허 계승자’ 만공스님 주도끝까지 선사 의연함 보여줘당시 상황에서 이 ‘법회’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자신을 정제하고, 물에 담긴 달처럼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라(霜松潔操 水月虛襟).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지. 영명연수 선사 문집의 서문에 나오는 글인데, 시류와 이해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탐심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야.”이판·사판 연연해하지 않고종단 힘들 때마다 적극 참여총무원장·승가대학장도 역임어린이법회·현판 한글화 주도2004년 ‘법보신문’의 새해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고(故) 석주 정일(昔珠正一) 스님은 일생을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꼿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