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의 세계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법열이 샘솟는 듯 했다. 미얀마 마하시 선원 묵언실. 우리 선가와 굳이 비교하자면 무문관과 다름 아니다. 밖의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자그마한 창 뿐. 잠시 선정에 든 묘원 거사. 그는 미얀마 수행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마하시- 쉐우민 선원서 4년씩 8년을 수행했다. 묘원 곽준(60세)거사는 그곳에서 지난 50년 생애 동안 단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운송업을 하면서 많은 돈도 취해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없었다. 대한 씨름협회 총무이사, 국립극장 예술진흥회 이사를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쳐 보인 인생이었지만 이런 자유는 얻어 본 적이 없었다. 차창 밖의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 한 점도 눈에 보이는 듯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왜냐? 으아~ 또 다시 제가 불자가수 회장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005년 3월 28일 오후 2시. 대한불자가수회 제 9대 회장 이·취임식이 있는 날, 일원동 전국비구니회관에서 스님들과 많은 재가 불자들이 대강당을 가득 매워주셨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축전도 각계에서 보냈고 축화난도 수 십 개가 왔습니다. ‘화환사절’이었는데 말이죠. 저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지켜봤습니다. 더욱 어깨가 무거워졌지만 힘은 더욱 솟아납니다. 그날 사실 저는 새벽에 호주에서 날아왔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가족들도 볼 겸 또 은근히 자랑할 마음에 말이죠. 하하 1990년대 초대 회장 이후 3번째 맞는 불자가수회 회장직에 대해 집사람과 아이
안경애 보살은 스승 백봉 거사의 가르침을 뼛 속 깊이 새기며 정진의 끈을 놓지않고 있다. 이 세상 색·소리는 실제 존재하는가? 여고시절 강한의문 평생 화두로 자리잡아 백봉 거사 첫 만남 후 올곧은 참선 30여년 “본래면목 바로 밝혀 참된 삶 살고 싶어” 당대 재가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백봉 김기추 거사가 대중들에게 물었다. “여기 백합꽃이 있는데 무슨 색깔인가?” 눈에 보이는 색이야 누구인들 모를 것인가. 그러나 대중들은 침묵했다. “무색(無色) 비색(非色)이야.” 대중 속에 섞여 있던 대학 3학년 안경애 씨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비색’이란 단어는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그 소리는 단박에 그를 수행 정진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선법문 한마디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산 자는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고, 늙음이 온다면 바로 죽음이 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중생의 규칙이다. 태어났음에는 항상 면전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 자나 연장자나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죽음의 사신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모든 사람들의 돌아갈 곳은 바로 죽음이니라. -숫타니파타 김기호 실장은 자살이란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 불바다에 기름을 지고 뛰어들듯 윤회와 고통의 굴레를 더욱 칭칭 옭아매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판한다. 사바(娑婆)는 범어 Saha에서 유래한 말로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인토(忍土)’를 의미한다. 탐냄,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거센 회오리를 참아야 하고, 오온으로 비롯되는 온갖 고통을 참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을 비롯한 7대 종교 지도자들의 협의기구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공동대표 의장 법장 스님)가 오는 3월 24일 독도를 방문해 독도 경비대를 위로하고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올린다. 종교지도자협의회는 이에 앞서 2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독도 주권 침해에 관한 규탄 성명을 통해 “온 인류와 일본 내 양심적인 국민 및 종교인은 대한민국 국민과 연대해 일본 정부의 잘못을 시정하는데 나설 것”을 촉구했다. 성명을 낭독한 공동대표 의장 법장 스님과 이웃 종교 지도자들은 “대한민국 내 종교인과 국민들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음모를 경계하고 모든 국민이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에 나서자”고 제안했다. 지도자들은 이어 “일본 정부는 침략 전쟁과 위안부
아마라와티는 태국의 수행전통을 영국에 재현한 곳으로 많은 출가수행자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재가수행자들의 발길도 잇따르고 있다.[사진제공=대한불교진흥원] 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전원에 위치해 런던 주민들이 주말에 방문하여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오기에 딱 알맞은 거리에 있는 아마라와티 불교승원은 숲속수행자들의 전통에 걸맞는 아늑한 숲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상좌부 불교 중에서도 늘 숲속에서 명상에 들었던 부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숲속승가를 설립한 아잔차에게 찾아온 서양 젊은이들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었던 아잔 수메도가 설립한 불교수행센터이다. 1984년 아잔 수메도가 개원 아잔차스님과 서양인 제자들의 인연은 1960년 스님이 영국, 스위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으아~ 날씨는 어느 덧 산들바람 부는 봄이 오려나 봅니다. 우리 가요계에도 봄이 올까요? 평생을 가수로 살아온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가요계는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불경기도 한몫하지만 mp3, 인터넷이 자꾸 들이대서 말이죠. 방송활동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제게도 빠른 변화의 바람은 거세기만 한데 나이든 어르신들은 오죽할까요? 오래 전에 한 노스님께서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연세 많은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이러한 변화에 상당수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지지직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유명 가수의 음성을 서로 돌려 들으며 사랑을 꽃피우던 LP 레코드 시대였는데 말이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인술인, 영주지역의 명의, 버거시병의 권위자, 독거노인들의 아들, 수행하는 포교사 등…. 경북 영주에서 40여년 넘게 한약방을 운영했던 제광 신문웅(66) 원장을 이르는 말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폐쇄성 혈전 혈관염으로 손발을 절단해야 한다던 중병환자를 치료하는가 하면 오랜 고질병도 그의 손이 닿으면 씻은 듯 낫고는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20여 년간 매년 소년소녀가장이나 외로운 노인들 500여명에게 무료 투약을 하고 있으며, 연말이면 수천포기의 배추김치를 담궈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매년 1~2차례씩 성대한 노인잔치를 열고 있으며, 500~600명의 지역 노인들에게 효도관광을 정기적으로 시켜드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신 원장의 자비행과 인술이 알려지면
용맹정진 해야 수행 참맛 알고 평상 화두 잡아 “죽은 다음 공부하라” 혜암 스님 말씀 뼈에 새기며 정진 해인사 관음전에서 성철 스님이 내려오고 있었다. 60대에 접어든 관해 조호정 거사(69)는 성철 스님을 보는 순간 땅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리고 여쭈었다. “적수단도(赤手單刀) 살불살조(殺佛殺祖)라 했는데 단도를 쥔 자는 누구입니까?” 성철 스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쳤다. 첩첩산중의 한밤중 호랑이 눈처럼 타오르는 성철 스님의 안광만 느껴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해인사 방장 혜암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올렸으나 혜암 스님은 “더 정진하라”는 한마디만 던졌고,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은 “대부정”이라 했을 뿐이다. 답답했다. 임제가풍의 대표문구인 ‘적수단도 살불살조
“얘들아, 다섯 시 반이야! 갈 때 됐는데 일어나야지.”지영(13)이는 엄마 목소리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벌써 새벽이라니…. 아!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확 그만둘까. 안돼, 그래도 어제 3600배나 했는데….’지영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그만둘까 하는 유혹과 갈등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곧 동생 융기(12)도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씻는 둥 마는 둥 세수를 한 두 남매는 꾸역꾸역 아침식사를 마쳤다. 새벽 6시, 드디어 출발. 둘은 아빠 민병흥(53·현진) 씨 차에 올랐다. 엄마 오애자(47·보문월) 씨도 애들과 같이 절을 하려 집을 나섰다.주변 격려 속 자발적 시작처음 지영이와 융기가 2박3일간 1만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애들 못지않게 긴장한 건 부모다. 지난
부처님이 25안거를 성만한 수행성지인 인도의 쉬라바스티에 우뚝선 한국의 천축선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21년 째 되는 해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해만 제외하고는 늘 우안거에 들만큼 불연이 깊은 땅인 인도의 쉬라바스티에 선기 성성한 한국의 수좌 스님 6명이 2004년 11월 26일 동안거에 들었다. 한국의 제방 선원에서 선감이나 입승 소임을 맡아 20안거 또는 10안거 이상 화두를 들고 탁마해 온 수좌 스님들이다. 수좌 스님들은 지금 실험 중이다. 도와 덕이 드높은 수좌 스님들의 안거를 두고 ‘실험’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쉬라바스티에서의 동안거는 분명 ‘실험’이다. 성도재일인 1월 17일부터 열흘 간 80여 불자들과 함께 인도 성지 순례를 다녀 온 충주 석종사 선원
1978년 11월 대구 동화사 주차장. 채 스무 살도 안된 한 여학생이 버스에서 내리더니 동화사 쪽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때마침 같이 오르던 한 비구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혼자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지?” “스님 되려고 절에 갑니다.” “젊은 여학생이 출가는 왜?”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고개를 끄덕이던 스님은 동화사에 다다르자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일 비구니 노스님을 그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출가자의 길만큼 힘든 것도 없지. 늘 춥고 배고픈 생활이야.” “도라지 뿌리만 캐먹더라도, 설령 수행하다 길거리에서 얼어 죽어도 좋다는 각오쯤은 돼있습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속히 오도록 해!” 버스 타러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