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창가로 책상을 옮겼다. 내다보이는 앞산은 겨울이라 스산하기 짝이 없는데도 굳이 이 계절에 창가로 책상을 옮긴 까닭은 새들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함이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새들의 겨울나기를 걱정하다가 모이를 평소보다 갑절로 내 놓는 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평소에는 곡류만 줬는데 견과류 몇 종류와 가끔은 육류의 지방덩어리도 추가했다. 그랬더니 찾아오는 새 종류와 숫자가 급격히 늘었다. 발걸음을 하지 않던 박새까지 찾아오는 걸 보니 확실히 이 계절이 곤궁하긴 한가보다. 새들마다 좋아하는 모이가 다르다. 어치는 견과류
때 이른 초겨울 한파로 거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12월이 오기도 전에 벌써 한파가 닥쳤다. 지구온난화라면서 왜 겨울이 이리 춥냐는 소리도 들린다. 보통 절기 이름으로 보면 대한이 가장 추워야 한다. 큰 추위라는 뜻이니까. 그런데 ‘대한이 소한이네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처럼 실은 대한보다 보름 앞에 오는 소한이 가장 춥다. 소한은 동지와 대한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인데, 동지 때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다. 그러니 땅의 기온도 내려간다. 그런데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자마자 곧장 기온이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보통 보름에서 한 달
5년 가까이 쓰고 있는 스마트폰에 지난겨울부터 문제가 생겼다. 완전히 충전을 해도 스마트폰을 충전기에서 분리하는 순간 배터리 잔량이 뚝뚝 떨어져 채 한 시간도 못 되어 방전이 되었다. 내가 쓰고 있는 제품이 추위에 유난히 취약하다는 주위의 의견을 수렴해서 따뜻해지는 계절까지 기다려봤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보조 배터리를 따로 구입할 수 있어서 좀 번거롭긴 해도 스마트폰을 쓰는데 큰 불편은 없다. 문제는 어쩌다 외출하면서 보조 배터리를 미처 챙기지 못했을 때다. 급히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생겼는데 스마트폰이 방전되어 낭패를 당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 창 너머를 잠시 내다보고 있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이미 어둠은 온전히 내려앉아 사위가 깜깜하다. 겨울이라 일몰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게 실감이 났다.문득 내 시야에 반짝이는 불빛이 들어왔다. 앞 동 어느 집 거실에 마련해 놓은 크리스마스트리에서 색색의 전구가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덧 연말이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이며 쇼핑센터 외벽이 연말 분위기를 내는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던 게 떠올랐다. 며칠 전 길을 가다가 한 가게에서 점원이 밖으로 나와 호객을 하며 들고 있던 손 팻말이 떠올랐다
지난 13일 오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북한병사 한 명이 넘어왔다. 추격하던 북한군은 그를 향해 40발이 넘는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북한병사는 5발 이상의 총상을 입고 군사분계선 남쪽 지점의 낙엽더미 속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헬기편으로 병원에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아직까지 호전여부를 단언키 어려울 만큼 위중한 상태라 한다. 그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모든 뉴스가 집중했다. 다들 비슷한 심정일 테지만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병사의 생명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환경부, 멧돼지·참새 등 수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 지났다. ‘이제 추워질 일만 남았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진다. 추위를 많이 타긴 하지만 겨울철 집안 온도는 18도에 맞춰져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집수리를 할 때 단열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현관과 거실 사이에는 중문을 달아서 바깥으로 온기가 나가는 일도, 바깥 냉기가 들어오는 일도 가능한 차단했다. 단열이 잘 되니까 실내온도가 18도로 내려가도 새벽에 살짝 한기가 느껴질 뿐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중앙난방이어서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반팔을 입고 지내야
도시의 동물들 고난 시작될 겨울그들도 평등하게 생존할 권리 있어고통 공감해 덜어주려는 자비심 필요해가 뉘엿뉘엿 저물던 시각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자료를 찾아 나오다 검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벤치 뒤에서 까만 눈만 내밀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길고양이였다. 언뜻 봐도 새끼 고양이였다. 오가는 사람들 발길 너머로 뭔가를 살피는듯하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자 얼른 덤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양이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람 발길이 뜸해지자 고양이는 내가 처음 눈동자를 발견했던 그 자리
살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결정을 하게 된다. 결정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어서 사소한 것부터 중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비중이 크든 적든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오죽하면 ‘결정 장애’란 말도 있을까. 나 역시도 결정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결정하는 일이 왜 힘들까를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린 뒤 찾아올 후과가 클 경우 그 책임이 너무 버겁기에 애당초 결정을 내리는 일을 주저하곤 한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일은 매 순간 결정의 연속이다. 약속 시간에 늦어
숲이 알록달록 물드는 계절이다. 산꼭대기부터 노랗고 붉게 번져가는 단풍이 곱다. 단풍이 들고 잎을 떨구는 일은 나무가 겨울을 지내려는 현명한 방법이다. 잎을 떨구는 일을 게을리 했든 집착 때문이든 만약 나무가 겨우내 잎을 달고 있게 된다면 잎사귀로 물과 양분을 쉼 없이 공급해야한다. 물관에는 물이 계속 이동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기온이 크게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물관이 얼어 터지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나무는 적절한 때에 잎과 줄기 사이에 있는 연결 부위를 차단한다. 이렇게 해서 떨켜가
참 긴 연휴였다. 명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해버린 시절 탓일까? 긴 휴일 동안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상당했던 것 같다. 고속도로는 연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저속도로가 되어야했고 연휴 막바지에 인천공항은 연일 사상 최대 인파를 기록했다. 15세기 숲 사라진 이스터 섬석상만 남은 채 불모지로 변해지구 몸살 난 현재 상황과 비슷삶 보는 이분법적 시선 넘어서야베트남 휴양지에 있는 세련된 리조트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며 한 지인이 SNS에 올린 사진을 보니 이스트 섬이 생각났다. 사라진 문명의 대명사와도 같은 이스트 섬의 오늘날 모습은 불모지
추석이다. 명절은 바삐 사느라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이고 내 뿌리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고향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일 수도, 조상이 대대손손 살아온 곳일 수도 있으며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미리 차표를 사는 번거로움을 흔쾌히 감수하고, 차가 밀려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다. 올해처럼 연휴가 긴 명절에는 고향방문 대신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으나 어느 곳에 있든 명절의 의미는 따뜻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명절이 모두에게 즐거운 날은 아니다. 오래전
세 나라가 있다. 우연히 그 세 나라의 과거사를 들여다보다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세 나라 모두 한때는 같은 시도를 했다. 그러다 현재 두 나라는 같은 길을 또 한 나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같은 길을 가는 두 나라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평화적 사용 내세워 핵발전 보급독일, 환경문제 눈뜨고 반핵운동덴마크, 시민 반대로 핵발전 접어일본, 핵발전소 짓고 원전사고유전이 개발되면서 석유가 일상적인 에너지의 대명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가 들이닥친다. 4차 중동전쟁과 이란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