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훈아, 삼개사 주지스님이 너한텐 동국대 경찰행정학과가 딱이라고 하더라.”하루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강릉고 2학년이던 이상훈 한국교수불자연합회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詩)를 즐겨 쓰고 문학을 좋아하던 그였다. 강릉 오죽헌에서 열리던 ‘대현 이율곡 선생 제전’ 백일장에서 장원(壯元)을 할 정도로 실력도 출중했다. 친구들과 모여 매달 발간하던 시집에 막 재미를 붙일 무렵이었으니 ‘경찰’이란 두 글자가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이 회장은 강릉고에서 단정하기로 소문난 ‘범생이’였다. 그가 “동국대 경
요즘 시대엔 깨달은 도인도, 선지식도 없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되레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반드시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절실함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곁에 도인과 선지식이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못 갖춘 것은 아닐까.중앙승가대 전 총장 성암종범(惺庵宗梵) 스님은 이 시대 도인이고 선지식이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통도사 벽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통도사승가대학 강주를 지내고 30여년간 중앙승가대에서 수많은 학인을 지도해온 교육자다. 2000년부터 8년간 중앙승가대 총장을 역임한 스님은 지금
지난 2월6일 일어난 튀르키예의 지진으로 마음이 아프다. 수만 명 죽음이 확인되었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해 더미에 깔려있는지 알 수 없다. 하늘은 무고한 백성들에게 왜 이리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는지 모르겠다. 한국인들은 마음속에 튀르키예가 6·25전쟁 때 4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준 형제국으로 각인되어 극한의 고통을 나누기 위한 성금과 물자를 현지로 보내고 있다. 인간과 인간이 연대하는 것은 사회적 연기(緣起)의 실천행이다. 지구 위에 다양한 형태로 절망에 처한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가치가 아닐
문화재청이 칠백의총 주변 정비사업을 오는 8월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불교계가 요구해 온 ‘천오백총’ 또는 ‘의승·의병의 총’으로의 명칭 변경은 “고증 자료가 필요하다”라는 이유를 내세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승군이 청주성 수복을 비롯해 행주대첩, 평양성 탈환, 노원평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영규대사와 의승이 제1차 금산(눈벌)·청주성전투·제2차 금산(연곤평)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 ‘기
천태종 창원 원흥사 금강불교대학의 2022학년도 교육과정의 수료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법석이 마련됐다.원흥사(주지 월도 스님)는 2월17일 경내 4층 법당에서 ‘2022학년도 창원 금강불교대학 수료식’을 봉행했다. 법석에서는 불교학과 10기 42명을 비롯해 지난해 처음 개설된 다도학과 1기 16명 등 총 58명이 수료증을 받았다.원흥사 주지이며 창원 금강불교대학장 월도 스님은 회고사에서 “불자가 지녀야 할 4가지 덕목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갖는 신(信),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해(解),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행(行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 성도를 하시고 법을 전하기 위해 사르나트(녹야원)까지 7일 만에 가셨다.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 273km이니 하루에 40km가량을 걸으신 셈이다. 맨발에, 더운 날씨까지 길거리에서 자고, 걸식하셨을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초인적인 걸음이 아닐 수 없다. 무명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법을 펴겠다는 대자비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은 2월18일 28km를 걸어 숙영지 파르사에 도착했다. 첫 번째 성지인 사르나트에서 8일간 하루 평균 25km를 걸어 두 번째 성지 보드가야까지 이제
싯다르타라는 한 사람이 부처가 됨으로써 비로소 불교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경험도 그렇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과정들을 보면 항상 복잡하고 어려워서 허덕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조금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화두처럼 붙잡고 있습니다. ‘21세기 발보리심경’도 그런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진 내용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좋도록 해 보려 애쓴 결과물입니다. 오늘은 ‘21세기 발보리심경
금산 칠백의총에 조선후기까지 의승(義僧)을 위한 제향공간이 별도로 있었음에도 정부가 이를 복원하지 않고 외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문화재청은 “종용사 오른편에 별실(別室)로 승장사(僧將祠)가 존재했다”는 박범 공주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을, 자체 발간한 보고서에 수록하면서도 정작 칠백의총 종합정비사업에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왜적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던 창원에 기념 공원을 조성한 것과는 대조적이다.문화재청이 2021년 9월23일 발간한 ‘칠백의사 그 충절의 기록들’에 따르면 조헌·고경명 등 21
불교총지종이 종조 원정 대성사 탄신 116주년을 기념하는 법회를 봉행했다.총지종(통리원장 우인정사)는 1월29일 본산 총지사 원정기념관을 비롯한 전국 사원에서 ‘종조 원정 대성사 제116주년 탄신대재’를 봉행했다. 1907년 1월29일 경남 밀양군에서 태어난 원정 대성사는 1972년 12월24일 ‘즉신성불’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기치로 총지종을 창종하고 밀교발전에 진력했다. 본산법회에는 통리원장 우인 정사를 비롯해 서울 경인교구 스승과 교도들, 유가족 대표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종령 법공 정사는 법어에서 “스승과
옳고 그름의 원칙을 강조하면 답답해 보이고, 좋고 나쁨의 성과를 우선하면 경박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 둘의 입장을 뛰어넘어 아예 시시비비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완전한 성품을 갖추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각각 의무론과 결과주의 및 덕론을 단순화시켜 본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에게는 이런 세 가지 윤리적 요소들이 저마다 비대칭적으로 뒤섞여 있어서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산티데바의 입장이 현대의 행위·결과주의에 가깝다면, 아상가는 다소 복잡한 버전의 규칙·결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
태초에 무명이 있었다. 12연기는 그 태초의 무명에서 시작한다. 그때 무명이란 중중무진으로 중첩된 무상의 카오스다. 무상하기에 포착할 수 없는 어둠, 그것이 무명이다. 그것은 어두워서 안 보이는 무명이 아니라, 아무리 밝아도 안 보이는 근본무명이다. 그것은 빛을 비추어 몰아낼 수 있는 어둠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상을 만들기에 놓치게 되는 무상한 실상이다. 석굴의 어둠은 그 자체로 무명이다. 빛이 들어서기 전의 어둠이다. 그건 물론 익숙한 것들이 지워지기에 우리를 방황케하는 혼돈이지만, 동시에 실상이라 믿던 상들이 지워지며 모든 것
알은 성체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기관으로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함축하고 있다. 즉 알 속에는 성체의 기관들이 수행할 모든 기능이나 능력이, 어떤 형상도 없이 거기에 있다. 나아가 발생조건에 따라 ‘예정’ 없는 형상, 때에 따라선 괴물 같은 형상으로 출현할 형상조차 그로부터 나온다. 알은 스스로 그 모든 상을 지우고 감춘 하나의 상이다. 빛을 비추면 분화될 기관들이 아직 미분화된 어둠 속에 있다.알이 어둠 속에 있다고, 어둠을 알과 같다 할 순 없다. 어둠은 어둠이다. 덕산이 본 짙은 어둠은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가리지만,
인도와 동아시아는 불교를 매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의 구법승들이 중국을 넘어 인도로 갔듯 인도의 고승들이 직접 한반도에 와서 불법을 전하고 일으켰다.기록에 따르면 불교는 인도에서 서역과 중국, 혹은 남방 해양을 통해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중국 북방 육로를 통해 전해졌다. 지루가참(支婁迦懺), 지겸(支謙), 축법란(竺法蘭), 구마라즙(鳩摩羅什), 순도(順道) 등은 서역 승려이다. 순도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반하여 불도징(佛圖澄), 달마(達磨), 지공(指空) 등은 천축국 즉
“진심과 공심으로 소통하는 새해 되길”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새해의 둥근 해가 높이 떠올라 삼라만상을 밝게 비추니 산과 바다가 춤을 추고 농촌사람과 도시민이 함께 기쁜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천복(千福)을 여니 만물 모두가 새롭습니다.대한불교조계종은 진심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공심으로 사부대중과 소통하겠습니다. 개인개인의 팔만사천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누구나 선명상(禪冥想)을 통해 평상심을 되찾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시대의 지남(指南)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
화려한 빛과 색채의 고딕 성당과 달리, 로마네스크 성당은 무겁고 어둡다. 그러나 어둠은 로마네스크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이용되는 경우에조차, 빛과 대립되지만 빛을 보조하는 짝이거나 빛과의 대비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형상이었다. 계몽주의와는 반대쪽에 있었을 것처럼 보이는 중세 신학 안에서도, 빛은 언제나 신과 진리, 선과 덕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어둠은 그것을 드러내주는 배경이거나, 그것에 의해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이원론적 대립은 무지와 몽매를 겨냥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쉽게 설득력을 얻는다.
龍吟枯木猶生喜 髑髏生光識轉幽용음고목유생희 촉루생광식전유磊落一聲空粉碎 月波千里放孤舟뇌락일성공분쇄 월파천리방고주(용이 고목에서 우니 오히려 환희가 솟아나고/ 해골에서 광채가 빛나니 알음알이 깊어지네./ 한 자락 벼락같은 큰 소리는 허공을 부수고/ 달빛 파도치는 천 리에 홀로 배 띄우네!)조선 후기 고승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스님은 동진 출가해 청허휴정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유정 스님과 함께 의승장으로 3년간 참전했다. 부안 월명사, 구례 연곡사에서 수행한 뒤 76세로 입적했다. 이후 문도들이
法空非我道非親 樹倒藤枯笑轉新법공비아도비친 수도등고소전신風掃止啼黃葉盡 千林全體露天眞 풍소지제황엽진 천림전체로천진 (법공(法空)도 아(我)가 아니요, 도(道)도 친하지 않도다./ 나무가 넘어지고 등나무가 마르니 그 웃음 더욱 새롭도다./ 바람 불어 울음 그치게 한 황엽(黃葉)마저 다 쓸어 버린 곳에/ 온 산 수풀 전체가 천진(天眞)을 드러내도다.)‘금강경’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에서 “수보리야, 말한 바와 같이 법상(法相)이란 여래가 설하되 법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법상이니라(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 說卽非法相 是名法相).”라는
아무것 아니라서 좋다나는 내가아무것 아니라서 납작 엎드려 있을 수 있어 좋다만약 기린의 무엇이 되었다면긴 다리로 설렁설렁 삶을 건너뛰었을 테고나를 낮추어 겸손과 친하지 않았을 테고속 깊은 배려와 손잡지 않았을 게다나는 내가 아무것 아닌 게 좋다뜬소문처럼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아도 되고속 보이게 얕은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고가자미처럼 엎드려세상에 없는 듯 있어도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으니눈치 볼 것 없는 무명이 이리 좋다(문영숙 시집, ‘당신의 북쪽’, 애지, 2022)오규원 시인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라는 제목의 시
月照諸品靜 心持萬緣輕월조제품정 심지만연경獨坐一爐香 金文誦兩行 독좌일로향 금문송량행知機心自閑지기심자한(달빛 비추니 온 세상 조용하고/ 마음 굳게 지니니 모든 인연 가볍도다./ 홀로 앉아 향로에 하나의 향 사르고/ 경전 말씀 외우노라./ 세상 돌아가는 것 알기에 마음은 스스로 한가하다.)표충사 만일루는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 월암(月庵) 스님이 세웠다. 1926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1929년 중건됐다. 2010년 보수할 때 주련을 유물관으로 옮겼다. 그러나 주련은 게송을 온전하게 인용한 것이 아니다. 앞의 두 구절은 당나라 시인
“장님이 광명을 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광명은 새로 만들어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경전에서 ‘연화장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의 눈을 뜨면서 나타나는 세계’라고 강조합니다. 부처의 눈을 뜨면 모든 이가 부처로 보입니다. 재밌는 점은 장자도 비슷한 말을 한다는 겁니다.”정용선 박사가 11월15일 오후7시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이한구) 3층 다보원에서 열린 화요열린강좌에서 ‘장자를 통해 붓다를 만나다’를 주제로 강연했다. 정 박사는 이날 “살고 죽는 도리를 깨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