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물어보고 따질 것이 참 많다. 그래서 부처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라 외로울 때는 염불하고, 괴로울 때는 기도한다.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아들의 죽음에 미쳐버린 끼사고따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고, 99명을 죽인 무자비한 살인마인 앙굴리말라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깨달음은커녕 간절한 기도 하나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 보시기에 나의 믿음과 수행,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일까. 도대체 대자대비는 무엇이며, 중생구제의 뜻은 무엇일까.대대로 부처님을 믿고
삼사순례를 가는 사찰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되었다. 앙상한 가지로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 끝자락에도 초록빛 새 생명이 싹트며 따스한 봄의 향기 속에 활기를 찾고 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습 하나하나에도 위없이 높고 깊은 부처님의 법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해보며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2013년 4월의 봄을 떠올려 본다.당시 나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소확행(小確幸)이 있다면 일주일에 4
아들이 대학생, 딸이 수능을 앞두었던 때,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외도의 광풍이 몰아치니, 딛고 있는 땅은 그대로 싱크홀(sinkhole)이었다. 땅이 꺼지면서, 몸은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배신감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남편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눈이 멀어 요지부동이었다. 나를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졌고, 삶의 지향점은 상실됐다.식욕이 달아나면서 물 한 모금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게 됐다. 깊은 우울이 나를 덮쳤다. 죽으
첫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가부장적 문화의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4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정이라고는 알지 못한 채, 막내다 보니 어머니의 아픔이나 힘듦도 모른 채 철없이 살았다. 생계에 바쁜 어머니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자주 가시던 절에 데리고 갔다. 오색의 등이 만개한 봄꽃과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어린 나는 부처님을 향해 어머니를 따라 조그마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어머니의 절하시는 모습은 비장하리만치 절
1998년 아산교육청학생상담자원봉사 활동을 함께하던 회원의 안내로 만덕사라는 절에 첫 발을 내딛었다. 불연의 시작이었다. 스님이 주시는 녹차를 음미하며 불교를 조금씩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시댁 육촌이종형님이 절에 함께 가자고 해 간 곳이 충남 아산 보광사였다. 그리고 나는 이 도량에서 지금껏 신행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3년 초여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주지스님의 권유로 마곡사 본 말사들과 연합으로 진행되는 1박2일 임원연수에 재무 소임으로 참석하였다. 불교교리 강의를 듣고 발우공양, 저녁예불, 108배, 새벽예불 등
시누이가 하던 조그마한 가게를 물려받았다. 정류소 앞이어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가게를 이용하는 곳이었다. 가게에는 법복을 입은 보살님들이 자주 오셨고 유독 눈에 띄었다. 하루는 궁금하여 “보살님 어디 갔다 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사에 다니는 신도라고 하였다. ○○사는 마침 우리 집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는 절이었고 나도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세상살이는 누구나 쉽진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힘든 일이 많았고 부처님에게 기도하면 모든 어려움이 잘 이루어질 것 같다는 막연한 심정으로 00사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법당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사찰은 산중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부분의 유명 사찰이 크고 유명한 산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현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스님들의 법호에도 산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고, 사찰명도 가야산 해인사 등과 같이 산 이름을 앞에 붙이고 있기 때문에 산중사찰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그렇지만 부처님 재세시부터 사찰은 걸어서 한 시간 내에 왕복할 수 있는 지역에 설립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이유는 탁발하기 쉬워야 하고, 사찰 주변의 지역 주민들을 교화하는 데 바
고구려에서 세운 첫 사찰인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가 정확히 어디에 세워졌던 것인지는 기록이 없으나 아마도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 안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중국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337~385)이 그가 존경하던 도안(道安, 312~385) 스님을 장안에 모셔 오고 나서 오중사(五重寺)를 세워 그곳에서 경전을 번역하게 했던 것을 보면 그러한 예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는 국내성이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체제를 구성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산성 안에도 절이 세
지금은 도심 포교당이나 시민 선원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도시에도 절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절은 심산유곡에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한국불교와 도시가 소원한 관계였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신라 시대에는 황룡사가 수도인 경주 한복판에 위치하였을 정도로 불교와 도시는 밀접한 관계였다. 하지만 이후 선종의 도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의 유포,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등의 이유로 절은 도시와 멀어졌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사회와 물리적·정신적으로 단절된 은둔의 종교, 반사회적 종교, 염세주의적 종교라는 인상을 심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처음 법륜을 굴리기 시작한 이래 불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인도의 전통 종교인 브라만교(婆羅門敎)는 주로 농촌에 탄탄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불교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붓다 시대의 고대 인도는 16대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2대 강국은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Kosala)였다. 부처님은 주로 열여섯 나라의 수도와 중요한 도시를 왕래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펼쳤다. 붓다 시대의 6대 도시는 마가다국의 수
인도문명사의 미스터리는 여러 가지를 손꼽을 수 있겠지만, 도시의 등장에 관한 의문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략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 문명기의 여러 도시가 사라져버린 이후, 도시의 흔적은 뒤이어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인도의 역사 속에 도시들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천년이 흐른 뒤이기 때문이다. 그 비어버린 천년을 우리는 여전히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기원전 500년 혹은 600년경 전후 불교가 등장할 무렵에야 수십여개 도시의 흔적들이 역사적 유물과 문헌을 통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신흥종교였던
“어휴, 관세음보살···.”‘미스트롯2’ 팀미션 최종결과가 발표되던 순간, 가수 은가은(35)씨는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찾고 있었다.“당연히 편집될 줄 알았죠. 그런데 그대로 방송에 나갔더라고요. 그날 아마도 전국의 모든 스님들께 응원 메시지를 받은 것 같아요. 지금은 사찰행사마다 불러주셔서 ‘절통령’으로 등극했습니다. 하하하.”‘미스트롯2’에서 뛰어난 가창력과 비주얼로 단박에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은가은씨. 하지만 그에게도 길고 긴 무명의 세월이 있었다. 무려 16년이었다.“5년 전, 그러니까 2018년이었어요. 활동을 해
올해 5월4일부터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전국 65개 문화재사찰의 무료입장이 가능하게 됐다. 문화재사찰 무료입장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이후 61년 만이다. 조계종은 이날 전국 65개 사찰의 매표소 현판을 ‘불교문화유산 안내소’로 교체했다. 이에 따라 사찰과 탐방객들 간 갈등의 상징이 됐던 사찰 문화재관람료 매표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58, 서울 마포을)은 문화재관람료 논란을 해소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2021년 11월 “국가지정문화재의 유지관리 비용은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면
‘동양의 진주’ ‘인도양의 보석’이라 불리는 스리랑카는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찬탄했고, BBC가 2002년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50’에도 포함됐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0대 해변 중 하나도 스리랑카에 있으며, 세계 서핑의 수도로 일컬어진다. 게다가 세련된 숙박시설에 다양한 먹을거리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바닷가 등 휴양지에는 젊은 남녀나 가족단위의 서양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스리랑카는 여
43일간 1167km를 걸으며 부처님 발자취를 따른 상월결사 인도순례 동참 대중 75명이 회향을 앞두고 그 동안 느꼈던 마음 속 감동을 전했다. 걷지 못했으면 보지 못했을 현장과 함께 숨 쉬었기에 나눌 수 있었던 서로의 마음에는 환희와 기쁨, 참회와 원력의 진심이 가득하다. 3월21일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서 열린 소감 발표의 시간과 순례 과정에서 전했던 순례단의 생각을 한 자리에 모아 기록했다. 편집자 1조 비구범해 스님평생의 소원이 부처님 성지를 내 발로 걸어 순례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순례를 통해 금생의 소원을 다 이룬 셈이다.
한국불교 중흥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며 시작한 상월결사 인도순례의 회향을 축하드립니다. 43일, 1167km의 위대한 대장정을 이끄신 자승 큰스님, 이번 대작불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온갖 어려움에도 묵묵히 결사의 정신을 실천하신 순례단 여러분께도 감사를 전합니다.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번 순례에서 자승 큰스님은 “원력의 씨를 뿌리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좋은 결실을 위해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셨습니다.우리 사회에 직면한 수많은 도전과 과제를
오늘 성스러운 날 상월결사 순례단이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종단의 수행자들이 43일간 성지를 참배하고 위대한 스승의 길을 따라 돌아오시니, 종로 거리에는 법향이 그윽하고 총본산 도량 전체가 환희롭습니다. 생명의 연둣빛이 온 산과 들을 장엄하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때마침 함께 어우러지니 시방세계 모두가 화엄 세상입니다. 종단의 미래인 상월결사 순례단 여러분! 반갑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수행자 한 분 한 분 모두가 무탈하게 돌아왔으니 이는 종단의 기쁨이요, 홍복(弘福)입니다. 붓다의 길을 직접 걸은 여러분
“43일간 부처님 성지를 직접 걸으며 한국불교 중흥, 국민의 행복 나아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발원과 원력이 모아진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사부대중은 부처님 가르침 따라 사회에 필요한, 국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불교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상월결사 인도순례단 대변인 종호 스님이 3월23일 회향식 후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스님은 “43일간 25km를 매일 쉼 없이 걷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순례단 대중 의 간절한 발원이 있었고, 그 힘을 바탕삼아 원만회향 할 수
상월결사 인도순례 43일간의 일정을 회향했다. 4월23일 3만여 인파가 몰린 가운데 서울 조계사와 우정국로에서 열린 회향법회는 인도에서의 순례단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자리였다. 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전법을 염원하며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서원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자고 먹고 걷는 43일간의 일정은 고난의 길이었다. 혼자라면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여정이었다. 아무리 장한 신심이 있더라도 풍토가 다르고 먹거리가 다르고, 기후가 다른 곳에서 매일 25km를 걸으며 43일간의 순례를 회향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향법회에 동참한 3만여 사부대중은 43일간 대장정을 마친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에게 아낌없는 찬탄을 보냈다. 순례단의 세계평화·생명존중 원력을 본받아 한국불교 중흥을 위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전국비구니회 부회장 광용 스님은 “오직 부처님을 염하며 수만 걸음을 옮긴 순례단에 찬탄을 보낸다”며 “역사적으로 한국불교는 법의 등불이 꺼질 위기에 처할 때마다 원력을 모아 불씨를 살려냈듯 이번 순례가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 본다”고 했다. 동국대 경주병원법당 주지 혜능 스님도 “1167km에 달하는 긴 순례로 많이 지쳤을 텐데도 당당히